<< 파란 달 아래 >> '복거일' <<해설>> PEF 985 KU 21350749 <조선 통일 관계 사료집>, 조선역사연구회, 조선사 조선역사연구회에 의해 작성된 이 전자문헌목록은 2043년의 조선 통일에 관한 자료들을 망라한 것이다. 이 목록의 목적은 조선 통일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한데 모아 연구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무척 어려운 임무일 수밖에 없다. 분단이 현대 조선의 역 사에서 중심적 문제였고 그것의 극복이 조선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 으므로, 20세기 초엽에서부터 21세기 중엽에 이르는 조선 역사에 관한 자료 들의 상당 부분이 통일이라는 주제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2061년에 시작된 이 작업은 기대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진척되어서, 자료의 수집은 아직 계속되고 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에는 어지간한 자료 들은 거의 다 수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되었다. 이 사실은 본 목록에 대한 저명한 역사가들의 높은 평가에서 그 일단을 규지할 수 있다. 이 목록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고 - 역사에 대한 연구가 끊어지지 않는 한, 물론 이런 목록이 완성될 수는 없다 - 자료의 보완이 계속되고 있으므 로, 편자는 독자들의 질정과 충고를 기대하는 바이다.아울러 자료의 제공을 바라마지 않는다. 연락처는 <개성특별시 진봉구 유릉동 34번지 풍덕빌딩 2903호 조선역사연 구회, 우편 번호 123 - 301, 전화 01 - 5022 - 81428 / 81429, 팩스 01 - 5022 - 81430 / 81431, 신용 구좌 CCB 2053 - 11 - 12 - 0267>임. PEF 985 KU 21350749 P 31562 A <파란 달 아래>, 송선희, 소설 <파란 달 아래>는 2055년에 송선희가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은 2039년의 조선공화국 월면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일성 혁명 기지 요원 리명순이 쓴 동명의 수기에 토대를 두었다. 실은 리명순이 구술한 것을 그 수기를 연재한 <송도일보>의 기자가 다듬었 다고 전해진다. (리명순과 그녀가 쓴 회상기에 대해서는 본 목록의 "P 31561 <파란 달 아래>, 리명순, 수기"를 참조할 것. 아울러 그 수기를 토 대로 하여 2067년에 제작된 영화에 대해서는 본 목록의 "P 31563 A <파란 달 아래>, 삼천리 영상 기획, 영화"를 참조할 것.) 리명순의 수기는 월면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에 관한 생생한 기록으로 불 소한 가치를 지닌 자료다. 장영실 기지의 요원들이 남긴 기록들에 비하면, 김일성 혁명 기지 요원들이 남긴 기록들은 아주 적다. 그런 사정으로 인하 여, 리의 수기는 더욱 가치가 크다. 아쉬운 것은 그 수기가 소략하고 추상 적이어서 당시의 월면 기지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송선희의 소설은 당시의 두 월면 기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 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월면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 에서 이미 지역 감정이 노출되었고 그 것의 모습이 통일 조선사회에서 나온 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감정이 나온 상황과 과정을 살피는 것은 아직도 조선 사회를 괴롭히는 지역 감정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이다. 아울러 <파란 달 아래>는 당시의 월면 기지의 정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장영실 기지의 기록을 토대로 리명순의 수기에 나오는 잘못된 설명 들을 수정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허구적 작품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것보다 훨씬 큰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를 내려도될 것이다. (<파란 달 아래>의 소설로서의 특질들과 송선희의 작가로서의 위치에 대하여 는 P 31562 B 에 수록된 평론들을 참조할 것. 특히 그것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박기흥의 평론 <사실의 복원으로서의 허구>가 유용함.) << 파란 달 아래 >> '복거일' <<제 1장 1편>> "누님, 오늘 아침엔 무슨 도흔 일이 있습네까?" 누가 부엌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듣지 못했던 터라, 나는 흠칫했다. 호박 나물을 만들던 볶음판을 든 채, 나는 흘긋 돌아다보았다. 리병규가 문간에 서 있었다. 어쩐지 좀 엉성하게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몸매엔 후줄근한 작업복이 차라리 어울렸다. 그래도 입가에 띤 웃음과 눈 속에 담은 가벼운 물음이 그의 얼굴을 녀느 때보다 생기있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압록강 연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얼굴이 문득 더워졌다. 부끄러워할 만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은 아니었다. 남반부에서 류행하는 부르죠아적 가요를 흥얼거린 것이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 리 앞에서 여 러 번 남반부의 자본주의적 퇴폐상을 헐뜯었던 나로선 특히나, 게다가 <압록 강 연가>는 <강계 미인>이니 <한양 가신님>이니 하는 가사에서 녀성을 성적 노예로 삼았던 봉건적 유교 사상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노래였다. 그렇긴 했지만, 혼자 일하면서 그런 노래를 흥얼거린 것이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은 아니었다. <누님도 그런 자본주의적 군중가요를 부릅네까?>하고 리가 한마 디 하겠지만. 우리 기지의 텔레비전들은 거의 언제나 남반부 방송국들에 맞 춰져 있었고, 솔직히 얘기하면, 군중가요들은 남쪽에서 나온 것들이 북쪽에 서 나온 것들보다 나았다. 내가 얼굴을 붉힌 것은 어쩌면 내가 기지의 동료 요원들을 남자로서 평가 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평가해본 사람들속엔 리도 들어있었다. 게다가 뜻밖에도 리가 남자로서 매력이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 고서 그 까닭을 따져보기까지 한 참이었다. "문 열어놓디 마시. 들어올라문, 들어오고..." 뜻과는 달리 말이 거 칠게 나왔다. 공기 재순환 담당인 림치홍은 거르개를 자주 갈아도 공기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고 성화였다. 그래서 나는 부엌 문을 닫아놓는 일에 무척 마음을 썼고 부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문을 꼭 닫으라고 신칙하는 것이 거의 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내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좀 거칠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더니, 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가왔다. 그는 어지간해선 내 말에 나무람을 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엔 누 님한테 무슨 도흔 일이 있는 것 같습네다." 리의 이름은 내 이름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는 원산의 훈련소에서 만났 을 때부터 그는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황해북도 곡산에서 태어났 다는 그는 자강도 만포에서 태어나 강계에서 자라난 나와는 먼 친척도 아니 었다. 실은 그의 륙대조인가 칠대조인가는 리조 말엽에 중국에서 조선으로 나온 장사꾼이었다고 했다. 반면에 우리 집안은 경주 리씨였다. 내가 어렸을때 증조 클마니는 우리 집안이 전에는 훌륭한 량반 가문이었 다는 것을 늘 말씀하셨다. 클마니는 내가 어렸을때 돌아가셨으므로, 나는 클마니에 대해선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대신 아흔이 넘게 사신 증조 클마 니가 내겐 클마니와 같았다. 기본출신이 아닌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량 반 집안임을 내세우는 것이야말로 유교적 봉건사상이었지만, 모르는 새 나는 우리 집안의 내력에 대해 마음 한구석으로 자부심 비슷한 것을 품게 되었다. <<제 1장 2편>> 훈련소에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불쑥 리가 젊어서 백혈병으로 죽은 맏누 나 애기를 꺼냈다. 그리고선, 나를보면, 그 누나가 생각난다고 했다. 병으 로 죽은 사람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듣기에 좋지 않아서, 그때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뒤로 친숙하게 되었고 모르는 새 나는 그를 누 나로서 대하고 있었다. "도흔 일이 있는 걸 어드케 알았나?"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나는 되물 었다. "눈치 하나 빠르구만." 하긴 공격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였다. 내가 열두 해 동안 이름만 군인의 아내였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나는 낙하 산병의 아내였었다. "뭐.." 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요 메칠 새 누님이 몸이 안 도흔 것 같고 얼굴을 봐도 우울해 보이더니, 오늘 아침엔 콧노랠 다 부르고..."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다. "오늘 아침엔 누님이 별로 고와 보입네다. 꼭 센네 같소." 리의 어조가 워낙 진지해서, 나는 나오던 핀잔을 되삼켰다. 하긴 하늘 나라 에 사는 센네 같단 얘기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 아서, 나는 몸을 돌려 볶음판을 전기 화덕에 내려놓았다. "누님, 기분이 상했슴마?" 어느 사이엔가 소리없이 다가온 리가 왼팔을 내 허리에 가볍게 눌렀다. 그의 입술이 내 귓바퀴를 가볍게 스쳤다. 살을 간지럽히는 듯한 기운이 귓바퀴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다리에서 기운이 빠져서 멍해졌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마음을 다잡았다. 리가 한 짓엔 별뜻이 없었 다. 남들이 보면야, 나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줄로 알겠지만, 그는 그저 미국 영화에서 본대로 서양 사람들이 하는 짓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펄쩍 뛰었을 터였지만, 그가 그러면, 그냥두었 다. 중국 샹하이에 유학했던 덕분인진 몰라도, 그가 하면, 그런 짓이 어쩐 지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달랐다. 가슴이 거세게 뛰면서, 몸이 저절로 그에게로 기울었다. 리의 냄새가 코에 닿았다. 이곳에선 사람들이 흔히 우주복을 입고 일했 다. 물이 워낙 귀해서, 목욕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물과 공기가 재생되었 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선 희미하게나마 식은 땀 냄새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의 냄새는 좀 달랐다. 그에게선 언제나 풋풋하면서도 좀 축축한 냄새가, 마치 잘 썩은 나무 닢사구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났다. 그런 냄새는 아마도 그가 하는 일 때문일 터였다. 그는 기지의 버릴물 처 리 담당 요원으로 쓰레기들과 버릴물을 처리해서 재생하고 남새와 과일을 재 배했다. 따지고보면, 내가 그와 가깝게 된 데엔 우리가 일로 해서 가깝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단 사정도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나로선 물론 신선한 남새를 얻어 야 음식을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버릴물과 음식 찌꺼기를 치우는 일에 늘 마음을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달 나라에선 음식 찌꺼기를 가볍게 밖에 버릴 수가 없었다. 밖엔 세균이 없었으므로, 천 년 만년을 둬도, 썩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버릴물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음식 찌꺼기도 유기물이 거의 없는 이곳에선 귀중한 자원이어서, 그냥 버 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였다. 그의 우스개 소리대로, 나는 그에게 헌것을 주고 새것을 받았다. <<제 1장 3편>> 문득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르는 새 나는 리의 냄새를 깊이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몸 속 깊은 곳 어디에서 발그스레해진 무엇이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다 ...' 리에게로 기울었던 몸을 바로하면서, 나는 얼굴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제 아침에 월경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내겐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동안 네번이나 거른 참이었다. 의사인 김인구 박사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환경이 크게 바뀐 터라, 한두번 거르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란 얘기였다. 하긴 김박사의 얘기대 로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에겐 달 나라에 온 것보다 환경이 더 크게 바뀔 수는 없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중력이 6분지1로 줄어든 것이 큰 변화였다. 그런 중력의 변화는 지구에선 어떤 설비로도 재현할 수 없었고 아무리 철 저한 적응 훈련도 결코 충분할 수 없었다. 밤과 낮이 길어서 한꺼번에 거의 반 달이나 계속되는 사정에도 몸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렇긴 했지만, 내가 넉 달째 거르자, 김 박사도 좀 걱정하는 낯빛으로 내 건강에 대해서 캐물었다. 물론 나는 그리 마음을 쓰지 않는 것처럼 처신했다. 떠들고 다닐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속으론 꽤나 마음이 쓰였다. 따지고보면, 나는 아직 서른 여섯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녀자 나이 서른 여섯이면, 누가 뭐 래도, 한창 때였다. 다시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마음이 쓰였던 것은 아니었다. 실은 나는 다시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랬다. 지금도 내 마음은 효영이 아버지의 모습과 목소리와 냄새로 가득 했고 다른 사내가 들어올 틈은없었다. 그래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꽤나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고 어쩐지 녀자로서 좀 빠지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기지엔 녀성 요원이 셋뿐이었고 남성 요원들이 모두, 그러니까 사령관님을 빼고선 모두, 나를 동료 요원으로서보단 녀성으로서 대한다는 사실이 나를 그런 일에 민감하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눈길은 늘 속에 품은 욕정이 실린 듯 거세어서, 무심히 받아내기 어려웠다. 기지 안에선 모두 가볍게 차리고 지내는 터라, 마음이 더욱 쓰였다. 더구나 다른 녀성 요원들은 첫 달만 거르고 다시 정상적이 되었다고 했다. 특히 마음에 걸린 것은 그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이었다. 간호사인 최옥순 소좌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심리학자 겸 정신과 의사인 량정애 박사는 여덟 살이나 위였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마음을 달랬다. 실은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이 한번만 걸렀을 것 같진 않았다. 이래저래 귀찮아서, 나도 한때는 다시 시작됐다고 김 박사에게 얘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녀성 요원들에게도 못할 말이 없는 김 박사였지만, 이번엔 증거를 보자고 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긴 했어도, 어저께는 너무 아파서, 월경이 마침내 다시 시작된 것을 크게 기꺼워할 마음이 나지 않았었다. 마치 무슨 기계가 살을 쥐어짜는 듯했다. 오늘 아침도 아랫배 어디엔가 아픔이 배어있는 듯 했지만, 마음을 어지럽게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조그만 아픔은 내가 느끼는 기꺼움에 맞는 배경처럼 느껴졌다. <<제 1장 4편>> "누님." 내 허리에 두른 팔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 리가 은근한 어조로 불렀다. 이어 그의 손바닥이 내 아랫배를 살그머니 쓰다듬 었다. 전에는 없었던 대담한 몸짓이었다. "왜?" 팔꿈치로 리의 팔을 밀어내면서, 나는 일부러 좀 퉁명스럽 게 대꾸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리의 손바닥이 내 몸의 깊은 곳에서 무엇을 불러내는 듯해서, 가만히 있으면, 그에게 매달리게 될 것만 같았다. "누님이 놀랄 일이 하나 있는데." 내가 돌아다보자, 두 팔을 뒤로 돌려 감추면서, 리가 한 걸음 물러 났다. "한번 알아 맞혀 보시라요." "수박?" 나는 좀 짓긔게 물었다. 나는 리가 아직 수박은 재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는 벌써부터 기지를 지하로 넓히는 일에서 나온 모래에 쓰레기를 섞 어서 만든 흙에다 버림물로 남새들을 키웠고, 그의 솜씨가 좋다는 얘기가 펴져서, 남반부 기지의 요원들이 그의 솜씨를 구경하러 일부 러 찾아오기까지 했다.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가 제대로 자리잡은 지 이제 석 달을 겨 우 넘긴 참에, 호박이나 부루 같은 남새를 키워낸 것은 칭찬받을 만 했다. 그래도 수박처럼 큰 과일을 키워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입에서 들은 터였다. "아니. 수박은 아직..." 고개를 저으면서, 리가 좀 맥살이 빠진 목소리를 냈다. 이어 내가 입가에 웃음을 띤 것을 보더니, 목소리 를 좀 높여 항의했다, "내레 아직 수박을 키울 처지가 아닌 건 누 님도 알잖습네까?" 리가 풀이 죽은 것이 좀 마음에 결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팔 을 토닥거려주었다. "장난으로 해본 소림메, 리명규 동무." 리가 싱긋 웃었다. 웃음 은 밝은 편이었지만, 어딘지 좀 쓸쓸한 기운이 어렸다. 하긴 그에 겐 언제나 좀 쓸쓸한 기운이 어렸다, 가슴속에 외로움의 덩이를 품 은 것처럼. 그러고보니, 이 기지에 그런 외로움의 덩이를 가슴 속에 품지 않 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익숙한 세상과 정든 사람들 을 버리고 이 낯선 세상을 찾아오려면, 누구든지 먼저 가슴 속에 외 로움의 덩이를 품어야 할 터였다. 그제서야 나는 실은 내가 리의 내력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야 훨씬 많았지만. 이곳엔 지구에 관한 얘기들은, 특히 거기서 살았던 얘기들은, 되 도록 하지 않는다는, 말없는 약속 비슷한 것이 있었다. 가까스로 마음 속으로 밀어넣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일은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얘기를 하게되 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되도록 남의 얘기를 듣지 않으려 했었다. 나는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었다. "토마토?" 멸칠전 리를 따라 온실을 한바퀴 둘러다보았을 때, 얘들 주먹만한 토마토들이 열린것을 보았던 것이 었다. "어드케 아셨습네까?" 리의 읏음이 좀 더 밝아졌다. "누님, 실은 이게 첫번으로 익은 놈인데...?" 그가 주춤거리면서 앞 으로 내민 손 안에 발가우리한 토마토가 한 알 들어있었다. "토마 토는 미용에 도타 하니, 누님이 드리라요." 나는 잠자코 토마토를 받아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나는 무 엇이든지 냄새를 맡아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사내들도 냄새로 판별 했다. 아무리 외모가 그럴 듯해도 냄새가 좋지 않은 사내에겐 마음 이 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 속엔 사람이 외모는 좀 꾸밀 수 있어도 냄새는 바꾸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 1장 5편>> 토마토의 짙은 풋내가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냄새레... 토마톤 냄새가 독하디. 그러고보니, 과일 냄새 맡아본 게 얼마만이냐?" 나의 가벼운 탄식에 내 낯빛을 살피던 리가 소리내어 웃었다. 웃 음 소리가 맑고 밝아서,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저그나." "네?" "료리사레 도흔 걸 먼저 먹으문..." 그의 낯빛을 살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사령관님께 드리는 것이 도티 않을까? 나야..." "아닙네다."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토마톤 누님 겁네다. 다음 주면, 많이 딸 수 있으니끼니, 그 땐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겁네다. 이건 내레 누님께 줄라고. .." "고맙슴메." 그의 어조가 너무 거세어서, 나는 일부러 가벼운 목 소리를 냈다. "그러문..." 여러 달 신선한 과일을 맛보지 못한 입에 즙 많은 토마토의 과육 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쾌락으로 닿았다. 어쩌면 내가 그러리라 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몰랐지만. 요원들은 날마다 사과 한 알씩 받았는데, 갈무리가 잘 되어서, 사과 들은 싱싱한 편이었다. 흘긋 올려다보니, 리는 오른손으로 옆 턱을 고이고서 내가토마토 를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달라진 것이 눈에 들 어왔다. 속이 풋풋한 즙으로 채워진 듯, 그의 엉성하게 짜여진 듯 했던 몸이 자연스럽게 부풀어났고, 얼굴은 시들었던 화초가 물을 먹 고 기운을 차린 것처럼, 생기를 띠고 있었다. 억센 충동이 문득 내 몸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아득해졌던 정신 이 되돌아오면서, 나는 팔을 뻗어 손에 든 과일을 리에게 내미는 자 신을 발견했다. "이것 한 입... 밋이 참 도타." 틉틉한 무엇이 밴 듯,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그의 눈길이 내 마음을 찾아서 내 눈 속을 헤집고들어왔다. 이어 그의 두 손이 과일을 내민 내 손 을 조심스럽게 아래로부터 감쌌다. 내 손 위에 수그린 그의 머리가 내 눈을 가득 채웠다. 그의 혀가 내 손에 닿으면서, 무슨 더우면서도 픗픗한 기운이 몸속 으로 저릿하게 퍼졌다.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자주빛 안개 가 눈앞을 가렸다. 벌어진 입으로 신음 비슷한 한숨이 새어 나왔 다. 그가 내 손에 흘로내린 흘러내린 토마토 즙을 천천히 핥았다. 내겐 그가 즙을 핥는다기보다 내 손가락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졌 다. 살에 닿는 그의 혀와 입술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혔던 기억들 을 불러내고 있었다. 몸 속으로 퍼졌던 더우면서도 풋풋한 기운이 살의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려 아랫배에 묵직하게 고였다. 아득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실린 갯내가 코에 닿으면서, 내 몸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닫 혔던 무슨 문이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른손은 리에게 맡기고 왼손으로 좀 거푸수수한 그의 머리를 빗질 하는 사이, 내 머리 뒷쪽으로 생각 한 줄기가 스쳤다, '내 몸은 발 쎄 알고 있었구나, 내 맘이 아직 깨닫지 못했던 걸...' 리가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물고서 물러섰다. 그의 눈길이 내 눈을 찾았다. 내 눈에서 야단치려는 뜻이 없음을 확인한 듯, 그의 굳었 던 얼굴이 풀렸다. <<제 1장 6편>> 나무 젓가락으로 호박 나물을 뒤적이며 전기 화덕의 온도를 낮추 고 나서, 나는 천천히 토마토를 먹었다. 거센 무게가 실린 리의 눈 길이 뜨거운 손길 처럼 내 살을 어루만졌다. "잘 먹었음메. 리명구 동무 더분에." 가벼운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가슴이 울령거렸 고 얼굴에 올린 웃음도 자연스럽게 앉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나.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그때 문이 열리면서, 최옥순 소좌가 들어왔다. 분위기가 좀 이상 하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문간에서 한순간 주춤거렸다. 리가 그녀를 돌아다보고 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네까, 최동무." "안녕들하십네까?" 그녀는 역시 경험이 많은 간호장교다웠다. 리에게 고개를 갑신 숙여 보인 뒤,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리명순 동무, 내레 도울 만한 일이 없습네까?" 간호사로서의 일이 없을 때는, 최는 보조 요리사 노릇을 했다. 기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주임무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맡은 일 을 도왔다. 리명규는 공기 재처리를 맡았고 나는 최를 도와서 보조 간호사 노릇을 했다. 나는 최가 나타난 것에 아쉬움과 다행스러움을 함게 느꼈다. "어 서 오십세다. 뭐 특별히 하실 일이야..." 그녀가 도와줄 만한 일을 찾아서 나는 부엌 안을 둘러다보았다. "아, 뎌기 부루가 있는데, 리명규 동무레 가꾼 부룬데, 뎌걸 좀 씻 어 주시겠읍네까?" "네. 그리 하죠." 최가 부루가 든 합성수지 바구니 앞으로 다가갔 다. "부루레 정짜로 싱싱하구만. 리 동무 작물 재배 솜씨는 정짜로 훌륭합네다." 그녀가 리를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칭찬이 그리 반갑지 않은 듯, 리는 좀 어설픈 웃음을 그녀 에게 지어보였다. 이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문, 누님, 난 가보갔시요. 그런데..." 내 낯빛을 살피면 서, 그가 머뭇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가 가는 것이 꽤나 서운하게 느껴져서,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실은 오늘 저녁에 드래코 태번에 가기로 했읍네다. 조해명 동무랑" 내 낯빛을 살피면서, 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누님도 한번 가디 않갔시요?" <드래코 태번>은 우리 기지의 동쪽 스미드 바다의 북쪽 해안에 자 리잡은 술집이었다. 영어를 잘 하는 리의 얘기로는, <태번>은 영어 로 술집이란 뜻이었다. 달 나라에 있는 단 하나의 술집이어서, 우 리 요원들도 모두 틈만 나면 그리로 몰려갔다. 난 잠시 머뭇거렸다. 리는 이미 여러 번 드래코 태번에 함께 가 자고 내게 권했던 터였다. 그때마다 나는 한마디로 잘라서 거절했 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그의 제의를 이내 물리 치지 않자, 리는 좀 자신이 생기는 듯 했다. "누님, 한번 가보십세다. 재미있을 겝네다. 거기 주방장이레, 박 진동 씨레, 누님을 보고싶어 합네다. 뎌번에 얘기하디 않았습네까, 여기 월면 기지들의 료리사들은 모두 드래코 태번에 모여서 자신들 의 료리 비법들을 주고 받는다구. 내레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니끼 니, 뭐 별것들이 아닙데다. 누님처럼 료리 잘하는 분이 가시문" <<제 1장 7편>> 리의 얘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실은 그것 때문에 내가 드래 코 태번에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다. 사령관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이곳 달 나라 기지의 료리사란 자리를 차지했지만, 나는 시골에서 자라나서 집에서 살림하던 녀자였다. 효영이 아버지를 만나기 전엔 순안의 탁아소에서 일했었다. 료리 같은 것은 배워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리명구처럼 세상물계 모르는 사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 세 계 여러나라의 한다하는 료리사들이 모인 데 나가서 창피 당할 일을 사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아랫도리에 묵직하게 고인 더운 기운이 내 마음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듯했다. 내가 아는 것이 없노라고 솔 직히 얘기하고 도흔 료리 비법을 가르쳐달라면 될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아무래도 내가 좀...' "누님이 끓인 해장국 맛을 남반부 사람들한테 얘기 했더니만, 모 두 귀가 솔깃해서..." 달 나라의 기지에서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지구와 환경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 물론 가장 큰 문제였지만, 심심하고 외 롭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실은 그것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생 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였지만, 사실이었다. 기지를 건설하는 일로 모두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모두 심심하다도 야단이었다. 기지 가 비좁아서, 모두 자기 혼자 있을 곳을 찾았지만, 모두 외롭고 사 람이 그리운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 녀자 가릴 것 없이, 모두 술을 많이 마셨다. 드래코 태번이 장사가 잘 된다는 애기로 미루어보면, 우리 기지 사 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아침 식사 때 해장 국을 마련했다. 리가 키운 배추에 멸치만을 넣고서 끓이는 것이라, 료리라고 할 만 한 것도 못 되었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은 꽤나 좋아했다. 술은 즐 긴 효영이 아버지도 그 국을 좋아해서 으레 한 그릇 날래 비우고선 빈 그릇을 내밀곤 했었다. "그래도... 내레 바쁜 거 저그나도 알잖아? 한가롭게 나들이 할 짬이 어디 있어야디." 마음이 거의 기울어졌지만, 나는 짐짓 버텼다. 사실 빈말은 아니었다. 비록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주로 지구에 서 미리 포장해온 곽밥들을 데워내는 것이어서 따로 간새를 마련하 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스물이 넘는 요원들을 위해서 하루 세끼 식 사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을 끓이는 일은 시간이 걸렸고 아침과 저녁에 곁들이는 한두 가지 남새 료리는, 먹는 사람들이야 가볍게 여기겠지만, 품이 여간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최 소좌가 도와주긴 했지만, 그래도 일은 대 부분 내 손이 가야 했다. "누님도 좀 놀멘 일하시라요. 누님, 내레 누님 설거지 하는 것을 도와 드리겠습네다. 그리고 일찍 돌아오도록 합세다. 내레 철석같 이 약속합네다." 리가 웃으면서 농담하듯 말했다. "리 동무," 내가 무어라고 대꾸하기 전에 최가 말했다. "나도 가문 아니 됩네까? 태번에 가본 지도 발쎄 여러 날 되었구 만." 나는 나도 모르게 곱지 않은 눈길을 최에게 던젼다. 그녀가 <드레 코 태번>이라고 하는 대신 아주 익숙한 어조로 <태번>이라고 한 것 도 아니꼬왔지만, <태번>의 <번>을 서양사람들처럼 발음한 것도 적 잖이 아니꼬왔다. 영어 발음을 서양 사람처럼 정확하게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지, 모두 야단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기회가 있으면 내 앞에서 자신의 영어 실력을 뽐냈다. 김 박사나 량 박사 앞에선 그럴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에 내 앞에선 그러는 것이 내 속을 더 긁었다. <<제 1장 8편>> 리가 흘긋 그녀를 쳐다보았다. 리의 얼굴에 한순간 묘한 낯빛이 어른 거렸다. "아니 될 리야 없디요. 두 분께서 함께 가시문, 더욱 도티요." "그러문 리명순 동무," 그녀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우리 함께 갑세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최가 그렇게 끼어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나오던 핀잔을 되삼키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따지고보면, 그녀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남 의 일에 잘 간참하는 편이었지만... "리명규 동무레 뎌리 권하는데, 오늘 우리 함께 갑세다. 태번에 가 서 우리 한번..." 그녀가 자기 깐엔 은밀한 뜻을 담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은 리와 단둘이 있 고 싶었지만, 그녀를 떼어놓을 길은 없을 듯했다. "최 동무도 가신다문.. 대신 저그나레 설겆이를 도와 줘야 함메." 그녀보고 들으라고, 나는 <저그나>에다 힘을 주었다. "네, 설거지 적정일랑 마시요, 누님. 그러문 난 조 동무헌테 얘기 하갔시요." 내게 씨익 웃어보이고서, 리는 탄력있는 걸음으로 돌아나갔다. 여러 감정들이 어지럽게 얽힌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면서, 나 는 냄비를 열었다. 끓는 물에서 김이 거세게 올라왔다. 나는 냄비 안에 알루미늄 받침대를 넣고 그 위에 호박 닢들을 얹기 시작했다. "호박 닢사구를 삶습네까?" 정색하고 부루를 씻기 시작하면서, 최가 물었다. "네. 사령관님께서 호박 닢사구를 도하하십네다." 속으로 느끼는 자랑스러움을 감추고, 나는 가볍게 말했다. 모두 나를 배우지 못한 녀자라고 깔볼런지 몰랐지만, 사령관님과 그래도 가장 가깝고 사령관님의 신상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사령관님이 가장 믿는 사람도 나일 터였다. 한번 은 기지 보안책임자인 김상윤 소좌가 나와 사령관님 사이의 관계를 물었다. 사령관님께서 기지 요원으로 손수 뽑은 사람은 리명순 동 무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아, 그렇습네까?" 물을 아껴 조심스럽게 부루를 씻으면서, 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 호박 닢사구 쌈을 도하하신단 얘기에 평양에 있는 사령 관님 댁의 기억이 몰려왔다. 이어 그 기억은 효영이와 효영이 아버 지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 날벼락이 내린 날, 내 남편은 우리 아이 와 사령관님의 외손자를 데리고 놀이터로 나갔던 것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묻혔던 아픔이 문득 풀려나서 가슴의 살을 채웠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아픔이 살에서 다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번 풀려난 아픔은 좀처럼 다시 속으로 잦아들지 않았다. 최 소좌가 눈치챌까봐,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눈을 떴다. 진 땀이 밴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고서, 냄비 뚜껑을 덮었다. <<제 1장 9편>> "리명규 동무레 정짜로 멋진 사람입네다. 김안옥 박사레 그러는 데, 작물 재배 솜씨가 도타고 남반부 사람들까지 칭찬한답네다." 뒤 늦게 최의 얘기가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김안옥 박사는 생물학 자니 리명규가 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질 만했다. 어디에 고였다고 짚어내기 어려운 아픔을 참아내면서, 나는 동쪽 벽에 난 창을 돌아다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촉촉하면서도 밝게 느껴졌다. 긴 밤이 끝난 참이라, 햇살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 은 당연했다. 말이 그렇지, 보름 동안 전기불로 밝힌 속에서 지낸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보름동안 계속되는 낮을 보내기도 덜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인공적인 달 나라에서도 햇살만은 자연 그대로 의 햇살이구나' 곽밥이 든 냉장고로 가면서, 나는 탄식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정확한 얘기는 아니었다. 기지의 창 유리는 자외선과 적외 선을 대부분 막고 가시광선만을 제대로 들여보냈다. 달나라에선 햇 살도 자연 그대로 즐기기 어려웠다.. 대기가 없는 달나라에서 내리 지지는 햇살을 그냥 쐬는 것은 지구에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위험 하다고 훈련소의 교관은 거듭 강조했었다. 문득 뒤쪽에서 새 울음 소리가 났다. 좀 단조롭고, 어둡고 냄새나는 부엌에서 그 소리는 한줄기 시원한 솔바람처럼 다가왔다. 곽밥 하나를 손에 든채, 나는 소리 난 곳을 흘긋 돌아다보았다. 문 옆의 벽에 걸린 새장 속에서 분홍 카나리아는 보이지 않는 하 늘을 우러르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긴 밤이 끝난 뒤 찾아온 밝은 햇살이 녀석의 머리에서 무슨 기억을 일깨운 모양이었다. 우리 기지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 인사하러 온 남반부 사람들이 선물로 카나리아 한쌍을 가져왔다. 카나리아는 몸에 해로운 가스들 에 사람보다 민감하므로, 해로운 가스를 탐지하는 데 쓰인다고 했 다. 예전엔 광부들이 지하 갱도로 들어갈 때 카나리아가 든 새장을 들고 내려갔다고 했다. 뒤에 김상윤 소좌가 새장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 와서 내게 생색을 냈다. "봄이 되니, 새도..." 곽밥을 안고온 나를 흘긋 쳐다보면서, 최가 혼잣소리 비슷하게 말했 다. 나는 잠자코 곽밥들을 전자 화덕에 넣기 시작했다. 대꾸하기 가 좀 뭣했다. 이제 5월이니, 최의 얘기는 아귀가 맞지 않았다. 카나리아가 자시 맑은 목정으로 한 마디를 뽑앗다. 그 맑은 목청 은 쇳창살로 막힌 좁은 하늘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듯했다. 내 몸 속의 무엇이 그 목청을 따라 꿈틀거렸다. 짝을 부른 새의 노래와 리명규가 내게 보인 관심이 같이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과 그것들이 이 단조롭고 위험한 세상에서 뿌리 를 내리려는 삶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 뒤쪽에서 꼼지락거렸 다. "그런 모양입네다." 나는 뒤늦게 대꾸했다. 문득 가슴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 이 배어나왔다. 최가 흘긋 쳐다보았다. 내 웃음을 보더니, 그녀도 웃음으로 대꾸했 다. 뜻밖에도 맑은 웃음이었다. 나는 다시 한 마디를 뽑는 새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내 아랫배에 묵직하게 고였던 더운 기운이 만조의 바닷물처럼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더운 물살에 아직 살 속에 밀려 아직 살 속에 남아있 던 아픔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 제 2장 1편 >> 운전석에 앉은 조해명이 우주복의 해지를 열고 헬멧을 뒤로 젖혔 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면서, 우리보고도 헬멧을 벗으라고 손짓했 다. 뜨락또르를 탔을 때는, 언제나 우주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뜨 락또르는 무척 튼튼하다고 했다. 아주 가볍고 보기엔 좀 엉성했지 만. 내부는 밀폐되어 정상 기압을 유지했다. 그래도 움직이는 기 계라, 사고가 날 위험이 있었고, 공기가 없는 세상이라 조그만 사고 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우주복을 입었을 때 해치를 열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야 규정을 따질 필요도 없는 상식이었다. 조의 옆자리에 앉은 리명규가 따라서 해치를 열고 헬멧을 뒤로 젖 혔다. 내 왼쪽에 앉은 최옥순이 나를 흘긋 쳐다보더니 좀 굼뜬 손 길로 해지를 열기 시작했다. 나도 해지를 열고 헬멧을 뒤로 젖혔다. 규정을 어기는 것이 좀 찜찜했지만, 나 혼자 우주복 속에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앞가슴에 달린 통제반의 밀폐 상태 표시등이 성난 듯 빨간 외눈을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통제반의 투명한 뚜껑을 열고 전원 스위치를 내려 버렸다. "이젠 벗어도 됩네다." 내 낯빛을 살피면서, 조가 말했다. 내가 머뭇거린 것을 본 모양이 었다. "여기선 해치를 열었다고 뭐라 할 사람 없으니끼니..." "아, 살 것 같다. 이걸 쓰면, 답답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있 나. 머리가 가려워도, 긁을 수가 있나." 새끼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으면서, 최가 말했다. 속으로 최의 얘기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나도 슬쩍 목덜미를 긁었 다. 우주복을 입으면, 바로 곁에 있는 사람하고도 <콤링크>를 통해 서 얘기해야 했다. 무선으로 얘기하는 것은 성가시기도 했지만, 지 향성 공중선을 써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까지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훨씬 더 성가신 것은 가려운 데를 긁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처럼 가려운 데가 많은 사람에겐 그래서 우주복을 입는 것은 언제 나 고역이었다. 앞 자리에 앉은 두 사내가 웃음 띤 얼굴로 돌아다보면서 고개를 끄 덕였다. 모처럼 기지 밖으로 나온 참이라 리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날마다 밖으로 나오는 조도 아이처럼 흥겨워하는 낯빛이었다. 눈치 를 보니, 뜨락또르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 으레 이렇게 헬멧을 벗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규정이 엄하다해도, 한 시간이나 걸린다는 여행을 우주복을 입고서 마치긴 좀 뭣했다. 문득 가슴에 얹혔던 무엇이 사라진 느낌이 들면서, 두 사람의 흥 겨움이 더운 기운처럼 내게로 욺아오는 듯했다. 뜨락또르에 오를 때까지도, 나는 속으로 혀를 찼었다. '몸때에 밖으로 나가고, 내가 오늘은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구나' 이젠 나오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로선 여기 올라온 뒤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나들이다 운 나들이를 나선 셈이었다. 창 밖엔 풍경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머리를 매만지면 서, 나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제 2장 2편> 뜨락또르는 그 사이에 <장승바위>를 지나 <김장 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고속도로라고 불렀지만, 물론 지구의 고속도로처럼 생긴 길은 아니었다. 우리<김일성 혁명기지>에서 나온 길은, 기지의 울 타리 바로 밖에 선 장승바위를 지나면, 남반부의 <장영실 기지>를 향해 곧바로 뻗었다. 비교적 평탄한 곳을 따라 난 뜨락또르 자국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갈릴레오 월면 공항>으로 가는 길과 거의 겹쳐서, 이 길은 우리 기 지 사람들이 늘 다녔다. 그래서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이름이 거의 공식적으로 쓰였다.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드래코 태번은 김장 고속도로의 가운데 쯤 월 면 공항 가까이에 있었다. 뜨락또르는 먼지를 자욱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먼지는 이내 가라앉았다. 공기가 없는 곳이라, 먼지는 지구에서처럼 공중 에 떠있거나 퍼지지 않고 바로 땅에 떨어졌다. 가벼운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려 오금에 고였다. 먼지가 그 렇게 떨어지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 다. 뜨락또르 바깥엔 물도 공기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서, 달 나 라의 낯설고 비정한 풍경을 더욱 낯설고 비정하게 만들었다. "새 차라 그런 디, 진동이 작은데." 칭찬하는 뜻으로 혼자 고개 를 끄덕이면서, 리가 말했다. "새 차라 그렇기도 하지만, 이 월면차는 신형이라..." 대견스러운 눈길로 뜨락또르 안을 한바퀴 둘러다보더니, 조는 누 구에게랄 것없이 물었다, "도티요?" "네. 정짜로 도씁네다." 최가 냉큼 받았다. "구형보다 사뭇 낫습네다. 크기도 좀 크디요?" 조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네. 좀 큽네다. 중량은 한 백 킬로 정도 가벼운데도. 최신소재를 써서 중량을 줄였다고 합네다. 그래서 빨리 가구, 또 멀리 갈 수 있읍네다. 백 킬로꺼지 낼 수 있으니, 월면차로선 이만하면 뭐..." "백 킬로라. 대단허구먼."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 껀 팔십 킬로꺼지 놨디?" "응. 그리구 이 월면차는 저 혼자 <문새트>하고 교신해서 제 위치 를 알아냅네다." 조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십 분마다 한 번씩, 그러니끼니 운행 중에만 말입네다, 자동적으로 교신해서 위치를 확인합네다." 모두 뜨락또르라고 부르는 월면차를 조가 굳이 월면차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조 앞에선 뜨락또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도록 조 심하기로 했다. 하긴 전자뇌에 기억된 지형과 실제 지형을 대조해 가면서 갈 곳을 스스로 찾아가는 월면차를 뜨락또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모는 운전사에겐 좀 섭섭할 터였다. "아, 그렇습네까? 그러문, 조동무, 이 월면차를 타문, 길을 잃어 버릴 넘려는 없갔습네다." 나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러문요." 조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일부러 길을 잃고 싶어도, 잃디 못하디요. 지금 이 차는 머리속 으루 눈에 보이는 곳의 지도를 그리고 있읍네다. 멀지 않아 다른 정보를 입력시키디 않구 그저 목적지만 대면, 저 혼자서 찾아갈 겝네다." "이걸 몰고 나갔더라문, 김 소좌레 길을 잃디 않었겠구먼." 리가 받았다. <제 2장 3편> 리의 얘기에 웃음판이 되었다. 몇 주 전에 김상윤 소좌가 혼자 뜨락또르를 몰고 기지에서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은 사건은 아직도 기지에서 화제였다. 여기에서 길을 잃는 것은 지구에서 길을 잃는 것과는 크게 달랐 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무엇보다도, 우주복이나 뜨락또 르에 든 공기가 한정되었으므로, 밖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함께 웃다가, 나는 좀 머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여기 로 올라온 뒤로 소리내어 웃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은 달 나라에 온 뒤로가 아니라 그 날벼락이 내린 날 뒤로 처음이었다. 그 컴컴한 기억의 구덩이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마음을 급히 돌려세우면서, 나는 옆에 난 조그만 창으로 밖을 내다 보았다. '그 사람이 길을 잃을 만도 하디.' 달 나라의 풍경은 낯설고 분간하기 어려웠다. 보이는 것들이 모 두 낯설어서 비슷비슷했다. 무정하게 내리지지는 햇살 아래 어느 것이나 짙은 잿빛이었고, 어쩌다 나오는 누르스름한 빛깔을 빼면, 풍경에 빛깔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여기선 나침반 같은 것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자장이 너 무 약해서 나침반이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런저런 까닭들로 달 나라에선 지구에서보다 밖에 나다니는 일에 훨씬 큰 위험들이 따랐다. 훈련소의 교관은 달 나라에선 가벼운 산 책과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었다. "그것 참." 웃음이 그치자, 조가 좀 씁쓰레한 낯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덕분에 나만...." 김소좌가 길을 잃어버린 사고가 나자, 책임은 물론 뜨락또르를 몰고 관리하는 조에게 먼저 돌아갔다. 뒤에 김 소좌가 문새트를 통해 자 신의 위치를 알거나 기지에 연락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 나자, 조는 다시 꾸지람을 들었다. 조로서야 억을할 수밖에 없었 다. 말단 전사인 조의 처지에선 <정치보위부> 소속군관으로 기지의 보 안 책임자인 김 소좌가 하려는 일에 대해 캐물을 수도 없었을 터였 다. 나가겠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도대체 왜 거길 갔디?" 리가 꽤나 딱하다는 투로 물었다. "문새트허구 교신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응?" 월면 기지의 보안 책임자란 사람이 인공 위성을 통해 기지와 무선 교신하는 방법도 몰랐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사실이 었다. 김 소좌는 우리 요원들의 훈련이 거의 끝날 무렵에 뒤늦게 합류했고 자연히 훈련소에서 배웠어야 할 지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고가 나자, 사람들은 우리 기지를 관장하는 <월면 기지 사업단>에서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수근댔다. 김 소좌 일만이 아니라, 월면 기지 사업단이 하는 일들 가운데는 리치 에 맞지 않는 것들이 자주 눈에 뜨였다. "뉘레 알갔어? 그 사람 하는 일이 그러니끼니, 대놓구 물어볼 수 두 없구." 고개를 흔들던 조가 싱긋 웃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레 나갔다구 하문, 뉘레 꼬치꼬치 캐묻갔어?" "음. 듣고보니끼니, 그렇기도 하구먼." 리가 슬쩍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뜻을 담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좀 겸연쩍어졌다. 나도 모르는 새 내 눈길은 리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득 토마토 즙이 흘러내린 내 손가락을 핥던 그의 혀의 감촉이 오른손 끝에 되살아났다. 내 몸 속인지 마 음 속인지, 어쨌든 깊은 곳에서 무엇이 발그스레해지고 있었다. <제 2장 4편> "뭘 찾으로 갔단 얘기도 있습데다." 최가 끼어 들었다. 나도 그런 얘기를 얼핏 들었다. 이 곳에선 예전에 있었던 월면 탐 사 임무들에서 쓰인 물건들을 찾는 일이 류행했다. 그 것들이 이젠 골동품의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하긴 요즈음은 모두 골동품 수집 에 열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이 곳에서나 지구에서나. 며칠 전에 텔레비전을 보았더니, 지금 남반부에서 골동품으로 인 기가 높은 물건들 가운데는 주판과 계산자가 들었단 얘기가 나왔다. 상아로 만들어진 계산자는 최신형 손목 전산기보다 훨씬 값이 많이 나간다고 했다. 손목 전산기를 하나 사려면, 내 봉급을 여러 달 치 모아야 될 터였다.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사람들 마음이라는 게 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군인의 아내라 자주 옮겨 다녔으므로, 나는 짐이 될 만한 것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꺼렸 다. 그래서 그런지, 쓸모가 없어진 뒤에 오히려 물건 값이 오르는 것은 나로선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물을 찾으로 나갔단 얘기를 허는 모양입네다만, 글쎄..." 조가 고개를 갸웃했다. "김 소좌가 갔던 데가 루나 탐사선이 내렸 던 곳에 가까워서, 그런 얘기가 나온 모양인데..." "루나 탐사선이란 게 무엇입네까?" 난 처음 듣는 얘긴데." 최가 물었다. 조가 흘긋 리를 쳐다 보았다. "루나 탐사선은," 조 대신 리가 대꾸했다. "예전에 소련에서 보 낸 겁네다. 그전 로씨야 말입네다. 김소좌가 있던 데서 가장 가까 운 곳은 루나 십륙호가 내린 덴데. 루나 십륙호는 일천구백칠십년 도에 여기 왔었습네다. 월면 토양 표본을 가지고 이내 돌아가서, 무엇이 남아있을 것 같디는 않고... 사람이 왔었으문, 깃발이라도 남디만..." 그는 수염이 거무스름하게 돋은 턱을 문질렀다. "실은 지금은 탐 사선이 내렸던 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겝네다." '일천구백칠십년도라... 거의 칠십 년이나 되는데...' 나는 감탄 하는 마음으로 리의 옆 얼굴을 뜯어 보았다. 리가 우주 탐사에 대해서 열정적이고 많이 안다는 것은 이미 잘 아는 터였다. 우주 탐사에 대해선 모두 열성적일 수 밖에 없는 이 곳에서도 그는 눈에 돋보일 마큼 열성적이었다. 실은 내가 우주 탐 사와 같은 일에 대해서 아는 것들은 대부분 그로부터 들은 것이었 다. 그래도 나는 그가 거의 칠십 년 전에 이 곳에 왔었던 탐사선에 대 해서 까지 알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잘 아십네다, 리 동무." 내가 리에게 뭐라고 칭찬하는 말을 한마 디 하려는데, 최가 먼저 말했다. "그런 것꺼지 아시고, 정짜로 대 단하십네다." 좀 겸연쩍은 웃을을 얼굴에 띠면서, 리가 여전히 거푸수수한 머리 를 극적거렸다. "실은 우리도 보물을 좀 찾을까 해서... 메칠 전 에 조 동무랑 자료를 좀 찾아보았드랬습네다." "어쨌든, 김 소좌레 늦디 않게 구출되어서, 다행이디. 만일 늦었더 라문, 난..." 조가 손으로 자기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다시 웃음판이 되었다. 조의 진담 섞인 농담도 재미있게 느껴졌 지만, 우주복을 입은 채 하는 손짓이 굼떠서 꽤나 우수꽝스러웠다. 하긴 우리 모두가 우스꽝스러웠다, 해치를 열고 목만 밖으로 내놓고 앉은 것이. <제 2장 5편> 김 소좌가 혼자 뜨락또르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사령관님 께 보고된 것은 김 소좌가 나간 지 거의 네 시간이 되어서였다. 그 런 일을 챙기는 사람은 기지의 보안을 맡은 김 소좌였다. 사령관님 께 보고할 사람이 사고를 낸 당사자였으므로, 보고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의 직속 상관인 행정부장까지 월면 기지 행정 책 임자들 회의에 참석해서 기지에 없었다. 그 동안에 조는 통신 담당 요원인 한 정필를 통해 김 소좌와 무선 연락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김 소좌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사령관님께서 사정을 아시게 되자, 부랴부랴 문새 트를 통해서 김 소좌가 탄 뜨락또르를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언뜻 보기엔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김 소좌에 대 해서 그리 좋은 감정을 가졌던 것도 아니어서, 나는 처음엔 수색 작 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리명규의 설명을 듣고보니, 일이 간단치가 않다는 것이 드 러났다. 달 위에 높이 뜬 문새트는 넓은 지역을 한눈에 살필 수 있 었다. 그러나 살펴야 할 지역도 무척 넓었다. 뜨락또르의 최대 속도가 80 킬로미터나 되었으므로, 김 소좌가 있 을 수 있는 곳은 기지 둘레 반지름 300 킬로미터의 지역이었다. 그 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살펴야 할 지역은 점점 늘어났다. 물론 그 지역을 다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 소좌가 서쪽 으로 간 것을 알았으므로, 살필 지역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무척 넓었다. 마침 해가 높이 솟은 때여서, 그림자도 거의 없었으 므로, 위성이 보낸 사진을 판독하는 일도 녀느 때보다 훨씬 어렵다 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인공 위성을 통해 무엇을 찾을 때는 전산기가 물 체를 식별하는 일을 혼자서 자동적으로 하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리의 애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물체의 식별과 같은 일에선 사람이 전산기보다 훨씬 나았다. 아무리 크고 성능이 좋은 전산기도 물체를 식별하는 일에선 어린 애들보다 훨씬 못하단 얘기였다. 전산기와 같은 복잡한 기계 얘기 만 나오면, 고개가 저절로 옴츠러드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것은 은 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얘기였다. 리의 설명을 듣다가, 나는 문득 김 소좌가 탄 뜨락또르의 자국을 찾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볼수록 그럴 듯했 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입밖에 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생각을 꺼냈다. 모두 하던 일들을 놓고 상황실에 모여서 걱정스럽게 상황 판을 살필 때였다. 용접 기술자인 최봉섭이 느닷없이 손뼉을 치면서 <도흔 수가 있다. 뜨락또르 자국을 찾으면 된다> 고 외쳤다. 상황 판을 살피던 사람들이 그를 돌아다보고 한심하단 눈길을 던졌다. <아직도 달 나라에 뜨락또르 자국이 없는 곳이 남아있었나?> 하고 누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비도 바람도 없는 세상이라, 여기선 한번 난 바퀴 자국은 아주 오랫동안 그대로 남았다. 비록 뜨락또르의 통신 장치를 제대로 쓸 줄은 몰랐지만, 김 소좌는 그래도 전방위 구난 신호를 보낼 생각은 했다. 뜨락또르 운전석 바 로 위 천장에 붙은 노란 상자를 열고 빨간 단추를 누르면 되었으므 로, 구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인공 위성을 통해 무선 교신을 하는 것보단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뜨락또르가 기지를 나선 지 여섯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것도 기지에서 300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그는 그때까진 혼자서 길을 찾으려고 애썼던 모양이었다. 원래 그가 타고 나간 뜨락또르엔 한 사람이 24 시간 슘 쉴 수 있 는 공기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 해명이 늘 공기를 가득 채워놓을 리야 없었다. 그의 구난 신호가 인공위성에 잡혔을 때는, 뜨락또르엔 겨우 3시간 숨쉴 공기 밖에 없었다. 설령 그가 길을 찾 는다 해도, 이미 혼자서 기지로 돌아오기엔 늦었던 것이었다. <제 2장 6편> 그런 사정이 알려지자, 모든 기지들을 통한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 다. 공기가 없는 곳이라, 달 나라엔 물론 비행기가 없었다. 내연 기관을 쓸 수 없었으므로, 비행차도 없었다. 그래서 유일한 교통 수단은 축전지를 써서 움직이는 뜨락또르였다. 물론 <갈릴레오 월면 공항>에 월면 로켓들이 있었으므로, 정 위급 하면, 그것을 이용하면 되었다. 다행이 그때 남반부 요원들이 가까 운 곳에서 지질 탐사를 하고 있어서, 월면 로켓까지 동원되는 소동 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왜 나갔는디 일언반구 얘기가 없으니, 참." 리가 어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 같으문 미안해서라도..." "내레 얘기했잖아, 비밀 임무를 수행하레 나갔다구." 조가 웃으 면서 받았다. 이어 정색하고 덧붙였다, "남반부 사람들이 그러는 데, 아무래도 캐빈 피버 같다고 하던데." "캐빈 피버?" "응. 캐빈 피버." "듣고 보니끼니, 그럴 듯한 얘깁네다." 최가 끼어들었다. "좁은 기지 안에서 허구헌 날 똑같은 사람들허구 얼굴을 맞대다보문, 아닌 게 아니라, 캐빈 피버에 걸릴 만도 합네다." 간호장교의 권위가 실 린 얘기였다. '아,'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캐빈 피버란 게 오두막 증세를 말하는 모양이구나.' 훈련소에선 <오두막 증세>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다. 월면 기지 처럼 좁은 곳에서 오랫동안 같은 사람들하고 지내게 되면, 그 사람 들에게 짜증을 내고 미워하게 된다고 했다. 심하면, 사소한 일을 갖고서 크게 다투게 된다는 얘기였다. 하긴 나도 요즈음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잘 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리 심리 검사를 해서, 서로 사이 도케 지낼 사람들로 일 행을 만들었지만. "그래서 뜨락또르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가, 갑자기 막막한 하늘을 보자, 심리적 충격을 받았으리란 얘깁네다. <장영실> 정신과 의사 가 그런 진단을 내렸다고 그럽네다." 잠시 뜸을 드린 다음, 조는 최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량 박사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구 합데다." "아, 그렇습네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긴 목소 리로 최가 대꾸했다. 그럴 듯하게 들리는 얘기였다. 기지 안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 지면, 나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 때마다 막막한 하늘과 황량하 게 펼쳐진 달 나라 풍경이 마음을 어찔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러문 우리만 모르고 있었단 얘기네." 리가 좀 볼멘 소 리를 냈다. "당장 그렇잖아? 우리 기지에서 일어난 일을 <장영실> 사람들이 먼저 알구. 우린 거꾸루 그 사람들헌테서 얘길 듣구." 조가 심상 하게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기지의 일들을 장영실 기지 사람들 이 우리보다 먼저 그러고 훨씬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중요한 일일수록 그 쪽에서 먼저 아는 경우가 많 았다. "우리 잘못이디 뭐.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랫 것들은 그저 모르 는게 도타고 생각허니.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꺼지 무슨 큰 비 밀인 것 처럼 너겨서 감추기만 하니." 리가 거세게 내뱉았다. "맞슴메. 리 동무 얘기가 맞슴메." 조가 말을 받자, 회도 고개 를 끄덕였다. <제 2장 7편> 좀 난처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자칫하면, 사령관님께서 잘못 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얘기였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나로선 사령관님께서 잘못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젠 우리도 분위기를 좀 바꿔야 합네다. 월면 기지문 월면 기 지답게." 리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기지에선 아무도 자기가 아는 거나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들헌테 얘기하질 않습네다. <침묵이 상책이니끼니, 내레 말 않 겠수다>는 식입네다. 그저 동향 보고나 인사 고과에 나쁜 얘기가 올라갈까봐 흘끔흘끔 눈치보고 몸사리고.. 그러니 기지안에서 얘기 할 사람이 있어야디. 가만히 보문, 우리 요원들은 우리 기지 안에 서 할 얘기를 자기가 아는 <장영실> 사람들헌테 하고 있읍네다." 리는 잠시 멈췄다가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만하더라 도, 우리 기지 사람들보담 <장영실> 하수 처리 요원이나 수경 재배 요원하고 더 많이 얘기합네다. 나부텀 고텨야 하는데, 그게..." 적잖이 걱정이 되어서, 나는 다른 두 사람의 낯빛을 슬쩍 살폈다. 리는 민간인이었으므로, 녀느 때도 군인 신분인 요원들보단 월씬 대 담하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곤 했다. 사람들도 그 점은 너그럽게 보 아주는 셈이었다. 그러나 방금 한 것과 같은 얘기는, 특히 자신이 장영실 기지의 요 원들과 많이 얘기한단 얘기는, 나중에 탈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한 얘기가 보안 책임자나 정리 군관에게 보고되지 않으리라고 장담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다른 두 사람도 리와 뜻이 같았다. 최는 그저 고개만 끄 덕였지만, 조는 흔쾌히 동의했다, "말 한번 잘 했슴네. 그래서 그 런디, 나도 우리 기지 사람들보담 <장영실> 사람들한테 더 솔직하게 얘기하게 되더구먼, 우리 기지 사람들헌텐 도저히 털어놓디 못할 속 내까지도 털어놓게 되던데." 나는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여기서 한 얘기 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야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좀 놓였다. "누님, 누님 생각은 어떻습네까?" 내가 잠자코 있자, 리가 물었 다. "내레 뭘 알아야디. 내레 장영실 기지에 아는 사람두 없구." 그렇게 끝내려니, 내 대꾸가 좀 퉁명스럽게 들릴 듯했다. 나는 생 각을 가다듬었다. "그래두 저그나가 시방 한 얘기가 옳은 것 같구 먼. 우리 기지의 분위기를 좀 바꾸는 게 도캉디. 그래두 우리가 처음 여기로 올라왔을 때 보담은 많이 나아딘 것 아닌가?" 나는 동의를 구하는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다 보았다. "딴 건 그 만두고라도, 정치 학습이 없어딘 건만 해두 어뎁니까?" 우리가 처음 여기로 올라왔을 때, 정치 군관이자 부사령관이 최철 웅 대좌는 모든 요원들에 대해 일주일에 세번씩 정치 학습을 실시한 다고 공표했다. 우리 요원들은 물론 그런 결정을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영실 기지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로 삼았다. 이미 북조선과 남조선이 연방국으로 통일된 지금, 정치학습은 새대 착오적인 일이며 특히 월면 기지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정치 학습을 그만두기를 바라며, 정치 학습이 니어질 경우, 두 기지 사이의 우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 기지가 모든 일에서 장영실 기지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들 의 얘기엔 무게가 실렸다. 그래도 최 대좌는 정치 학습을 계속하여 고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을 한 번으로 줄여서, 남반부 사람들도 그 런 선에서 양해할 듯 했다. <제 2장 8편> 정치 학습의 명줄을 끊은 것은 다른 기지 사람들이 퍼부은 비난과 비웃음이었다. 달 나라의 전자 신문인 <셀레나잇 타이드>가 우리 기지에서 정치 학습을 한다는 소식을 알리고 이어 정치 학습에서 쓰 인 교재의 일부를 뽑아서 싣자, 그 신문의 독자란은 갖가지 비난, 걱정, 탄식, 그리고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다른 얘기들은 그런 항의 속에 묻혀 버렸다. 그렇잖아도 하는 짓 이 조금만 서툴거나 달라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사회>에서 온 사람들이란 얘기를 듣던 터라, 우리는 그런 반응이 무척 아팠다. 드래코 태번에 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요원들이 늘어났 다. 마침내 류상현 행정 부장이 사령관님께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고 정치 학습을 당분간 중단하자고 건의했다. 류 부장은 국제법을 전 공한 변호사여서 우리 기지의 공식적 대변인 노릇을 했고 다른 기지 의 사람들과 자주 접촉했다. 사령관님께서는 류 부장의 건의를 받아 들이고 그 때까지도 고집 을 부리던 최 대좌를 설득했다. 마침내 정치 학습은 시작된 지 세 주일만에 <월면 기지의 목적과 현실에 좀 더 잘 맞는 교재가 준비될 때 까지 일시 중단>되었다. 내 얘기에 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우리 둘레에 침 묵이 내렸다. 또락뜨르가 내는 소리들이 문득 크게 들려왔다. 무 슨 연설처럼 길게 얘기한 것이 좀 겸연쩍어져서, 나는 이마를 창에 대고 밖을 내다 보았다. 지붕 위에 펼쳐진 집광판이 짙은 그림자를 땅 위에 드리웠다. 사 람이 보살피지 않아도, 저 혼자 충전해 가면서 갈 곳을 찾아가는 기 계가 새삼 대견스러웠다. "어쨌든, 이번 일로 손해본 건 이 조해명이구. 재미본 건 김상윤 소좌구. 어저께두 만난 모양이더구먼, <장영실> 녀자허구." 좀 어 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침묵을 깨려는 듯, 조가 새로운 화제를 꺼 냈다. "그 지질학자란 녀자?" 리가 물었다. "응." "그래, 두 사람 사이가 잘 되어간다고 합데까?" 흥미를 느꼈는 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서 최가 물었다. 나로선 처음 듣는 얘기였다. '흠. 눈칠 보니, 나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나는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료리사의 처지에서 부엌 밖에 서 일어나는 그런 일에까지 신경 쓸 까닭도 없었다. 그리고 남성 요원들이 최의 행실에 대해 수근거리는 것을 들은 터라,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그녀를 좀 낮추보는 참이기도 했다. "그런 모양입데다." 좀 씁쓰레한 웃음을 띠면서, 조가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끼리끼리 만났단 얘기도 있구." 아무래도 조는 좀 억울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 일로 조는 행정 부장으로 부터 꾸지람을 단단히 들었다. 반면에 남 반부 요원들에게 구출된 뒤, 김 소좌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거의 영웅이 되다시피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 하는 뜨락또르를 타고 혼자 밖으로 나간 것하며 나가선 기어이 길을 잃어 소동을 일으킨 것하며, 김 소좌의 됨됨이는 이번 일로 잘 드러 났다. 그래서 그를 경멸하거나 동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영웅을 만들다니.. <제 2장 9편> "그 녀자도 결혼했단 얘기가 있던데. 조 동무," 최가 여전히 창 밖을 내다보는 조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네까?" "녜. 사실인 모양입네다." 조가 고개를 돌렸다. "맏아들이 대 학에 다닌다죠 아마. 어쨌든 여기서 그런 게 문제가 됩네까? 서로 돠으면,되는 거디." 조가 한 말은 요즈음 세상에선 누구나 하는 그저 그런 얘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새롭게 들렸다. 한번 여기 올라오니, 지구에서 알았 던 이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처럼 생각되었고 그들과의 관계 들은 갑자기 빛이 바랜 옛날의 인연들처럼 느껴졌다. 이제 생생한 뜻을 지닌 것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새로이 이루 는 관계들이었다. 여기서 지구는 너무 멀었다. 숫자로 얘기하진 못하지만, 이곳에서 지구는 분명히 너무 멀었다. 그리고 다시 지구 로 내려갈 때까지 우리가 여기서 보낼 두 해는 어느 모로 보아도 짧 지 않았다. 앞쪽에서 부드러운 경고음이 났다. 조가 몸을 바로하더니 운전석 앞쪽의 통제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보시라요. 아까 내레 얘기했 디요, 저 혼자 십 분마다 문새트와 교신해서 위치를 알아낸다고? 여기 숫자가 화면에 나왔잖습네까? 지금 우리 위칩네다." 조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정짜로 대단한데. 이 뜨락또른 어데서 만든 겁네까?" 최가 물 었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을 느꼈다. 최는 리보단 조에게 마음을 더 쏟고 있었다. 행실이 좀 뭣하다는 평을 받는 그녀가 리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나로선 마 음이 적잖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현대 차량>에서 만든 겁네다. 공장이 김책시에 있습네다." 조가 무슨 마크를 가리켰다. 최가 고개를 내밀고 조가 가리킨 곳을 살폈다. 나도 슬쩍 살펴보았으나, 영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얘기인지 알 기 어려웠다. 요즈음 남반부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북반부에서 나오는 것들도 글자들을 흔히 영어로 써놓았다. 조선어 는 한귀퉁이에 조그맣게 나오는 것이 어느 사이엔가 상례가 되어가 고 있었다. 하긴 남반부에선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친다는 얘 기도 들렸다. 어떤 집에선 아예 갓난애 때부터 영어를 가르친다는 얘기도 들렸다. '국제어네 뭐네 하면서... 그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인디 뭔디 내레 모르갔디만, 그래도 제 나라 말을 제대로 배워서 써야디...' "<현대 모토 아엔씨>라. 하, 우리가 이젠 이런 차를 다 만들고." 최가 좀 호들갑스럽게 탄성을 냈다. "우리도 이젠 상당하디요?"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조 동무, 이 월면차 정짜로 우리 혼자 힘으로 만든 겁네까? 아니문..." "아닐 곕네다. <현대차량>은 아마 남반부 회사와 합영한 회살 겝네다. 이런 월면차는 아직꺼진 우리 혼자 힘으로 만들디 못합네 다." 조는 고개를 젓더니, 자신이 무슨 책임이 있는 것처럼 나와 최에게 번갈아 좀 어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면 그렇디. 어쩐디...' 나는 씁쓸한 득의로 고개를 끄덕였 다. <제 2장 10편> 언제부터인가 좀 반반하다 싶은 물건이 있어서 집어보면, 큰 것이 든 작은 것이든, 으레 남반부에서 만든 것이거나 남반부 회사와 합 영한 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런 합영 회사의 이익은 대부 분 남반부 사람들 차지일 터였다. 돈을 모으는 데는 북반부 사람들이 남반부 사람들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번번이 재주는 북반부 사람들이 부리고 재미는 남반부 사람들이 보았다. 유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경제적 식민지> 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문 그전 뜨락또른 뉘레 몹네까?" 최가 물었다. "세워둘 수는 없을 텐데." "물론 세워둘 수야 없디요. 물동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판이 니. 그 차를 몰 사람이 곧 올라올 겝네다. 지금 바이코누르에서 선편을 지다린다구 하니끼니..." 조의 얼굴에 남았던 웃음이 밝아졌다. "실은 녀성 동무란 얘기가 있는데..." "그건 또 어드케 알았나?" 리가 물었다. "어저께 김정출이한테 듣었디. 이번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모두 여 슷이라던데. 무슨 일이 있어서, 늦어졌다구 하더구먼. 원래 이차 가 도착하기 전에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가 올라온지 석 달이 넘었으니, 다음 사람들이 올라올 때가 되었다. 사람들 얘기론 화학자와 폭발 전문가가 당장 필요했다. 공기 재순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데, 림치홍의 기술만으 로는 고치는데 한계가 있어서 화학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령관님께서 김안옥 박사하고 림치홍하고 말씀하실 때 차를 내갔 더니, <트레이스 엘리멘트>란 말이 여러 번 나왔다. 날마다 전기 화덕에다 음식을 지지고 볶는 나로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폭발 전문가는 기지를 지하로 넓히는 데 필요했다. "그 녀성 동무는 어드런 사람이라 합데까?" 최가 물었다. "민간인이라 합네다." "민간인 ?" "네." "나인 몇이라 합데까?" "십삼년 생이라 하니끼니," 느릿하게 대꾸하는 조의 웃음이 깊어졌다. "이제 스물 여슷이디요." "스물 여슷이라. 하, 도흘 때다. 난 이제..." 최가 탄식조로 얘 기하는 바람에 다시 웃음판이 되었다. 그녀가 내게 무슨 뜻을 담은 눈길을 주었다. "이제 리명순 동무 가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의 최년소 녀성 동무 자리를 내놓아야 될 모양입네다, 쯧쯧." 나는 당황스러워서 한순간 대꾸하지 못했다. 리명규가 움찔하는 것이 견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 다. 최의 낯빛과 말씨에선 별다른 악의가 풍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우리 기지의 세 녀성 요원들 가운데 나이가 제일 적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 있어서, 그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온 듯했다. "스물 여슷이면, 참 도흔 때디요. 나도 그 나이 땐 곱단 소리를 들 었는데."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게 태연한 낯빛으로 차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마음이 정말로 평온했다. 물론 스물 여섯살 된 녀성 요원이 올라오면, 남성 요원들의 눈길은 그녀에게로 쏠릴 터였다. 솔직히 얘기하면, 좀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뭐 크게 섭섭할 일은 아 니었다. `한 사람의 마음만 그대로...' 속으로 덧붙이고서, 나는 흘긋 리의 낯빛을 살폈다. 아침에 리가 나보고 센네 같이 곱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스물 여슷난 젊은 녀자가 올라와도, 날보고 센네 같다고 할까? <제 2장 11편> 리와 눈길이 마주쳤다. 내 낯빛을 보더니, 그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떠올랐다. "누님, 힘을 내시라요. 아무리 젊은 녀성이 올라오드라도, 누님만 큼 곱디는 못할 기라요." 리의 반응이 뜻밖이었던 지, 최가 좀 놀란 낯빛으로 리를 쳐다보 았다. 이어 내 얼굴을 살폈다. 리의 말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마음의 휘장을 벌리고 들어왔다. 그 의 말에선 포근한 봄날 보리밭 위로 부는 바람의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방금 보인 여유는 내가 건강을 완 전히 되찾았다는 사실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제 나는 갑자기 크게 바뀐 환경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한 것이었다. 어저께 다시 시작 한 월경이 물론 가장 뚜렷한 징후였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르는 일이 줄어들었고 잘 때 코가 막혀 입으로 숨쉬는 일도 없어졌다. 처음 여기로 올라왔을 때, 나는 무척 고생했다. 피가 머리로 몰 려들었고 얼굴이 부어올랐다. 호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코는 늘 막 혔고 머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욱신거렸다. 앉았다 일어서면, 현기 증이 나고, 속으로 무엇이 들어가면, 금세 넘어올 것처럼 느글거렸 다. 그런 증상은 우리가 타고온 우주선이 지구와 달 사이에서 무중력 상태가 되었을 때 가장 심했었지만, 여기 달 나라에 닿은 뒤에도,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물론 모두 그런 증세를 보였다. 그래도 나는 특히 심한 축에 속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고나면 으레 얼굴이 붓고 걸핏하면 달아올랐다. 머리 앞쪽엔 묵지근한 아픔이 늘 고여 있었고, 자리에 누우면, 귀에서 울리는 소리가 났다. 특히 괴로웠던 것은 잘 때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입으로 숨쉰 까닭에, 자고나면, 입안과 혀 가 마른 종이로 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마음이 달뜨면서, 행복감과 자신감이 살을 가둑 채웠다. `내가 드디어...' 나는 리에게 한껏 밝은 웃음을 지어 대꾸했다. 그리고는 좀 겸연 쩍어져서, 흘긋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 창문으로 달이 보였다. 지 평 바로 위에 걸린 파란 달이 하도 아름다워서, 가슴 속 어디가 막 히는 듯했다. 여기서 바라보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지구에서 본 달의 거의 네 곱절이나 되는 커다란 달이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파란 빛 으로 메마르고 날카로운 지평 위에 걸린 모습은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리명규가 언젠가 얘 기한 것처럼, 그런 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된 훈련을 받고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엔 차분한 무엇이 어렸다. 해나 별들은 동쪽 에서 서쪽으로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지만, 지구는 하늘 한 모서리에 달로 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자양을 받고 자라나 마침내 품을 떠나서 낯선 땅을 찾아 간 사람들을 위험과 외로움으로부터 지켜주려는 것처럼... 지구는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고 다시 이울지만, 그믐이 되어도, 자취를 아주 감추진 않았다. 극광의 희미한 빛이 양쪽에 남고 대륙 들 위에 흩어진 대도시들의 불빛이 구름장들 사이로 빛나곤 했다. 그 파란 달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속에 단단한 아픔이, 씨처 럼든 향수의 과육을 씹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달에서 그저 밝고 포근한 느낌만 받았다. 이 낯설고, 거칠고, 메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들을 촉촉 한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는 달 위에 어릴 때 놀이터 한구석에서 내 가 노는 것을 지켜보시던 증조 클마니의 얼굴이 겹쳤다. <제 3장 1편> "우주복을 한번 더 점검해 보십세다." 콤링크를 통해서 들리는 조해명의 목소리엔 콧소리가 섞였다. 해치의 연결 부분을 손으로 만져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우주복의 통제반을 내려다보았다. 풀빛 불이 차분하게 우주복이 밀폐되었음 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조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주복 이상 없음." 최옥순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군대식으로 보고하자, 두 사내들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문 공기를 회수하갔습네다." 조는 몸을 바로하고 통제반의 단추 셋을 차례로 눌렀다. 공기 흡입장치가 움직이자, 낮은 진동이 자리를 통해 느껴졌다. 모르는 새 긴장으로 몸이 굳었음을 깨닫고, 나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몸을 풀었다. 긴장할 까닭은 전혀 없는데도, 내 몸은 자신을 둘러싸기 시작한 진공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듯했다. "됐습네다. 자아, 나갑세다." 조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고 돌아 다 보았다. 우주복의 두꺼운 면판으로 보이는 조의 얼굴이 조금 전 까지도 없었던 무슨 조급한 기대로 번질거리는듯 했다. "생큐 포 더 라이드, 캡틴." 리명규가 영어로 말했다.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헬멧 속에 들 었어도, 그의 길쑴한 얼굴은 선이 또렷하면서도 착한 마음씨가 배어 나온 듯 부드러웠다.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나로선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무슨 고맙단 얘기인 것은 분명했고 그런 치하를 영어 로 한 것이 자리에 딱 어울렸다. 우주복의 해지를 열어놓고서 함께 웃고 떠들며 뜨락또르를 타고온 참이라, 새삼스럽게 고맙다거나 수고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좀 쑥스 러운 터였는데, 영어로 하니, 그런 얘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내가 서양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말끝마다 <생 큐>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서양 사람들 처럼 내 허리를 안 는다거나 할 때도 그는 자연스러웠지만. 조를 <캡틴>이라고 부른 것은 특히 그럴 듯했다. 뜨락또르를 모는 사람에게 캡틴이라니! 서양 영화들을 본 덕분에 나도 캡틴이 비행기나 배나 우주선의 선장을 말한다는 것은 알고 있 었다. "유아 얼워즈 웰컴, 캄리드 리." 조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꾸하 고 운전석 왼쪽에 난 문을 열었다. `이 사람들 봐라.' 조까지 영어를 쓴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제대로 알고 하는 영어인 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 귀엔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가슴속에 서 부러움이 꼼틀거렸다. 내가 워 영어를 술술 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처럼 필요할 때 몇 마디를 할 수 있으면, 그것 으로 족할 터였다. `그럼 나만...' 부러움을 밀치고 걱정이 들어섰다. 최는 물론 영어를 잘 할 터이니, 넷 가운데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란 얘 기였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물론 영어를 잘 할 테고. 모두 영어를 쓸 텐 데. 누가 말이라도 걸어오문, 난...' 조를 따라 밖으로 나간 리가 운전석을 앞으로 젖혔다. "생큐." 우주복을 입어서 굼뜬 몸짓에 비기면, 최의 인사는 빨랐 다. 그리고 산뜻했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머리 속 어지러운 생각들을 몰아냈다. `오늘은 내레 아무래두 좀 주책이 없나보다. 원제부텀 내레 영어 잘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구...' <제 3장 2편> 은근히 불안해 지는 마음을 달래면서, 나는 뜨락또르에서 내렸다. 다리가 좀 뻣뻣한 듯해서, 나는 앞쪽으로 몇 걸음 걸어나갔다. 움직 이기가 쉽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우주복 속에 갇혀 지낸 터라, 몸이 굳은 탓도 있었 지만, 우주복이 원래 진공 상태에선 입고서 활동하기 어려운 장비였 다. 힘든 일을 할 때는, 그래서 우주복 안의 기압을 정상 기압보다 훨씬 낮추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우주복을 조작하는 일은 가볍게 할 수 없었다. 자칫 하면 감압병이란 것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로웠다. 깊은 물 속에 들 어갔던 사람이 아주 천천히 올라와야 하는 것과 같은 리치였다. 뜨락또르의 문을 닫은 리가 내 곁에 와 섰다. 우리는 잠시 말없 이 앞에 선 드래코 태번을 바라보았다. 내 눈길을 먼저 끈 것은 그 술집의 현관 위에 걸린 큰 간판이었 다. 옅은 연두빛 바탕 위에 짙은 풀빛으로 씌여진 글자들이 우중충 한 달나라 풍경 속에서 산뜻하게 다가왔다 : . 그 아래에 씌어진 글자들은 좀 작았다 : . 드래코 태번. 내가 드디어 여길 왔구나. '가슴 속을 채운 불안 의 잿빛 안개를 기대에 가까운 감정이 보얀 안개로 덮었다. 드래코 태번은 우리 기지처럼 미리 만들어진 모듈들을 조립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역시 우리 기지처럼 지하로 건물을 넓히는 일이 진행되는 듯했다. 술집 앞마당이 막 파낸 잔 자갈과 모래로 덮여 있었다. 그러고보 니 마당과 우리가 선 곳만이 아니라 건물 둘레 몇백미터는 모두 자 갈과 모래로 덮여 있었다. 파낸 흙의 양으로 보아, 우리 기지보단 훨씬 많이 파들어간 듯했다. 둔중한 울림이 땅으로 부터 전해왔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땅을 내려다 보는데 리가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돌아다보니, 리는 뒷 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갈릴레오 월면 공항 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개를 접은 새처럼 늘씬하개 생긴 은빛 물체가 불길을 뿜으면서 하늘로 솟고 있었다. 중력의 끈질긴 손길을 물리치고 소리없이 솟 구치는 셔틀의 모습엔 단단한 아름다움이 어렸다. 무엇에게로 향한 것인지 모를 그리움이 가슴 속에서 차올라 목이 뻣뻣했다. 점점 작아진 셔틀은 천천히 동쪽 지평으로 몸을 눕혔다. "아름답 디요, 누님?" 짙은 감정이 배어서 낮고 틉틉해진 리의 목소리가 콤 링크에서 나왔다. "응 아름답구말구."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셔틀이 아주 작아졌다. 나는 고개를 바로하고 공항 쪽을 바라보 았다. 큰일을 치른 사람들의 좀 풀린 몸짓으로 독특한 우주복을 입 은 공항 요원들이 발사대 둘레를 정리하고 있었다. 공항은 드래코 태번에 아주 가까웠다. 멀어야 4 타로미터 쯤 될 듯했다. 술집이 공항 가까이에 자리잡은 것은 물론 자연스러웠다. 갈릴레 오 공항은 달 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 고 월면 기지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기지들이 이곳 갈릴레오 공항 둘레에 모인 것은 공항이 있어서 그 런 것은 아니었다. 긴 활주로가 있어야 하는 지구의 공항과는 달 리, 달의 공항은 건설하기 쉬웠다. 사정은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 기지들이 이곳에 몰려있어서, 공항이 이곳에 자릴잡은 것이었다. <제 3장 3편> 이곳은 달의 근면, 즉 지구와 마주한 면과 원면, 즉 지구에서 보 이지 않는 면이 만나는 곳이었다. 밝은 지구는 달에서 천체들을 관 측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천문대들은 모두 원면에 세워 졌다. 반면에 지구와의 통신은 근면에서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근면 에서 태양의 채층 폭발에서 나온 거센 방사선을 강한 자장을 가진 지구가 좀 막아주었다. 그래서 기지들은 두 면이 합치는 이곳 동경 90도의 적도 근처에 자리잡았다. 물론 서경 90도 근처도 기지들이 자리잡는데 좋았다. 그러나 어 찌어찌해서 열세 나라들의 월면 기지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였고 서 쪽엔 미국과 일본만이 임시 기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십세다." 조바심이 좀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서, 조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현관의 옷장에 우주복을 벗어놓고 객장 안으로 들어서자, 아주 이상하게 생긴 로봇이 나타났다. "굿 이브닝, 레이디즈 앤드 젠틀멘." 생김새와는 달리 그 로봇의 목소리는 점잖고 부드러웠다. "굿 이부닝, 미스터 틱톡." 앞장 선 조가 대꾸했다. "조 선생님, 어서 오십시요." 로봇이 이번엔 조선어로 인사했다. 우리가 조선 사람들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반갑습니다, 최소좌님. 아, 리 선생님." "오래간만입네다, 틱톡 씨." 최가 고개를 갑신 숙였다. "틱톡 씨, 안녕하십네까?" 리는 반갑게 인사하고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더니 나를 돌아다보았다. "누님." 나는 좀 멋적은 기분으로 리의 곁으로 다가섰다. "왜?" 틱톡이라고 불린 그 로봇이 깜빡이지 않는 유리 눈으로 나를 찬찬 히 살폈다.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어서 오십시요." "누님," 리가 서둘러 우리 둘을 인사시켰다. "이 분은 틱톡 씨 입네다. 여기 태번에서 일하십네다." 이어 로봇에게 말했다, "여기이 분은 리명순 동무이십네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틱톡의 말씨는 무슨 책에 나온 구절을 외워서 읽는 듯했다. 그래도 분명히 품위있는 말씨였다. "안녕하십네까? 반갑습네다. 틱톡 씨." 로봇과 인사하게 된 것이 워낙 뜻밖이라서, 꽤 당황스러웠지만, 그 래도 나는 태연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만일 영어를 써야했다 면, 얘기는 많이 달라졌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 왔다. "틱톡 씨, 리 동무는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의 료리사이신데, 료 리솜씨가 대단하십네다. 원제 기회가 오문, 틱톡 씨께서도 우리 기 지에 오셔서 리 동무 료리 솜씨를 맛보셧으면 합네다." 리는 얼굴 에 웃음도 띠지 않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말뜻으로 보면, 분명히 농담이었는데, 리의 낯빛이 하도 진지해서, 농담으로 보기도 어려 웠다. 리의 칭찬에 좀 당황스러워진 마음으로 나는 흘긋 틱톡의 반응을 살폈다. `이 로봇이 과연 농담을 리해할까?' "감사합니다, 리 선생님. 저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틱톡도 리에 못지 않게 진지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그런 낯빛이 리 의 농담과 잘 맞아서,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 었다. <제 3장 4편> 하긴 틱톡은 언제나 진지한 낯빛일 터였다. 얼굴이 쇠로 말들어 졌으니, 감정에 따라, 그러니까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다 치고서, 낯빛을 바꿀 여지가 작았다. 그의 모습은 로봇치고도 좀 특이했다. 내가 다른 데서 만난 로봇들은 모두 사람을 닮았었다. 새로 나온 것들일수록 그러해서, 바이코누르 우주 공항에 있던 로봇들은, 언뜻 보면, 사람들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히 새 로봇일 터인데 도, 틱톡은 내가 어릴 적에 만들었던 수수깡 인형과 비숫했다. 동그런 쇠통이 몸통이었고 좀 작은 쇠통이 머리였다. 목과 팔다 리들은 쇠 파이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최신형 로봇이라기보단 아이들이 만든 우스꽝스러운 장난감 로봇과 같았다. 게다가 군데군데에 분명히 녹으로 보이는 불그스레한 반점들이 있 었다. 신기하게도 로봇을 만들때 으레 들어가는 합성수지는 틱톡을 만들 때는 전혀 쓰이지 않은 듯했다. 마치 합성수지가 발명되기 전 에 만들어진 것처럼. 어쨌든 틱톡은 내 마음에 아주 또렷한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도, 조선 말을 그리 유창하게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순간 나는 무슨 뚜렷한 까닭도 없이 앞으론 기지에서 하는 영 어 강좌에 참가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류상현 행정부장이 맡아서 주로 회화를 가르쳤는데, 부엌에서 일하는 료리사가 언제 서양 사람 들하고 어울리랴 싶어서, 나는 한번도 강의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무엇이 차오르는 듯, 가슴이 뿌듯했다. "모두 네 분이십니까?" 틱톡이 물었다. "네. 너이입네다." 조가 대꾸했다. "그러시면 저를 따라오십시요." 틱톡은 능숙하게 돌아서더니 통로 를 따라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쇠 파이프로 된 가는 팔들을 사람처 럼 앞뒤로 흔들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객장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넓직했다. 좀 놀라운 것은 아무리 줄잡아도 백 명은 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객장이 반 넘게 사람들로 찼다는 것이었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덟시 십오분이었다. "여기입니다." 틱톡이 큰 어항 옆에 좌석을 가리켰다. 아늑해 보이는 곳이었다. 탁자 위의 투명한 유리잔에 꽂힌 빨간 장미한 송 이가 분위기를 산뜻하게 만들었다. "괜찮디요?" 조가 최를 돌아다보고 동의를 구했다. "네. 도씁네다. 분위기가 아주..." "최 소좌님께서 안으로..." 조가 옆으로 한걸은 비켜서면서 최에게 손짓했다. 자리에 앉자, 나는 웃몸을 굽혀 꼿 냄새를 맡았다. 장미 향기가 코에 닿으면서, 가슴에 서글픔이 아주 옅은 그늘처럼 어렸다. 마치 깊이 잠들었던 서러운 기억 한 토막이 막 깨어난듯이. "누님, 뭘 드시갔읍네까?" 장미 향기가 불러낸 서러운 기억이 무 엇인가 짚어내려고 머리 뒤쪽 컴컴한 구석들을 더듬던 나에게 리가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효영이 아버지가 살았을 때는, 우리도 가끔 술집에 갔었다. 그러나 우리야 빈대떡이 나 족발 같은 안주에 소주를 마셨었다. 양주를 파는 술집은 우리 형편에선 생각해볼 수도 없는 사치였었다. 게다가 이 술집은 여느 술집도 아니고 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국제적 술집이었다. 이런 데서 파는 술들이 어떤 것들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이럴 때는 가만히 앉아서 남들이 하 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이었다. <제 3장 5편> "누님, <두스 엠로드>란 게 이시요. 이 집에서만 특별히 만드는 칵테일인데, 맛이 괜찮습네다. 좀 약하니끼니, 누님이 드셔도, 벧 문제 없을 겝네다." 리가 내 낯빛을 살폈다. "어떻습네까? 그걸 한번 들어보시는 게?" 리의 제안이 고마워서,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레 뭘 알아야디. 저그나레 도타하니, 한번..." "그러문, 미스터 틱톡, 두스 엠로드 하나하고 버본 온더록 하나 주시라요." "감사합니다." 몸의 각 부분들을 거칠게 용접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틱톡은 그래도 어떻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흉내를 냈다. 보통 재주가 아니었다. `남반부 말씨구나.' 뒤늦게 로봇의 말씨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좀 섭섭했다. `하기야 남반부 기지가 먼저 건설되었고 사람 수도 훨씬 많으니끼니. 우리 북반부 말씨를 알아들은 것만두 고맙다구 해야하나 ?' "여긴 위스키 온더록 둘." 조가 주문했다. 나는 최가 독한 술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아니,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마흔이 가까운 간호 군관이 이런 일에서 나와 같기 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자아, 여기." 리가 신용 카드를 틱톡에게 내밀었다. "네 잔 모두 이걸로 계산하시라요." "예, 알고습니다." 로봇은 그것을 자기 옆구리에 뚫린 구멍에 넣더 니 이내 빼어 리에게 되 건냈다. "팔십점팔 셀몬의 신용이 리명규 선생님 구좌에서 태번 구좌로 이체되었습니다. 그 금액에는 일 퍼센트의 부가가치세가 들어있습 니다. 감사합니다." <셀몬>은 <월면공화국 임시정부>의 돈으로 <월면 은행>에서 발행 했다. 셀몬은 <셀레나이트 모니>를 줄인 것이라고 했다. 마치 지 구의 돈인 <터몬>이 <테레스트리얼 모니>의 준말인 것처럼. 리의 얘기에 따르면, 셀몬은 현재는 주로 이 술집에서 쓰였지만 기지들에서도 점차 많이 쓰이고 있었다. 셸몬은 터몬과 가치가 똑 같았다. "오케이." 리가 신용카드에 남아있는 금액을 확인하고서 주머니 에 집어넣었다. 틱톡은 주방 쪽으로 굴러가더니 이내 술잔들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날렵한 몸짓으로 술잔들을 우리 앞에 내 려 놓았다. 한가운데 놓인 접시엔 팝콘이 들어있었다. "술 한번 빨리 나왔구나." 나는 무심코 한마디했다. "우리가 주문했을 때," 최가 설명했다. "이미 그 얘기가 주방의 미 쓰 글린다에게, 미쓰 글린다는 칵테일을 만드는 로봇인데, 무선으 로 전달된 겝네다." 최가 뭐 크게 뽐내면서 얘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얘기가 내 무지를 다른 두 사람에게 강조한 셈이 되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친절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내가 쓸데없이 나서서... 이런 데 처음 와선, 그저 입 다물고 있 는 게 상순데.' 어쩔 수 없이 덜미가 더워졌지만, 나는 얘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 다, "아, 그렇습네까?" "누님, 미쓰 글린다는 실은 팔이 네 개가 달린, 아주 큰 냉장곱네 다." 자리가 어색해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리가 서둘러 나섰다. "그래서 칵테일을 동시에 네 개나 만들 수 있읍네다." <제 3장 6편> "그렇슴마?" 나는 리에게 보내는 눈길에 고맙다는 뜻을 담았다. "두스 뭐라 했디? 이 술 이름." "두스 엠로드라요." "두스 엠로드. 기억해둬야 나중에 혼자 와서도 주문하디." 나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술이 입안을 부드럽게 적셨다. 그제서야 나는 꽤 목이 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한모금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녹즙이 많이 들 어간 듯, 술은 풀빛이었다. "도흔데." 리의 얼굴에 어린 웃음이 밝아졌다. "원래 이 칵테일은," 자신 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서, 그는 말을 이었다, "베른 기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컴퓨터를 리용해서 달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게 만들 어 냈다고 합네다. 자기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만들어 주려고 했다 는데, 여기 와서 미쓰 글린다를 시켜서 만들어보았더니, 정짜로 맛 이 도았답네다." "아, 그렇습네까?" 최가 받았다. "그러문 다음엔 나도 그걸 한 번 시켜야 되갔구먼." "그래서 이 집에서 그걸 사가지고 특허를 냈답네다." "특허를 ?" 최가 물었다. "어디에 냈답네까?" 리가 싱긋 웃었다. "월면공화국 임시정부에 냈답네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좌석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월면 공화국 임시정부>는 무슨 공식적 정부가 아니었다. 월면 기지들이 한데 모여 나라를 만들어서 지구로 부터 독립하자고 주장하는 사람 들의 모임이었다. 흔히 <셀레나이트 무브먼트>라고 불렸다. 그게 원래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올라오자 마자 그 기구에 참 여한 리의 얘기에 따르면,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400명쯤 되었 다. "재미있는 얘기구먼." 리가 최에겐 두스 엠로드를 권한 적이 없 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따스하게 했다. 그에 대한 고마움에 좀 더 짙은 감정이 섞이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한모금 마셨다. 워낙 비싼 술이어서, 아껴 마실 생각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우 리 처지에선 이런 데 오는 것부터가 사치였다. "누님, 아시디요, <두스>가 불란서말로 달콤하단 뜻인 거? <엠로 드>는 에메랄드구요. 누님, 어떻습네까? 좀 달콤하죠?" "응. 달콤해. 달콤하면서두 시원하구. 나 같은 사람에겐 딱 도흔 데, 너무 비싼 것이 좀..." "아, 이제 갈증이 좀 가셨다."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면서, 최 는 얼음 조각들만 남은 잔을 내려놓았다. 조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최에게 눈짓을 하더니 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문 우린..." 리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가 일어서서 내게 가볍게 목례했다. 조를 따라 최가 통로로 나갔 다. "우리 먼저 갈 테니끼니, 리명순 동무도 생각이 이시문 오시라 요." 나는 영문을 몰라서 멀거니 바라보다가 엉겁결에 대꾸했다, "네." "굿 럭." 리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늘은 하나 터질 것 같은데. 하나 터지면, 내레 리명순 동무에게 그 술을 한잔 사갔시요." 조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곧 두 사람은 객장 한끝으로 향했다. <제 3장 7편> "더기 객장 뒤쪽에 게이밍 룸이 있습네다." 말없이 묻는 내 눈길을 받자, 리가 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설 명했다. "도박하는 데 말입네다." "도박?" 이곳에 와서 도박을 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슬로트 머신 좀 하고 가는 겝네다. 우리 처지에 무슨 돈이 있어서 큰 도박을 하겠읍네까?" 리는 애써 아무 것도 아니란 낯빛을 했다. 나는 <슬로트 머신>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묻기도 좀 뭣했다. 분위기가 좀 어색해진 듯해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미스터 틱톡이라고 부르디, 그 로봇을?" "아, 그것 말입네까?" 리도 도박 얘기는 달갑지 않았던 듯 새로 운 화제를 반겼다. "틱톡은 <오즈> 얘기에 나오는 인형 이름입네 다. 철로 만든 인형인데, 누님, 혹시 어렸을 적에 오즈 얘기를 읽 었습네까? <오즈의 마법사>니 <오즈의 허수애비>니 하는 동화들 말 입네다."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러나 나는 <오즈>라는 말은 지금 처음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즈라. 글쎄. 읽은 것 같디 않은데. 무슨 동환데?" "누구더라... 지은 사람 이름이 생각 안 나네." 리가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미국 사람이 쓴 동화입네다, 오즈얘긴, 오즈란 곳에, 물 론 실제로 그런 곳이 있는 것은 아니고, 도로시란 미국 소녀가 찾 아가서 겪는 일들을 쓴 책들인데, 어린애들한테 아주 인기가 높습네 다." "그럼 미쓰 뭐라 했디? 주방에 있단 로봇말야." "미쓰 글린다요? 글린다는 오즈에 사는 마녀입네다. 좋은 마녀디 요." "그렇슴마?" 천천히 술 맛을 음미하면서, 나는 어항을 살폈다. 파 란 이끼가 얇게 낀 유리 너머 긴 물품들 속을 송사리 만한 고기들 몇이 헤엄치는 풍경이 문득 아주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그 오즈라는 곳이 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주문을 외듯 나직이 뇌어 보았다, "오즈." "오즈의 수도는 <에메랄드 시티>인데, 이 드래코 태번이 있는 곳이 바로 에메랄드 시티입네다." 나는 고개를 돌려 리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얘기가 잘 리해되지 않았다. 리가 싱긋 웃었다. "이 집 주인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디요. 누님, 들어오실 때, 간판 보셨디요? 윗 줄엔 <드래코 태번>이라 됐고 아 랫 줄엔 <에메랄드 시티>라 된 거 말입네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보긴 보았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 지만. "그래서 그 술이 <두스 엠로드>입네다." 리가 내 술잔을 가리켰 다. "물론 술 빛깔도 에메랄드 빛깔이디만." "아, 그랬구먼. 그러고보니, 술 빛깔이 정말로 에메랄드 빛깔이 네." "누님, 여기 있는 다른 로봇들도 모두 오즈 얘기에 나오는 인물들 입니다. 여기 객장 안에 있는 로봇들만이 아니라 게이밍 룸에 있는 것들까지." 리가 객장 안을 둘러다보았다. "더기. 누님, 더기 보시라요." 리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슬쩍 턱으로 가리켰다. "뎌 로봇이 <스케어크로우>입네다. 허수애비란 뜻이라요." <제 3장 8편> 우리 자리에서 서너 자리 떨어진 곳에서 로봇 하나가 빈 술잔들을 집어서 쟁반에 담고 있었다. 정말 허수아비처럼 생긴 로봇이었다. 속에 옷가지를 채운 자루를 끈으로 묶어 만든 것 같은 머리엔 눈, 코, 입에 귀까지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다. "정짜로 허수애빈데." 마음이 문득 푸근해져서, 목소리가 나도 모 르게 높아졌다, "저런 로봇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나?" "그러문요." 그 로봇이 들을까 걱정이 되는 듯, 리는 여전히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기엔 뎌래도 속엔 아주 정교한 장치들이 들어있는 최신형 로봇입네다. 더런 로봇은 하나에 적어도 십만 터 몬은 간답네다." "휴우. 십만 터몬이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문 차라리 사람을 쓰디. 그 펜이 오히려 쌀 것 같은데." "얘길 들어보니끼니, 장기적으론 그래도 로봇을 쓰는 게 낫답네 다. 로봇은 전기만 있으문 되니까요. 숨도 안 쉬고 음식을 먹디도 않으니끼니, 처음 살 때는 목돈이 들어가디만, 한번 들여놓은 다음 엔... 그리고 여기 달 나라꺼지 와서 술집의 심부름꾼 노릇 할 사 람이 많갔습네까?" "하긴. 그러문 여기엔 사람은 없나?" "있디요. 이렇게 큰 시설을 운영하려문,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 디요. 한 열 사람쯤 될 겁네다. 주인은 미국 녀잔데, 이름이 도로 시라요. 오즈 얘기의 주인공처럼. 사무실이 더기 입구에 있습네 다." 그러고보니, 미국 녀자가 드래코 태번의 주인이란 얘기는 나도 어 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도로시라구 했디?" "네." "원래 이름이 도로시였답네다. 아마 그래서 이 집을 오즈처럼 꾸 밀 생각이 났는디도 모르디요. 남편이 얼마 전에 죽었답니다. 남 편은 돈이 많은 노인이었는데, 심장이 약해서, 여기로 올라왔답네 다. 이 집이 지금 이천만 터몬이 나간다니... 게다가 아직 나이도 많디않고..." 리가 눈가에 웃음을 올렸다. "그래서 달 나라에 있는 남자들 중에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이천만 터몬?" "네." 리가 싱긋 웃었다. "이천만 터몬요." "이천만 터몬. 백만 터몬이 스무 번이라. 아니, 도대체 이 술집이 뭐가 그래 대단하다구..." 나는 객장을 둘러다 보았다. "꾸미긴 잘 꾸몄디만..." "이천만 터몬보다 더 나가면 더 나갔디, 덜 나가딘 않는다고 합데 다. 누님, 한번 생각해보시라요.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지구에서 셔틀로 실어온 것들입네다. 모두 돈 덩어리들입네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모든 것들이, 술만이 아니라 공기에서 물까지, 지구에서 비싼 삯을 물고서 우주선으로 실어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집이 잘 될 거랍네다. 돈은 많은데 심장이 약 하거나 허리나 관절이 아픈 사람들은 모두 이리로 올라올려고 할 것 아닙네까? 그리고 여비는 점점 싸디니끼니, 그냥 여행 삼아 올라올 사람들도 많아딜 거라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 올라와서 할 일이 뭐이 있갔습네까? 도박하 는 것 빼놓고는. 그래서 지금 게이밍 룸을 넓히려고 지하로 많이 파들어간답네다." "저그나는 어드케 그리도 잘 아나?" 리가 그런 것까지 안다는 것 이 나는 적잖이 신기했다. 그리고 얘기도 귀맛이 났다. "뉘게서 드던?" <제 3장 9편> "내레 얘기 했디요? 박진동씨라고 여기 주방장 말입네다." "아, 그래." "그리고 이 집의 버릴물 처리 요원이 중국계 미국인 입네다. 주쿠오 라고 하는데, 샹하이에서 낳았답네다. 그래서 나하곤 아주..." "그랬구먼. 저그나랑 그 사람은 여기서야 고향 친구나 마찬가지 갔네." "그렇디요." 리는 씨익 웃고서 말을 이었다, "도로시는 아주 대 단한 녀자라요. 사업도 잘 하고 정치적 야심도 크고. 셀레나이트 무브먼트를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바로 그 녀자라요. 무브먼트의 사무실도 바로 이 술집 안에 있고. 그래서 지금 선거가 실시되문, 아마도 그 녀자가 월면공화국 대통령이 될 껫네다." 돈 많고 사업 잘하고 정치적 야심도 크다는 그녀의 모습을 머리속 에 그려보면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녀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녀자의 인생은 어떤 것일까? 그런 녀자가 보기엔 나 같은 녀잔...' 그래도 나는 마음 한구석으론 어쩐지 리가 도로시라는 녀자를 그 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리는 심각한 낯빛으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서 물이 된 잔을 한손으로 잡고서. 리의 얼굴은 그러 때가 아주 보기 좋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녀느 때는 감춰졌던 단단한 무엇이 드러나서 그의 얼굴의 선을 훨씬 또렷하게 만드는 듯했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서 그의 얼굴을 그저 눈길로 더듬는 것도 즐겁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으로 스쳤다. '내가 지금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일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도로시가 셀레나이트 무브먼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섭네다. 적어도 그런 눈치가 보입네다." "그렇슴마?" 자세가 좀 불편했다. 나는 왼 다리를 자리에 올려 놓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녀잔 자기가 여기서 하는 사업들을 독점할 생각인 모양입네 다. 술집, 카지노, 은행. 곧 호텔도 세울 모양이라요. 지구의 대 기업들로부터 달 나라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문, 우리 모두 단결 해야 한다고 당창 주장 하디만, 가만히 하는 얘기를 뜯어보문, 자기 이익을 보호할 생각에서 그러는 거라요. 벌써 그 녀잔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에서 힘이 있는 남자들을 거의 다 휘어잡은 모양이라요." "대단한 녀잔 모양이구먼." 나는 거의 전성으로 대꾸했다. 나로선 그가 하는 얘기보다 그이 심 각한 얼굴을 뜯어보는 것에 마음이 더 끌렸다. "이 달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진 땅이 되야디, 돈 많은 사람들 메 치 자기들 마음대로..." "아무렴. 쩌그나 말이 옳슴메." "그런데 그게 참."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녀자가 하도 힘이 세니끼니, 아무 도... 그 녀자 솜씨는 정짜로 대단합네다. 누님, 보시라요. 이 술집을 에메랄드 시티라고 하고 동화책에 나오는 로봇들들 만들어서 쓰는 것도 그렇습네다. 언뜻 보면, 그런 것들이 그저 변덕부리는 것처럼 보이디요. 그러나 실은 아주 냉철한 계산에서 나온 거라 요. 여기 달 나라에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때 오즈 얘기를 읽 었디요. 그래서 여기 태번에 오문, 그 사람들은 마음이 푸근해딘다 그런 얘깁네뇩표 사람에게 털어냘 얘기도 털어 놓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두 한데." <제 3장 10편> "그래서 각 기지의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요원들에게 이 술집에 갔다오란 처방을 내린답네다." 리가 고 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슴마? 흠. 그러문 우리도 좀 자주 와야 되갔구먼." 나는 리와 함께 다시 이곳을 찾을 구실이 생긴 것이 반가웠다. "요즘 나 두 스트레슨가 뭔가를 받는 것 같은데." "누님, 다음에 또 함께 올라요?" 리가 정색했다. "좀 생각해보구." 내 마음을 리가 읽은 것만 같아서, 나는 급히 화 제를 돌렸다, "그런데 드래코 태번이란 이름은 무슨 뜻이디? 그것 도 오즈 얘기에 나오나?" "아닙네다. 드래코는 우리 은하에서 아주 가까운 은하입네다." "아, 은하."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훈련소에서 배운 천체에 관 한 지식을 떠올렸다. 구름을 찍은 것 같은 사진들이 어렴풋이 떠올 랐다. "네. 그러나 이 술집 이름은 어떤 소설에 나온 술집 이름을 딴 거라 합데다. 누구라카더라..." "그러문 모두 책에서 이름을 딴 거로구먼, 술집 이름이나 로봇 이름 이나." "네." 좀 비뚤어진 웃음에 리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드래코 태번은 외계인들이 잘 찾는 술집이었다고 합데다." "외계인?" "네." "외계인이라. 그러고보문, 우리도 외계인이디. 달 나라에 원주민 이 있다면, 우리도 영락없는 외계인이디." "누님 얘길 듣고보니, 정말로 그렇네요." 리의 웃음이 환했다. 나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술맛이 도흔데. 저그나 덕분 에 오늘 내레 이런 돠은 술도 마시고..." "누님. 한 잔 더 하시라요." 리가 슬쩍 오른 팔을 내 허리에 두 르면서, 고개를 돌려 로봇을 찾았다. "아니, 그만두디." 몸이 앞으 로 쏠려 그의 허벅지를 짚으면서, 나는 급히 말렸다. "이런 술은 우리에겐 너무 비싸." 나는 리가 벌써 팔십 셀몬이나 쓴 것이 마음에 적잖이 걸렸다.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더라도, 나는 리의 처지가 넉넉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월면 기지 의 요원들에게도 봉급을 많이 줄 만큼 넉넉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도... 누님, 딱 한 잔씩만 더 합세다." "아니, 됐슴메." 그의 허벅지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면서, 나는 힘 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술은 무슨 술. 이렇게 저그나하고 같이 이시면, 됐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속마 은을 밝힌 셈이어서, 왈칵 수줍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편으론 내 마음을 그에게 밝혔다는 사실이 야릇한 즐거움으로 살을 간지럽혔 다. 잠시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나는 술집에 들 어온 뒤 처음으로 객장 안에 흐르는 음악을 들었다. 나직하고 부드 러운 그 선율이 내게 무엇을 속삭여주는 듯했다. 내가 오랫 동안 듣지 못했던 무엇을, 내가 듣기를 두려워했던 무엇을. "누님." 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짙은 감정이 배어서 거 의 석쉰 목소리로. 이어 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내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그의 더운 숨 결이 내 덜미에 느껴지면서, 눈이 저절로 감겼다. 맥박이 거세게 뛰는 몸 속 어디에선가 파란 물결이, 두스 엠로드처럼 시원하고 파 란 물결이, 춤추듯 출렁거렸다. <제 4장 1편>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발뒤꿈치에 탄력이 느 껴졌다. 패드를 갈아서, 마음은 개운했고, 거센 입맞춤의 뒷맛이 아직 어린 살은 저 혼자 느끼는 무슨 예감으로 설레는 듯했다. '하, 리명순 동무. 놀랐슴메.'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환한 대낮에, 시간으로야 밤이지만, 환히 보이는 곳에서 남자하고 입맞추고. 이제...' "쏘리." 나와 부딪칠 뻔한 서양 녀자가 술 취한 목소리로 얘기 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대꾸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지만,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다음엔 꼭 무슨 대꾸를 하 겠다고 다짐하곤 했지만, 막상 닥치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도 이번엔 연습 삼아 화장실 쪽에 대고 한마디 던졌다. "괜찮습네 다." "누님," 화장실 밖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리명규가 건너편에서 급히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누님, 박진동 씨레 시방 누님을 만나고 싶다 하시는데..." 그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내 낯빛을 살폈다. 우리는 게이밍 룸에 들러 다 른 두 사람을 찾아보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 터였다. "박진동 씨? 어데서?" "더기서요. 더기..." 그가 가리킨 곳엔 동양 사람들 서넛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문 가보디, 뭐." 나는 선선히 대꾸했다. 드래코 태번의 주 방장을 만나면, 틀림없이 료리 얘기가 나올터여서, 마음이 좀 켕기 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에 대해 놀랐다. '오늘 은 정짜로 내레...' "그런데, 누님..." 리가 말끝을 흐렸다. "왜?" "실은 더기 박진동 씨랑 같이 있는 사람들은 장영실 사람들입네다. 괜찮갔습네까?" "그래? 괜찮디 않구." 남반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이 좀 뜨악했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생각해서 선뜻 대꾸했다. "뭐 못 만날 사람들인가? 영어를 몰라두 되니, 차라리 잘 됐디." 리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그러문 누님..." 나도 한껏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와 입을맞추고 내 몸을 대 담하게 애무한 뒤에 오히려 더 수줍어진 그가 막 발그스레해지기 시 작한 풋 사과처럼 느껴졌다. 한입 베어물고 싶은 충동이 내 몸을 활칵 움켜쥐면서, 저릿한 기운이 살 속으로 흘렀다. 그 달콤한 저릿함을 견디면서 나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 었다. "자, 이리..." 리가 내 곁으로 다가서더니 조심스럽게 오른팔을 내 허리에 둘렀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노인 한 사람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 어섰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은 젊었다. "누님, 이 분이 바로 박진동 선생님이십네다." 이어 그는 나를 그 사람에게 소개했다. "이 분이 리명순 녀사이십네다." <제 4장 2편> "처음 뵙갔습네다." 이번엔 내가 먼저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리 녀사님을 꼭 뵙고 싶었는데. 정말 로 반갑습니다." 박진동 씨의 목소리는 젊은 얼굴과 큰 몸집에 비 기면 뜻밖이란 느낌을 줄 만큼 작고 숨찬 기운이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남자 둘에 녀 자 하나였다. "리 녀사님, 뭘 좀 드셔야죠. 뭘 드시겠습니까?" 인사가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자, 장영실 기지의 부사령관이 물었다. 송 무슨 대 령이라고 했다. 남반부 군대의 계급은 우리 북반부 군대의 계급과 상당히 달랐다. 남반부 사람들은 대좌를 대령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겐 상위나 상좌 라는 계급이 없었다. 그들은 또 소장을 준장으로, 중장을 소장으 로, 상장을 중장으로 불렀다. 그들에겐 대장이 가장 놓은 계급이 어서, 원수와 차수는 없었다. 우리 군대가 김일성 대원수의 령도 아래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영 웅적으로 투쟁한 항일 유격대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그들은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미군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었 다. 군인의 아내라,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남반부 군대에 대해선 좀 많이 아는 편이었다. 나는 술잔들과 안주 접시들이 놓인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생선회를 안주로 해서 청주로 보이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흠. 돈 많은 사람들이라, 호기롭게 먹고 마시는구나...' 속에 품은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면서, 나는 맞은 편에 앉은 리를 쳐다보았다. "누님, 아까 드신 걸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스 엠로드로." "레이디 오렉스, 플리즈." 박진동 씨가 옆으로 지나가는 로봇을 불러세웠다. "예스, 써." 그 로봇이 반갑게 돌아섰다. 화사한 분홍 드레스를 입은 녀자 로봇이었다. 서양 녀자를 본따서 만들어진, 예쁘면서도 서늘한 얼굴이 어쩐지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 은 잘 생긴 여배우들의 얼굴을 합성해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굿 이브닝, 레이디 오렉스. 두스 엠로드 하나 주시라요." 리가 익숙한 솜씨로 주문했다. "안녕하세요, 리 선생님. 알겠습니다." 그 녀자 로봇의 목소리가 귀에 닿으면서, 몸 속 어디에서 맑은 메 아리가 울렸다. 이어 메아리의 긴 여운이 문득 멈춰 한데 모이더니 내 넋 속에 선 큰 나무의 너글 닢사구 위에 맑은 이슬로 맺혔다. 우아한 몸짓으로 돌아서서 주방 쪽으로 가는 그 로봇을 보면서, 나 는 뜻모를 한숨이 내쉬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뎌리 맑을 수가 있다니. 하긴 사람의 목소린 아니디. 전산기가 합성한 목소리디...' "그럼 그 얘길 마저 해서 끝냅시다. 이 형, 이러면 어떻겠소? <엘스트>를 <케이.에스.티>로 바꿔쓰면?"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 어서 콧수염을 만지면서, 송 대령이 앞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엘스트>는 이곳 갈릴레오 공장 둘레에 자리잡은 월면 기지들에서 쓰이는 <동부 월면 표준시>의 약자였다. <케이.에스.티>가 무엇인 지는 알 수 없었다. <제 4장 3편> "글쎄요." 그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영실 기지의 대변인이 라는 마흔 가량 된 사내였다. 머리가 긴 것을 보니, 군인은 아니었 다. "실은 그것도 생각해보긴 했습니다. <케이.에스.티>나 <지.엠. 티>로 바꾸는 것도. 그러나 딴 것도 아니고 사주팔자에 쓰는 시간 을 여기 시간에서 저기 시간으로 바꾼다는 것이 좀..." "하긴 그렇기도 한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송 대령은 입맛을 다셨다. "지금 달 나라에서 태어난 아기의 사주팔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중 예요. 이번에 우리 베이스에서 처음으로 아기가 태어났거든요." 내 곁에 앉은 김수형이 내게 설명했다. 방송국의 특파원이라고 했는데, 아직 서른은 채 안 된 듯했다. 방송국의 특파원답게 표정 임이며 말씨며 몸짓이 모두 세련되었는데도 어쩐지 푸수한 느낌을 주어서, 호감이 가는 녀자였다. "아, 녜." 나는 그녀의 친절이 고마웠다. "생년월은 물론 문제가 없고, 난 날까지도 뭐 괜찮은데, 난 시가 문 제거든요." "아, 네. 그러고보니끼니, 그런 문제가 있갔습네다." 나는 정중 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속으론 사주팔자와 같은 미신을 따르는 그 들에 대하여 작지 않은 경멸감을 느꼈다. `사람의 평생 운명이 그가 태어난 시간에 달렸다니...' 나는 속 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과학적 역사관을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 사회에선 사주팔자를 믿는 것과 같은 비과학적인 태 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걱정스러운 것은, 남반부의 영 향이 점점 커지면서, 북반부에서도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요즈음엔 결혼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주팔자를 보는 일이 류행했다. 특히 전산 프로그램을 리용해서 사주팔자를 보는 일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주팔자를 보는 게 점성술을 쓰는 것보단 사뭇 나은 것 같습니다." 대변인이 말했다. "그래요?" "예. 고다드 베이스에서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들과 비슷한 얘기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점성술에선 태양 에다 달에다 행성들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아, 성좌들까지 고려해야 한답니다, 이젠 달 대신 지구를 써야 할 판이니, 얘기가 복잡하게 됐죠. 게다가 점성술에선 그런 천체들의 상대적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그게 완전히..." "그러면 사주팔자를 따지는 건 일도 아니구만." 송 대령이 씨익 웃었다. "예. 그래서 그 사람들은 천체도를 새로 하나 만들었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그리고 해석하는 규칙도 새로 만들었답니다. 지금 달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선 새로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 호 로스코프를 본답니다." "그렇습니다." 박진동 씨가 거들었다. "그때 가장 큰 논쟁이 붙었던 것이 지구의 영향을 추정하는 일이었 습니다. 전통적 점성술에선 물론 지구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없었 죠. 예전에야 모든 사람들이 지구에서 태어났으니, 지구에 관한 한, 똑같은 영향을 똑같은 정도로 받았다는 얘기죠. 그러나 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다르죠. 그 사람들에겐 달과 지구의 비중이 많이 달라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셀렌 골드벅이 태어났을 때는 사람 들이 날마다 여기 와서 밤 늦게까지 토론했습니다. 가이아의 성격이 며 영향에 대해서." <제 4장 4편> "그 사람들 정말로 그걸 믿나요?" 김이 물었다. "점성술을 열광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슬로운 윌슨에게 월면 기지에도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 얘기가 재미있던데요."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 대변인은 말 을 이었다. "점성술은 신화와 종교와 과학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지식 체계라 나요. 케플러가 점성술을 믿고 실제로 점성술사 노릇을 했는데, 우 리가 해선 안 될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 그랬습니까?" 김이 클클거렸다. "신화와 종교와 과학을 조 화시켰다. 재미있는 얘긴데요." 이어 정색하고 대변인을 쳐다보았 다. "인터뷰를 좀 해야겠네요. 슬로운 윌슨이면, 고다드 베이스의 대변인이죠?" "예. 좋은 생각인데요. 그 친굴 인터뷰하면, 여러 가지로 재미 있을 겁니다." "지금 <셀레나잇 타이드>에선 <에버리지니스 홀로스코프>가 둘로 나갑니다." 박진동 씨가 덧붙였다. "하나는 <니어 사이드>에서 태 어난 사람들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 사이드>에서 태어난 사람들 것 이죠." "아, 그렇습니까? <파 사이드>에선 지구가 보이지 않으니까, 지 구의 영향이 좀 작다, 그런 얘기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어쨌든, 적절한 시간을 정하는 건 나중에 사주팔자를 실제로 볼 점장이들이 골치를 썩일 일이고. 우린 그런 이슈가 있다는 걸 부각 시켜면 되니까." 송 대령은 대변인에게 말하고 이어 옆에 앉은 김을 쳐다보았다. "미쓰 김." "네." "거듭 얘기하지만, 이번 일은 저 아래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니, 잘 좀 취급해서, 우리 베이스가 피알이 되도록..." "네. 알겠습니다." "달 나라에서 태어난 첫 조선 아이란 것도 뉴스 가치가 크지만, 루나 그래비티의 영향이나 사주팔자를 따질 때의 문제점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슈들이니까..." "네. 한번 잘 해보겠습니다." "부사령관님, 이렇게 정리하면, 어떻겠습니까?" 대변인이 날렵하 게 끼어들었다. "달 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선 아이가 태어났단 얘긴 프라임 타임에 넣고 루나 그래비티에서 수태되어 출생한 아이의 생 장과 건강에 관한 메디칼 애스펙트는 과학자들의 세미나에서 다루고 그 아이의 사주팔자를 정하는 데 좀 문제가 있단 얘긴 무슨 심야 토 크 쇼의 주제로 삼는다. 어떻습니까?" "음. 대략 그렇게 하면, 되겠구만." 송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 다. "아까 얘기했듯이, 루나 그래비티의 메디킬 애스펙트에 역점을 둡시다. 실버 파우어를 겨낭하고서." "예, 알겠습니다." "미쓰 김 생각은 어떠쇼?" 김에게 말할 때는, 송 대령의 목소리 에 무엇이 짙게 밴 듯했다. 그는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가 김에게 마음이 끌렸다는 것은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일단 헤드쿼터에 보고하겠습니다. 여기 베이스의 뜻이 그러니 의견을 알려달라고." 김의 대답에선 굳은 약속을 피하려는 마음씨 가 느껴졌다. 나로선 잘 모르지만, 이 자리는 두 남자가 김을 설득 하는 자리인 듯했다. <제 4장 5편> "이번 일 잘만 되면, 내 미쓰 김한테 한턱 단단히 내리다." "생큐, 써." 김이 영어로 대꾸하고서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송 대령과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 람도 아니고 부사령관이 치근덕거리면, 혼자 이리 먼 곳으로 파견나 온 젊은 녀자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대꾸에 나는 야시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 다. 오히려 그런 대꾸가 그녀의 가벼운 웃음과 어울려 자리의 분위 기에 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달랐다. 옆에서 보니, 남반부 사람 들은 모두 영어를 너무 많이 섞어 썼다. 물론 뜻박의 일은 아니었 지만, 영 마음에 거슬렸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 다. 하긴 요즈음은 우리 기지 사람들도 점점 영어를 많이 섞어쓰고 있었지만, 어느 사이엔가 모두 <채널>이란 말을 쓰고 있어서, <통 로>란 말을 쓰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 형." "예." "이 형은 미디어 쪽에 발이 넓으니, 미쓰 김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한번 발벗고 나서서..." "예, 잘 알겠습니다." "이단계 사업 예산이 이번 추경에 반영되지 않으면, 정말로 낭패 라고." 송 대령이 정색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내년 예산 심의 때는 훨씬 어려울 꺼요. 야당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당 의 원들도 전과 달리 스페이스 프로젝트에 별 호감을 보이지 않는 것 같거든..."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서, 피알 효과가 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로 잡을 때, 어떻게 사령관님 얼굴이 나오도록 할 수 없을까?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쓰 김하고 서 기사하고 상의해서, 한번 해보겠습니다." 속에서 다시 경멸감이 슬그머니 솟았다. 남반부 사람들은, 지위 가 높든 낮든, 나이가 들었든 젊었든, 모두 텔레비전에 나오려고 기 를 썼다. 그래서 지금처럼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도 아무런 거 리낌 없이 사령관이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길을 찾고 있 었다. 내 생각엔 그런 뻔뻔스러움이 남반부 사람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 이고 가장 큰 무기였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나 뻔뻔스러웠지만, 돈 을 버는 데선 특히 뻔뻔스러웠다. 그래서 이것저것 살피는 북반부 사람들이 언제나 밀렸다. 그때 그 녀자 로봇이 다가왔다. "여기 술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네다." 술잔을 내 앞에 날렵하게 내려놓는 그 로봇을 이 름을 불러 칭찬하고 싶었지만, 나는 레이디 뭐라는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손님들이 갑자기 많이 오셔서, 좀 늦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 로봇은 내게 볼웃음을 지어보였다. 아까 본 로봇들과는 달리 이 녀자 로봇은 첨단 소재로 만들어져서 사람처럼 자유롭게 여러 가 지 낯빛들을 지을 수 있는 듯했다. 게다가 차림도 아주 화사하고 우아했다. 서양 영화에서 본 옛날 서양 궁정의 귀족 부인들이 입었음직한 드레스를 입었는데, 긴 드레 스 자락이 마루 바닥에 거의 닿아서, 바퀴가 보이지 않았다. 웃옷 은 가슴이 깊게 파여서,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강조되었다. <제 4장 6편> 옛날 서양 녀자들이 했던 것처럼, 무릎을 굽혀 몸을 살짝 낮추는 인사를 맵시있게 하고서 돌아서는 그 로봇을 보자, 문득 아쉬움이 가슴을 시리게 훔었다. `나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서...' 객장 가운데 쪽으로 나가는 로봇 너머로 춤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까는 아주 빠르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세차게 흔들었는데, 이제는 좀 느리고 달콤한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어느 먼 환상의 나라로 이끄는 듯한 선율이 내 마 음에게 손짓하는 듯했다. 이곳을 훌쩍 떠나 그곳으로 가자고. `저런 드레스를 입고, 그 오즈란 나라의 공주처럼 차리고서... 왕자처럼 차린 사내와 춤을 한번...' 나는 고개를 돌려 흘긋 리를 살폈다. 리는 술잔을 비우더니 생선회 한 조각을 집었다. 그의 몸짓이나 낯빛엔 사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생선회는 무척 비쌀 터였다. 요즈음엔 생선이 워낙 귀해서, 북반부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생선 회를 맛보기 어려웠다. 바다에서 어선들이 고기를 잡으면, 기다리 고 있던 냉동선들이 그대로 남반부로 실어간다고 했다. 게다가 남 반부 기지의 부사령관 앞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주눅이 든 기색 이 없었다. "정짜로 맛있는데. 덕분에 오래간만에 아주..." 박진동 씨를 돌아 다보면서, 리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어 송 대령 쪽으로 고개 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워낙 솔직해서 그런지, 리의 태도엔 군숨스 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예. 많이 드십시요. 잔이 비었는데, 자아..." 송 대령이 술병 을 들어 리에게 권했다. "아, 네. 감사합네다." 나는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아까보다 오히려 술맛이 더 좋 았다. 달콤하면서도 풋풋한 맛과 향그러운 냄새가 불러낸 야릇한 환상들이 마음 속에서 흔들렸다. `이러다간 내레 술꾼이 되갔다.' "리 녀사님." 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직이 불렀다. "네." "제 고향은 서울예요. 리 녀사님 고향은 어디죠?" "제 고향은 자강도 만포입네다." "아, 네. 만포..." "그런데 리 형." 리의 술잔을 채우고서, 송 대령이 말했다. "네." "리 형은 우리 장영실 기지에 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네. 부사령관님, 실은," 리의 입가에 남았던 웃음이 퍼졌다. "다섯 번이나 가보았습네다." "아, 그래요?" 송 대령이 좀 놀란 어조로 되물었다. "다섯 번이 나? 하아." "네. 갓 세워진 기지에서,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기지에서, 무 슨 일 좀 하려면, 없는 게 하도 많아서... 그래서 없는 것들을 좀 얻을까 해서, 염치없지만, 자주 들렸읍네다." "아, 그랬습니까? 서로 도와야죠. 남도 아니고 우리야 같은 민 족인데." "감사합네다. 덕분에 이젠 남새나 잔 과일은 그럭저럭 키워내고 있습네다. 장영실 기지의 협조가 없었다문, 도저히..." 리가 고개 를 저었다. <제 4장 7편> "다행이요." 리가 속내를 거리낌없이 터놓으니까, 송 대령은 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적당한 대꾸를 찾는 듯하더니, 떠오르지 않 는지, 술이 좀 들었던 잔을 비웠다. "부사령관님, 제가 한잔...?" 술병을 잡으면서, 리가 송 대령의 얼굴을 살폈다. "아, 예." 잔을 내밀고서, 송 대령이 슬쩍 물었다. "여기 박 선 생님께서 그러시는데, 리 형이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에 아주 적극적 이라고..." "뭐 적극적이라고꺼지 할 것은 못 됩네다. 다만 무브먼트의 뜻을 펴나가는데 도움이 됐으문 하는 생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 고 있습네다." "리 형이 워낙 열성이라서, 나 자신까지도 좀 부끄러울 때가 있습 니다." 박진동 씨가 거들었다. "앞으로 김일성 혁명 기지 요원들 이 우리 무브먼트에 많이 참여하도록 만드는 일에서 리 형이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의 전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진동의 칭찬에 겸연쩍어하는 리에게 송 대령이 물었다. "무엇보다도, 도흔 일이고. 저는 전망도 밝다고 봅네다. 실은 저는 멀지 않아 월면 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되리라고 봅니다." 리 가 정색하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송 대령과 박진동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젓가락으로 생선회를 집던 김이 흘긋 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가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우리 두 기지들이, 장영실 기 지 와 김일성 혁명 기지가, 하나로 합치는 것입니다." 리는 심상한 얘기를 한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회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리의 얘기는 나에겐 물론 놀라운 얘기였다. 우리 기지를 남반부 기지와 합치다니!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한 그였지만, 그 런 얘기는 아직까지 내비친 적이 없었다. 하긴 그가 샐레나이트 무 브먼트에 그렇게 적극적이란 사실도 나는 이 자리에서 처음 안 것이 었다. '만일...' 두려움의 검은 기운이 눈앞을 가렸다. '만일 이 얘기 가 우리기지에 들어가문... 김상윤 소좌나 부사령관님 귀에 들어가 문, 뎌 사람은...' 리의 얘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꽤나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잠 시 자리에 좀 어색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침묵이 내렸다. 박진동 씨가 먼저 냉정을 되찾았다. <어떻소? 내가 한 얘기가 맞잖소?> 하는 뜻을 지닌 웃음을 얼굴에 올리고서, 송 대령에게 슬 쩍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심장한 얘기로 들리는데... 리 형의 의견 을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습니까?" 송 대령이 조심스럽게 물었 다. "네." 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한 민족이고 한 나라입네다. 련방제 국가로 통일된 지도 발쎄 삼십 년이 되잖습네 까?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문, 아직꺼지도 두 나라입네다. 한국기 를 쓰고 한 국가를 쓰디만, 서로 다른 다른 사회 체제를 유지하고 있잖습네까? 지역 감정의 골이 워낙 깊어서, 기대했던 대로 경제적 통합이 이루어디디도 않구요." 송 대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4장 8편> "그래서 우리는 월면 기지도 따로 건설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류의 미래는 외계에 있고 달은 인류가 나가는 문이라고 합네다. 그러므로 여기에선 인류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인종이니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들은 뜻이 없다고 그럽네다. 그런 곳에 와서꺼지 둘로 나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입네가? 외계로 뻗어나 갈 때 도 우리 민족은 둘로 갈라져 나가야 됩네까?" 아무도 그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문제 들도 작디 않습네다. 정치적으로야 어떨디 몰라도, 약소한 민족인 우리가 월면 기지를 따로따로 건설해서 운영하는 것은 민족 력량의 낭비가 아닙네까? 솔직히 말씀드리문,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는 앞 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자립할 수 없습네다. 제가 보기엔, 장영실 기지도 적정 규모에 도달하려문 훨씬 더 커뎌야 합네다." 송 대령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의 얘기에 동의하는 모양 이었다. 대변인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동 씨가 잔잔한 눈길로 리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기지를 따로따로 세우디 말아야 했는데... 이미 일이 그 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디만, 그래도 한시 빨리 합쳐서... 그래서 협력하고 분업 체제를 갖추는 것이 옳다고 봅네다. 당돌한 말씀입 네다만, 그게 제 생각입네다." 송대령이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해야 되나? 이 형 말씀은 진정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우리 베이스에서도 그 동안 두 베이스 사이에 좀 더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얘 기들이 나왔고 그렇게 협력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도 있긴 있었습니 다. 솔직히 얘기하며, 일부 요원들 사이에선 두 기지를 하나로 통 합하는 길을 모색해보잔 얘기까지도 나왔습니다. 리 형의 솔직한 얘기를 듣게 되어서, 지정으로 반갑습니다. 여기 이 대변인이나 미 쓰 김도 그러리라고 생각하는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변인이 이내 대꾸했다. 김은 리를 응시하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주 델리키트한 문제니까, 신중하게 어프로치 해야 될 겁니다. 아래쪽에서 페이버리블한 분위기가 조성된 뒤에 얘기를 꺼내야지, 섣불리 먼저 여기서 얘기가 나오게 되면, 일이 꼬 일 수도 있으니까..." 송 대령이 리의 얼굴을 살폈다. 리는 잠시 송 대령이 한 말을 새겼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한 낯빛을 지었다. "부사령관님께서 하신 말씀 잘 알겠습네다. 좋은 말씀입네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좀 다릅네다. 정상적 상황에선 부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 옳갔지만, 지금은 정상적 상황이 아닙니 다. 이대로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우리는 영영 갈라지고 말겁네 다. 그래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선 비상 수단이라도 쓸 준비를 해야 합네다." 나는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리는 너무 순진하고 솔직했다. 딴 사람들도 아니고 남반부 사람들하고 딴 것도 아니고 기지를 합치네 마네 하는 얘기를 심상한 얘기처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을 송 대령은 아직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남반부 사람들 셋 모두 좋은 삶들로 보였고 박진동 씨는 믿을 만 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남반부 사람들을 믿었다가 낭패한 북반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제 4장 9편> "무슨 뜻입니까?" 송 대령이 말이 없자, 대변인이 조심스럽게 물 었다. "저는 우리가 합치겠다고 해도 아래쪽에서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봅네다." 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선뜻 허락할 사람들이라 문, 아직도 련방제를 고집하갔습네까?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합치고 서,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나서, 대처해나가야 합니다. 승인도 받 고 지원도 받고. 우리가 정짜로 통합을 원한다면, 그 길뿐입네다." 다시 쌓이기 시작한 무거운 침묵은 이번엔 김에 의해 깨어졌다. "리 선생님, 리 선생님께선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고 보십니까?" "안 될 리유레 뭐이 있갔습네까? 우리가 말로만 통합하자 하는게 아니고 정짜로 통합을 바란다문, 여기 달 나라에서 뉘레 나서서 너 희들 그리 못한다 막갔습네까? 아래서 막을 사람들을 올려보내갔습 네까?" 리의 얘기엔 막힘이 없었다. 김이 손을 내밀었다. "리 선생님처럼 명석하고 대담하게 생각하 시는 분을 만나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가 원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리가 싱긋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굵고 좀 검은 리의 손 안에 든 그녀의 손이 눈부실 만큼 의고 예뻤다. 질투 비슷한 감정이 내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 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나보다 훨씬 젊었고 분명히 더 매력적이었 다.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는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살그머 니 감쌌다가 놓았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제 생각을 마저 말씀드리갔습네다. 얼마 전에 이런 얘기를 읽었습네다. 이십 세기엔 높이뛰기를 할 때, 발 을 먼저 들어서 가로대를 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합네다. 그러다가 뉘레 머리 먼저 가로대를 넘는 방식을 고안해서 올림픽에서 우승했 답네다. 그 뒤론 모두 그렇게 머리 먼저 넘는 방식을 따르게 됐답 네다." 사람들을 한바퀴 둘러다본 다음, 그는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 조선 사람들은, 남반부나 북반부나, 장영실 기지 사람들 이나 김일성 기지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해야 합네다. 제가 보 기에 뎌 아래 사람들은 발이고 우리는 머리입네다. 발을 억지로 먼 저 끌어올려 가로대를 넘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머리 먼저 넘는 것 이 옳식네다. 먼저 합쳐야 할 것은 머리인 우리 월면 기지 요원들입 네다. 우리가 먼저 하나로 합치문, 뎌 아래 사람들도 하나가 될 겝 네다." 숨을 고른 다음, 리는 좀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령 그리 되디 않는다하더라도, 실패는 아닙네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 족이 외계로 뻗어나갈 때는 하나가 되어 뻗어나가리라는 사실입네 다." "좋은 얘기구만." 박진동 씨가 감심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 람들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나는 리가 자신의 솔직함을 수단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 에게 선택을 강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같이 솔직해든지, 아니면, 비겁하게 몸을 사리든지. 그의 작전이 성공해서, 에제 다른 사람들 도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 4장 10편>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술과 열성으로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살 폈다. 여전히 순진한 얼굴이었지만, 거기 어린 것은 세상물계를 모 르는 사람의 어리석은 낯빛은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밝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또렷한 낯빛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겐 아주 익숙한 낯빛이었다. 효영이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놓았다. 그래서 그를 상대한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같이 솔직해지든지, 아니 면, 비겁하게 몸을 사리든지. "저는 나이가 어립네다. 아직 서른 살도 채 못 됐습네다. 여기 올라온 지도 이제 석 달이 좀 넘었습네다. 그래서 제가 셀레나이트 무브먼트나 통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모두 박 선생님께서 가르 쳐주신 것들입네다." 리는 박진동 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박진동 씨는 아니라고 사양하거나 손을 젓거나 하지 않았다. 잔 잔한 볼웃음만 얼굴에 띠었다. "저는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몇 사람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긴 합네다만." 그는 나를 바라 보았다. 그의 힘이 실린 눈길에 밀려,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싱긋 웃고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감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제서야 나는 효영이 아버지의 기억이 아픔을 불러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두 해 만에 처음이었다. 문득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어 좀 서글퍼졌다. 내 머리 뒤쪽에 서 무슨 목소리가 속삭였다. 무엇이 끝나고 다른 무엇이 시작되었 다고. 나는 뜻 모를 한숨을 눌러 조용히 내쉬었다. "... 물러설 데가 없습네다." 리의 얘기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네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보다야 모든 면에서 여유가 있는 장영실 기지에서 좀 많이 양보해주셔야 무 슨 협상이 될 것 같습네다." "좋은 얘깁니다. 잘 알았습니다." 송 대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엔 우리가 아주 중요한 대화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자리 에서 리 형께서 하신 얘기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서 얘기를 계속해봅시다." "감사합네다. 그러문, 부사령관님, 저희들은 이만 일어서보갔습 네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리가 일어섰다.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담에 봅시다." 송 대령이 일어나서 리 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정말로 즐겁고 유익한 대화를 나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러면 리 형, 일 보시고 내 사무실로 좀 오세요." 박진동 씨가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녜. 알갔습네다." "그리고 리 녀사, 함께 오세요." "녜." 나는 급히 남은 술을 마시고 따라 일어섰다. "꼭 오셔야 합네다." 박진동 씨가 싱긋 웃었다. "리 녀사 해장 국 레시피를 내레 꼭 얻어야 되갔수다." <제 5장 1편> 도박장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지상의 객장과 지하의 도박장을 잇는 복도가 좁거나 어둑했던 것이 아니라, 도박장이 워낙 밝고 트인 것이었다. 모르는 새 문간에서 걸음이 멈 췄다.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이 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천정도 뜻밖으로 높아서, 내 마음까 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올라온 뒤론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주는 방을 본 것이었다. '달 나라에도 이런 곳이 다 있었 나?' 천정에 달린, 아름답게 장식된 샹들리에들이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한 태도로 풍요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사람들이 갖가지 놀이들에 열중하고 있었다. 낯선 말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 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많구먼." 나도 모르게 감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자동 계단을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올 때만 해도, 나는 도박장을 많아봤자 몇십 명쯤 될 사람들이 좀 침침한 불빛 아래 모여서 음밀 히 이상한 내기들을 하는 곳이려니 여겼었다. 환하고 탁트인 곳에서 무슨 축제를 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갖가 지 놀이들을 즐기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거세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왔다. "네." 내가 도박장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리 던 리명규가 대꾸했다. "녀느 때도 이 정도 사람들은 모입네다." "그래? 메치나 될까? 한 백오십 멩?"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 고 나는 이내 되물었다. "그보단 좀 많을 것 같은데요." 오른 손으로 천천히 턱을 쓰다듬 으면서, 그는 생각에 잠긴 눈길로 방안을 둘러다보았다. "한 삼백 멩은 될 것같습네다." "삼백 멩이나?" 고개를 흔들면서, 나는 다시 방안을 둘러나 보았 다. 그러고보니,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백 명은 쉽게 넘을 듯했다. "실은 그보다 더 될 겝네다." 그가 싱긋 웃었다. "더기 뒤쪽에 빙고 룸이 있는데, 거기도 당창 몇십 멩이 있습네다." "그래?" 어쩔 수 없이 감탄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안의 중심은 역시 가운데에 자리잡은 룰렛 테이블들이었다. 천 정 한가운데에 달린 아주 크고 호화로운 샹들리에 바로 아래에 조그 만 분수가 있었는데, 그 분수를 룰렛 테이블 네 개가 에워싸고 있었 다. 테이블마다 삼사십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이에 열중 하고 있었다. 서양 영화에서 본 도박장 풍경과 비슷하면서도 어쩐 지 좀 다르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달 나라에선 무엇보다도 물이 귀한데, 그 물을 장식용으로 쓴다는 사실이 풍요롭다는 느낌을 넘어 사치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주었 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그들이 거의 벌거벗었다는 점이었다. 남자들은 달리기 선수들처럼 운동 팬 티와 런닝 셔츠 차림이었다. 런링 셔츠조차 안 입은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녀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대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가리 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드러내려고 옷을 입은 듯했다. 문에 가까운 룰렛 테이블에서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선 여자 하나 는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팬티와 브라자만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 가운데까지 내려온 금발과 희고 풍만한 엉덩이가 묘하게 조 화를 이루어서, 그러나 그녀의 차림은 음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놀이에 열중한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풋풋해 보였다. <제 5장 2편> 나는 슬그머니 내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짧은 반바지와 소매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런 차림은 월면 기지들 에선 일반적 차림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방안의 분위기에 어울 리지 않고 남의 눈에 이내 뜨일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나 그것은 그냥 해본 소리였다. 설 령 내가 이 도박장에선 그런 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차릴 옷이 내겐 없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 보다도, 이곳엔 백화점 같은 곳이 없었다. 물론 전산기로 지구의 백화점들에 직접 주문할 수 있었지만, 물건 이 이곳까지 올라오는 데는 여러날이 걸렸다. 키가 훌쩍 큰 녀자가 우리 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주 짧은 슬립만을 입고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길고 검은 다 리가 희고 부드러운 슬립과 대조되어 같은 녀자의 눈에도 무척 매혹 적이었다. 나는 며칠 전에 김인구 박사와 량정애 박사 사이에 있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부엌 옆에 놓인 커피 기계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김 박사가 웃으면서 량 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요사이 녀자들은 속옷을 겉에 입습네까?" 그러자 옅 은 하늘빛 슬립을 걸친 량 박사가 정색하고 대꾸했다, "남자들이 그 걸 도하하니끼니, 우리레 입디요. 김 박사님은 그게 싫습네까? 이어 그녀는 좀 멀쓱해진 김 박사에게 녀자 옷에서 유행은 속옷들 이 계속 겉옷들로 바뀌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녀 얘기에 따 르면, 그런 유행이 나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현대에선 사람들이 집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월면 기지에선 시간의 대부분을 기지 안에서 보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전엔 침실에서나 입었던 속옷들을 태연히 걸치고 다니게 되었고 마침내 마지막까지 감춰야 할 옷인 팬티가 차림의 중심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런 현상은 이미 20세기에 나와서, 짧은 치마를 입는 정구 나 스케이팅과 같은 경기에선 녀자 선수들의 차림의 초점은 그때 이 미 팬티였다고 했다. 곁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량 박 사의 고운 슬립에 자꾸 눈길이 끌렸었다. 그녀는 남반부의 백화점 들에서 주문한 좋은 옷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데 있나? 최 동무하고 조 동무..." 리가 무슨 카드 놀이가 벌어진 테이블 쪽으로 가는 흑인 녀자를 따 라가던 눈길을 좀 아쉽게 거두어들였다. "음... 더기 슬로트 머신 이 있는 데 있습네다. 누님, 가보십세다." "그러디." 우리는 방의 왼쪽으로 향했다. 방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놀이에 열중한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가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낮은 웅성 거림 속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들, 긴 한숨과 기쁨을 참지 못하는 듯한 웃음이 내 귀로 끊임없이 밀려왔다. 문득 가슴이 거세게 뛰면서 속이 좀 니글거렸다. 지금 방안에서 벌어지는 놀이들에 대해서 나는 혐오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도박은 물론 옳지 못한 짓이었지만, 그것엔 금지된 것들이 지니는 무슨 매력이 어렸다. 그리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경멸과 부러움을 함께 느꼈다. <제 5장 3편> 방의 왼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선 녀자 로봇이 둘러 앉은 사람들 앞에 카드를 나누어놓고 있었다. 그 로봇은 객장의 레이디 오렉스 처럼 옛날 서양의 귀족 부인들이 입었음직한 보라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둘러다보니, 테이블마다 하나씩 자리잡은 로봇들은 거의 다 녀자들이었는데, 차림이 비슷했다. `흠.' 나는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진짜 녀자들은 될 수 있는 대루 자기 몸을 많이 보이려 애쓰구. 감출 게 없을 녀자 로봇들은 되도록이면 많이 감추려 하구...' "누님, 더기. 더기 이시요." 리가 가리킨 곳은 놀이 기계들이 벽을 따라 늘어선 곳이었다. "아, 그래?" 나는 최옥순과 조해명을 찾아보았다. 놀이 기계들은 적어도 삼십 대는 되어보였는데, 모두 사람이 차지 하고 있었다. 최와 조는 가운데 쯤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하이, 캡틴." 리가 조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조는 기계 오른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기고서 고개를 돌려 흘긋 리를 올려다보았다. 이어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리에게 고개를 끄덕 여보이고서 다시 기계를 향했다. 기계의 얼굴 노릇을 하는 화면에 여러 가지 그림들이 바삐 스쳤 다. 마침내 그 그림들이 멈추면서 자그만 종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는 왼쪽에 놓인 조그만 바구니에서 은빛 동전을 하나 집더니 바로 앞에 난 구멍에 집어넣었다. 나는 최에게로 다가갔다. 우리가 온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녀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막 멈춘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기계적인 손길 로 동전을 집어서 구멍으로 가져갔다. 마음이 좀 상해서,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최 소좌 동무, 그래 재미레 어떻습네까?" 그녀는 동전이 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더니, 속이 빈 듯한 웃음을 얼굴에 잠깐 떠올렸다. 그러고선 다시 고래를 바로하고 손잡이를 익숙한 솜씨로 잡아당겼 다. 기계의 화면에 어지러운 그림들이 지나갔다. 마침내 그림들이 왼 쪽에서부터 멈췄다. 이어 꽤 큰 종소리가 나더니, 어쩐지 귀에 익 은 가락 한토막이 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화면에 복숭아로 보이는 과일 셋이 한 줄로 나란히 선 것을 보았다. 조금 전 조해명의 화면엔 서로 다른 그림들이 나 왔던 것을 보면, 같은 그림들이 한 줄로 늘어선 것엔 무슨 뜻이 있 을 듯했다. 문득 기계 속에서 동전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최는 몸을 굽혀 기계 아래쪽에서 조그만 바구니를 꺼냈다. 그 안에 동전 들이 수북히 들어있었다.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 위에 다른 것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 환한 꽃 송이로 피어있었다. 그녀의 그런 낯빛을 보자, 문득 차가운 기운이 내 등골을 타고 흘 러내렸다. 그것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간호 군관인 그녀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빛이었다. 그것은... 그렇게 속이 빈 듯한 낯빛 을 본 기억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 5장 4편> 그 기억을 외면한 채 눌러버리고, 나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 났다. 그리고는 좀 쓸쓸한 마음으로 방 안을 둘러다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선 세상과는 다른, 무슨 이상한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겐 이 방안이 지금 존 재하는 세계의 전부고 놀이에서 이기는 것이 삶의 목적인 듯했다. "덜깐이 망헐래문, 배캐젖 당시레 승헌다더니. 쯧쯧."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증조 클마니께서 늘 하시던 것처럼 혀까 지 차놓고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도 내가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북반부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주의 사회입네다. 우리는 모 두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네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합 네다. 이 기지는 인민들의 정성 어린 세금으로 건설되었습네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선 모든 물자를 절약하고 언제나 검소하게 살아야 합네다." 그래서 이제 겨우 틀이 잡히기 시작한 우리 기지 형편으론 경제 깜빠니야라도 벌여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도박에 미쳐 정신이 없는 두 사람을 보니, 정말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소장이 정치 학습 시간마다 되풀이해서 강조한 것처럼, 월면 기지의 요원들은 북반부 사회를 대표하는 정예들로서 온 세계 사람 들에게, 특히 남반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보인다는 위 대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타락한 자본주의의 상징인 도박에 깊이 빠져버리 면, 이 세상에 단 하나남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인 우리 북반부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본 주의가 사회주의 전사들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길은 여럿이었다. 다행히 최는 내 얘기를 듣지 못한 듯했다. 다시 동전을 구멍에 집어넣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쓸쓸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으로 나는 방안을 둘러다보았다. 건너 편 벽 가까이에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차리고 검은 모자를 한 손에 든 로봇이 서 있었다. 리가 <닥터 위저드>라고 한 로봇인 모양이었 다. 어쩐지 그 로봇이 방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실감있게 보였다. 쓸쓸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을 아직 마음 한구석에 어린 증조 클마 니의 기억이 달래주었다. 그녀는 늘 내가 자기처럼 사내번디기로 생겨서 큰일이라고 했었다. 요사이야 얌전한 척 지내지만, 어렸을 때는, 나는 사내 아이처럼 거친 에미나이로 소문이 났었다. 최의 자리로부터 두 자리 떨어진 곳에서 놀이하던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나이가 꽤 든, 좀 가무잡잡한 백인 사내였다. 혀로 마 른 입술을 향으면서, 기계의 화면에 나온, 움직이지 않는 그림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깡마른 옆얼굴에 아쉬움이 짙게 어렸다. 아마도 돈을 다 잃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의 낯빛엔 후회나 분 노와 같은 감정은 없었다. 어깨를 슬쩍 추스리더니, 기계에서 물러 나 스적스적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그것, 참. 도대체 어드케 된 거야?' 속으로 혀를 차면서, 나는 그의 좀 지친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 5장 5편> "누님," 어느 사이엔가 곁으로 다가온 리가 부드러운 소리로 불 렀다. "누님도 한번 해보시라요." "내가," 그의 느닷없는 제안에 놀라기도 했지만, 내가 도박을 한 다는 생각이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무슨..." "한번만 해보시라요. 재미 있습네다." 내 허리에 슬쩍 팔을 두 르면서, 리가 은근한 어조로 권했다. "난 이런 것 할 줄 모름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무엇에 끌린 것처럼, 눈길은 빈 자리로 갔다. 두려움이 문득 가슴을 움켜쥐었 다. 그러나 그 빈 자리는 벌써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젊은 동양 녀자였는데, 눈치를 보니, 빈 자리가 나기를 꽤 오래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저그나, 이제 가보는 게 도흘 것 같은데. 박진동 씨레 우릴 기 다리실 디도 모르니끼니, 우리 먼저..." "네. 그러문..." 리는 선뜻 조에게로 다가갔다. "갭틴."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조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 론 동전을 구멍에 넣으면서. "조 동무, 그러문 우린 박진동 선생 사무실에 가 있갔시요. 우리보 다 일찍 끝나문, 최 소좌 동무랑 그리로 오시라요." "알았시요." 마음이 조급한 듯, 손으로 기계의 손잡이를 더듬어 찾으면서, 조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내 이따가..." 도박장에서 나오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주 위험한 유혹들 이 사람의 마음을 노리는 곳에서 빠져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런 유혹들이 어느 사이엔가 손길을 뻗쳐 내 몸을 붙잡은 것 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특히 룰렛 테이블의 그 백인 녀자처럼 하고 싶었다. 대담하 게 몸을 드러낸 옷을 입고 뭇 사내들의 욕정이 짙게 묻은 눈길을 드 러난 살에 받으면서 태연하게 큰 돈을 걸고 싶었다. 내 속에 숨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런 욕망이 두려워져서, 나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내레 남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없었던 것 아니었디.' 내 가 나 자신을 뭐 대단한 미인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바이코누르 공 항에서 만난 사내들의 눈길에서 나는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백인들 이나 흑인들에게도 매력이 없지 않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 도박장에 모인 녀자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뜻밖에도 적다는 것에 저윽이 안심이 된 침이기도 했다. 나올 때 보니, 룰렛 테이블의 그 녀자도 뒷모습과는 달리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동양 사람들 대여섯이 자동계단에서 내려섰다. 일본 사람들로 보 였다. 내가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에 대해 잘 알아서 그들이 일본 사람들임을 이내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몸짓과 낯빛에 차 분한 자신감이 어린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달 나라의 동양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차분한 자신감을 보이는 이 들은 일본 사람들뿐이었다. 때론 남반부 사람들도 호기를 부렸지 만, 역시 일본 사람들처럼 차분한 그래서 더욱 눈에 뜨이는 자신감 을 보이진 못했다. 그런 자신감은 아주 강대하고 넉넉한 나라의 시민들만이 지닐 수 있었다. 개인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수가 적은 우 리 북반부 사람들이야 물론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힘이 작 고 돈이 없는 나라의 시민들은 어디를 가나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 지만, 드래코 태번처럼 사람들이 돈을 쓰러 오는 곳에선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제 5장 6편> '우린 차라리 이런 데 오지 않는 게 나을디도 모르갔다. 괜히 이 런 데 와서 이리 속이 상하는 것보다...' 나는 적잖이 속이 상해서 스스로에게 일렀다. 국경을 넘은 뒤로 나는 줄곧 내가 가난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의 시민임을 떠올려 야만 했었다. 그 사람들은 건너편 벽에 선 환전기에서 신용 카드로 도박에 쓰는 동전을 사기 시작했다. 뒤쪽에 선 사람 둘이 나누는 얘기가 내 추 축이 옳았음을 말해주었다. 일본 말이 분명한 말들이 가끔 들려왔 다. 흘긋 살피니, 그들이 집어든 바구니 속에 든 동전들은 모두 파란 빛깔이었다. "파란 동전은 백 셀몬짜리입네다." 내 눈길이 간 곳을 보고, 리 가 설명했다. "백 셀몬이라. 흠. 그러문 아까 그 은빛 동전들은?" "그것들은 일 셀몬입네다." "그런데 왜 동전을 바꾸느라 야단이디? 직접 신용카드를 쓰도록 하면 편리할 텐데. 딴 기곈 몰라도 슬로트 머신인가 하는 것 신용 카드를 한번 꽂아두면, 할때마다 동전을 넣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 아도 될 텐데..." 그 물음을 입밖에 내는 순간, 답이 떠올랐다. "그리 되문, 도박하는 재미레 많이 줄어들라나?" 리가 싱긋 웃었다. "네. 그렇다고 합데다. 동전을 넣는 재미가 따로 있긴 이시요. 룰렛 테이블에선 말할 것도 없고." "저그나도 룰렛을 해봤슴마?" "네. 딱 한 번. 박 선생님을 따라서. 그건 돈이 너무 많이들어 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일본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라 도박장 쪽을 돌아 다보면서, 나는 슬쩍 물었다. "데 안에 있는 사람들, 두 사람 다 사람이 갑자기 좀 변한 것 같던데... 도박하러 오면, 다 그런가?" "네, 누님." 리가 진지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좀 겸연 쩍은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 "도박할 땐, 다른 것이... 맘 속에 들어오는 게 없습네다, 게임말곤..." "그 슬로트 머신인가 하는 놀이에 뭐이 그리 대단한 것이 있슴마? 그저 동전을 기계 속에 넣고 손잡이를 당기는 것인데?" 나는 고개 를 저었다. "난 도무지 리해할 수 없구먼." 그의 웃음이 좀 자연스러워졌다. "누님, 그래도 그 슬로트 머신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도박이랍네다."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정말입네다." 그가 다시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박 선생님한테 들은 니야긴데, 한번은 학자들이 실험을 했답네 다. 도박들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재미있는가. 온갖 게임들이 다 있는 도박장에서 갑자기 누가 외쳤답네다. 불이야. 그러자 사람들이 도박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네다. 누님, 무슨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마지막꺼지 남았갔습네까?" "그 슬로트 머신을 하던 사람들이 마지막꺼지 남았단 니야기야?" "네. 정짜로 이상한 니야깁네다. 스로트 머신은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게임이거든요. 코인을 넣고서 레버를 당기면 되니까요. 머 리를 쓸 일은 정짜로 하나도 없거든요. 그리고 그걸 해선, 누구도 돈을 딸 수가 없습네다. 카드 게임 같 은 것들은, 아주 능숙한 사람들이라면, 좀 딸 수도 있답네다. 그러 나 슬로트 머신을 해선, 도저히...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그설 <원 암드 밴딧>이라고 합네다. <외팔이 강도>란 의미디요. 그런데도 그게 제일 인기가 높습네다." <제 5장 7편> "그래?" 정짜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구먼. 그러문..." 나는 자동 계단 위로 올라섰다. "그 사람들 어드케 하디? 돈을 다 잃으 문?" "글쎄요." 한 계단 아래에 선 리가 슬쩍 도박장 쪽을 돌아다보았 다. "뭐 큰 돈을 잃디는 않을 겝네다. 슬로트 머신을 해서 돈을 딸 수야 없디만, 도로시 얘기론 여기 슬로트 머신의 승률이 라스베 가스보다 낫다고 합네다. 재수가 좋으면, 잭폿이 나오디 않아도, 돈을 딸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도 가진 것만 잃갔디 요. 게임을 하다가 돈을 잃은 사람에겐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여기선 철칙이니까요." 리는 나를 객장 옆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문에 영어로 뭐 라고 잔뜩 씌어 있었다. 리가 손가락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두드려도, 역시 반응이 없었다. "박 선생님이 아직 돌아오시디 않은 모양인데..." 잠시 망서리던 리가 문을 조금 열더니 나를 돌아다보았다. "누님,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십세다." "그러디." 도박장에서 온 참이라, 방은 좀 어둑하고 좁아 보였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러나 방은 꽤 넓었다. 우리는 문 옆 벽에 기대어 놓인 소파에 앉았다. 나는 좀 가라앉은 마음으로 방안을 둘러다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방이 어둑하게 느껴진 것은 방이 실제로 어둑해서라기보단 간접 조 명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등불은 모두 불빛이 먼저 식물 위에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옆 벽을 따라 놓인 긴 어항에선 형광등을 받은 수초들이 너울거리고 있 었고 벽마다 울콩으로 보이는 덩굴 풀들이 덮고 있었다. 건너편 벽엔 옛날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낯익은 사진이었 다. 바이코누르 공항 대합실에 걸렸던 치올코프스키의 사진을 줄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 사진 아래엔 영어로 씌어 있을 터였다: <지구는 마음 의 요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까지나 요람에서 살수는 없다.> "방이 꽤 넓은데." 낯선 방에 들어와서, 그것도 주인이 없는 사 이에 들어와서, 아무래도 좀 편치 못한 마음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별 뜻 없는 말을 입 밖에 냈다. "월면공화국 림시 정부의 청사니끼니,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아 니 되갔습네까?" 야릇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리면서, 리가 대꾸했 다. "더기 문에 붙은 영어 글자들이 그 니야긴가? 여기가 월면공화국 림시 정부의 청사입네다, 하는 니야기?" "네. 맨 윗 줄에 씌인 것이 <월면공화국 림시 정부>입네다. 다 음 줄에 씌인 것은 <월면 은행>이고." 싱긋 웃으면서, 그는 건너편 오른쪽 구석에 선 기계를 가리켰다. "데것이 바로 셀몬으로 신용 카드를 발행하는 <월면 은행>입네다." 좀 어이가 없어서,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얘기를 알아듣는 것처럼, 이마에 파란 파일럿 램프를 켠 그 기계는 으젓하 게 서 있었다. "저래봬도, 누님, 아래쪽에서 한다하는 은행들과 정식으로 관계를 맺고 거래한답네다." "흠. 하긴 요새 겉모양만 보고서 판단하다간..." <제 5장 8편> "맨 아랫 줄에 씌어진 것은 <셀레나잇 타이드>입네다. 바로 더기 입네다." 리가 가리킨 쪽엔 큰 서가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탁 상용 전산기가 놓여 있었고 그 둘레에 전산용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방안을 다시 둘러다보았다. 방은 넓었 고 목적이 뚜렷해보이는 기계들이 여럿 있었다. 화초들과 덩굴 풀 들이 자라서, 월면 기지의 거친 분위기를 많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특히 박진동 씨가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오른쪽 구석은 꽤나 아늑 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래도 방안의 분위기는 무엇이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했다. 빠진 것은 생기인지도 몰랐다. 굳은 믿음인지 도 몰랐다. 하여튼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누님, 어떻습네까, 방이?" 리가 내 낯빛을 살폈다. "글쎄..." 나는 내가 받은 느낌을 정리했다. "뭐라 해야 되나? 좀 유치하다고 해야 하나? 유치한 건 아니고 어쩐지 어리다? 뭐 하여튼 그런 건데. 이 모든 게," 나는 손으로 방안을 가리켰다. "어린애들이 모여서 하는 놀이 같이 느껴디는구먼. 이 방을 아직 세워디디도 않은 월면공화국 림시 정부의 청사라고 하는 거나. 저 환전 기계를 월면 은행이라고 하는 거나. 또 뭐더라? 응, 여기 드 래코 태번에서 파는 술에 세금을 매기거나. 그런 게 모두 어린애들 이 어른들이 하는 짓들을 보고 흉내내는 것만 같아." 그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코 태번이 무슨 소설에 나오는 술집 이름이랬디?" "네." "술집 이름을 그렇게 단 것이나 아이들이 닒는 니야기 책에 나오 는 인물들을 본따서 로봇들을 만든 것은 그런데로 리해가 되디. 재 미있다고 할 수도 있갔디. 어릴 적에 닒은 책에 나온 로봇들을 만 나문, 정신 건강에도 도흐다니, 더 할 말이 없디. 그러나 이 방을 림시 정부청사라고 하는 것 같은 일은 좀..." 해놓고 보니, 너무 심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는 얘기였다. "내레 뭐 그런 것에 대해 잘 아는 녀잔 아니니끼닌..." 리는 여전히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뜻밖에 도 싱긋 웃었다. "누님다운 니야깁네다. 네, 누님 니야기가 맞습 네다. 이 모든 게 어떤 뜻에선 어린애들이 하는 짓들이디요." 그는 팔을 휘둘러 방 안에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실은 저도 한 땐 그리 생각했더랬습네다. 어떤 면에선 지금도 그리 생각합네다." "아, 저그나도 그리 생각함메?" "네. 실은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도 있습네다. 셀레 나이트 무브먼트를 만든 발기인들 가운데 하나이자 셀레나잇 타이드 의 고정 집필자이신 분인데. 잠깐만. 누님, 목이 마르시디요?" 그가 일어나서 그가 조금 전 에 셀레나잇 타이드의 사무실이라고 가리킨 곳으로 다가갔다. "커피? 아니문, 콜라?" 벽에 기대어 세워진 음료수 기계 앞에서 그가 물었다. "커피." "오우케이." 그가 이내 합성수지 잔들을 들고 왔다. <제 5장 9편> 커피를 마시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내레 그런 니야기를 하자, 그 분이, 스기다 소요헤이란 분이신데, 그 분이 그럽데다. <암만, 어린애 같은 짓들이디. 왜냐하면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 들은 모두 어린애들이니끼니. 어린애들이 아니라문, 왜 여기꺼지 올라왔겠소? 자기가 태어났고 뭐니뭐니해도 여기보다야 훨씬 살기 좋은 지구를 버리고. 여기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어른들이 된 뒤에도 어 찌어찌해서 어린애로 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요. 그래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문, 우주의 신비에 마음이 황홀해 디고 별 나라를 탐험하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디고. 탐험가들은 마음 속으론 모두 어린애들이요. 어른들은 안전한 집 에 남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법이디요.> 그런 니야기를 하십데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내 얼굴을 살폈다.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일본 사람의 얘기가 옳다고 느꼈다. 그의 얘기에선 늦은 봄철의 포근한 밤에 부는 바 람의 냄새가 났다. 향긋한 꽃 냄새와 풋풋한 풀 냄새가. 어렸을 적에 나는 즐겨 강가로 나가서 압록강 물을 바라보곤 했었 다. 그리고 늘 강물을 따라 먼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문득 포근해진 가슴으로 나는 리를 돌아다보았다. `저그나, 당신 니야기에서도 그런 냄새가 나요. 늦은 봄철의 포근한 밤에 부는 바 람의 냄새가...' 그러고보면, 리는 아직도 마음 속으론 어린애였다. 가슴에 찬 감 정을 제대로 나타낼 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 다. "그리고 스기다씨는 이런 말씀도 했습네다. <우주 여행을 실현한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나 우주 비행사들이나, 거의 모두 어릴 때 먼 세상의 니야기를 듣고 감심한 사람들입네다. 그런 니야기를 책에서 닒었거나 영화로 보고서, 그런 세상으로 가려 는 꿈을 키웠던 사람들입네다. 그래서 레이 브랫베리는 버로즈를 우주 시대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주장했습네다.> 버로즈는 화성에 대해서 많은 니야기들을 쓴 소설간데... 아, 누 님, 누님도 타잔 영화를 보셨디요?" "응. 몇번 보았디." "그 타잔 니야기를 쓴 사람이 바로 버로즈입네다." "아, 그래?" "스기다 씨는 건축가로 원래 일본 디즈니랜드에서 일하셨는데, 회 사에서 은퇴하자, 부인과 함께 이리로 올라오셨답네다. 지금은 여 기에 디즈니랜드를 만들 생각이라고 하십데다. 여기 달 나라에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 설계를 거의 다 끝내고 자기가 다니 던 회사와 실행 계획을 협의한다는데..." 그는 말을 멈추고 내 얼 굴을 살폈다. "누님." "응?" "난 스기다 씨처럼 큰 일을 할 순 없습네다. 난 그저 여기서 태 어날 아이들을 위해 나무를 키우고 싶습네다. 그 아이들이 저 아래 에서 태어난 아이들처럼 나무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나무 그늘에서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나무하고 니야기하고 클 수 있게 하고 싶습네다." 문득 잠긴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누님, 나는 여기서 태어날 내 아이들이 나무를 알고 사랑하도록 나무를 키울랍네다." 리가 한 말의 뜻보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뜻이 먼저 내게 닿았다. 즐거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의 파도가 내 가슴을 덮쳤다. 나는 흘 긋 그의 얼굴을 살폈다. 뜨거운 무엇을 담은 거센 눈길이 내 눈길을 맞았다. 그 눈길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든 잔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누님."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의 더운 숨결을 목에 느끼면서, 나는 아득해지는 마음으로 그의 거센 고백을 들었다. "누님, 난, 난 우리 아이들이 나무를 사랑하도록 나무를 심을랍네 다." <제 6장 1편> "김 동무, 여기..." 나는 부엌의 오른쪽 구석에 수상기를 설치 하는 김권식의 옆 자리에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 좀 들구서 하시 라요." "아, 네. 이걸 마저 하구서 들갔시요." 수상기의 다이얼을 만지 면서, 김이 대꾸했다. "다 됐시요." "식기 전에 날래 드시라요. 커피레 식으문, 맛이..." "조금만 더 하문, 되는데." 나를 돌아다보며 얼굴에 웃음을 슬쩍 올리더니, 그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서 잔을 집어들었다. 그러곤 손에 든 잔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그가 든 잔은 사기였다. 이곳에서 쓰이는 그릇들은 모두 가볍고 깨지지 않는 합성수지 그릇들이어서, 사기 그릇은 보기 힘든 물건이 었다. 사기 그릇은 물론 보기 좋고 쓰기도 좋았지만, 너무 무겁고 깨지 기 쉬워서, 운임이 물건 값보다 몇십 배 비싼 달 나라에선 대단한 사치였다. 그래서 사기 다구들은 이리로 올라올 때 내가 큰마음 먹 고서 꾸려온 물건이었다. "그 잔은 사령관님께서 쓰시는 잔입네다." 나는 김이 물건을 제 대로 알아본다는 것이 반가웠다. "아, 그렇습네까? 이거 영광입네다." 김이 활짝 웃으면서 대꾸 했다. 나는 그의 얼굴울 날카롭게 살폈다, 그의 대꾸와 웃음에 혹시 빈 정거리는 뜻이 섞이지 않았나 해서. 다른 기지들의 서양 사람들에 게서 옮았는지, 요즈음엔 우리 기지 요원들도 전과는 달리 웃사람들 에 대해서 불공스러운 태도를 자주 보였다. 지어는 사령관님께 대해서도 얘기를 함부로 하는 경향까지 나타나 고 있었다. 다행히 김의 태도는 진지했다. "실은 그 잔은 사령관님 부인께서 손수 구하신 겁네다. 전에 사 령관님께서 유럽연방의 무관으로 나가셨을 때. 영국에서 만들어딘 것인데, 정짜로 도티요?" "네. 이 잔이 영국에서 만들어딘 것입네까?" 김이 들고 있던 잔 을 유심히 살폈다. 혼자 평양에 남으셔서 사령관님으로부터 올라오란 얘기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실 사모님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서, 나는 뒤늦게야 대꾸했다. "네. 웨지우드라구 하는데, 아주 유명하답네다. 그런 사기 그릇 들은 영국이 세계에서 최고랍네다. 그래서 사령관님 부인께선 아주 검소하신데도, 내레 딴 것은 다 그만두고 사기 그릇만 눈 딱감고 한 벌을 마련했다, 하셨습네다." "아, 그러셨습네까?"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리 동무, 이 잔에 마시니끼니, 커피 맛이 더 도흔 것 같습네다." "그렇디요? 나도 푸라스틱 잔에다가 마시문, 영 차 맛이 나딜 않 습데다." 김의 웃음 띤 얼굴에 웃음으로 대꾸하고서, 나는 다시 그 릇을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 동무,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디 않갔습네까, 카메라가 새로 설치된 것을 알게 되문?"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알 리 없습네다. 카메라 를 따로 설치한 것이 아닙네다. 중앙 통제 시스템에서 채널을 하나 뽑아 여기 모니터에 련결시킨 것뿐이니끼니, 리 동무레 일부러 알리 디 않으문, 알 사람은 없을 겝네다." 그가 싱긋 웃었다. "아, 그렇습네까?" 나는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제 6장 2편> 김은 체육관을 비추는 수상기를 부엌에 설치하는 참이었다. 내가 체육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필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기지에서 무슨 모임이 있게 되면, 기지에서 가장 큰 방인 체육관이 으레 회의 실 노릇을 했다. 회의는 대개 부사령관 최철웅 대좌가 주재했지만, 때론 사령관님 께서도 참석하셨다. 기지에선 마실 만한 것이 커피 기계에서 뽑은 커피뿐이었고 사령관님께선 커피를 들지 않으셨으므로, 사령관님께 서 모임에 참석하시면, 나는 녹차를 끓여 내갔다. 모두 모여도 스무 명 남짓한 판이라, 사령관님께만 차를 드리기가 아무래도 좀 뭣했다. 그래서 모임이 열리면, 으레 나는 최옥순 소 좌의 도움을 받아 모두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자 사 령관님께선 반가워하시면서 우리 둘을 칭찬해주셨다. 문제는 부엌에서 차를 끓이면 언제 차를 내가야 좋을지 알기 어렵 다는 점이었다. 나로선 모두 심각하게 토론하는 데 불쑥 차를 내가 고 싶진 않았다. 모임에서 나온 얘기들을 내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도 물론 문 제였다. 그래서 그저께 김에게 무슨 수가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는 선선히 부엌에 수상기를 설치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전자 분 야의 전문가였다. "그런데, 김 동무." 그릇을 씻던 손길을 멈추고서, 나는 그를 돌 아다보았다. "네?" 내 허벅지에 주었던 눈길을 황급히 거두면서,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고장난 통신 위성을 고티러 김 동무레 지구 궤도루 올라간다는 니야기가 있습데다." "네. 실은 모레 출발합네다. 장영실 기지루. 그래서 글페 아침 에 지구 궤도루 올라갈 겁네다." 며칠 전에 북반부의 통신 위성이 고장났다. 그러자 그 위성의 관 리를 맡은 남반부 회사에서 그것을 수리하는 임무에 우리 요원 한 사람을 넣겠다고 제안해온 것이었다. "메칠이나 걸립네까?" "글쎄요. 길어도 사흘 안에 끝날 겁네다." "힘듭네까? 고장을 고티는 것말입네다." "아닙네다. 올라가서 확인해봐야 확실한 걸 알겠디만, 지금 생각 으룬 고장난 부품 두세 개를 바꿔 끼우면, 될 겁네다. 어차피 내레 할 일이야, 어깨 너머로 구경하면서 배우는 것이니끼니..." 그가 스스로를 낮추는 웃음과 함께 어깨를 슬쩍 추스렸다. 그리곤 내 다 리를 슬쩍 훔쳐보았다. 드래코 태번에서 만난 녀자들의 차림에 자극을 받아, 나는 어저께 반바지를 아주 짧게 줄였다. 오늘 그것을 입었더니, 만나는 사람마 다 보기 좋다고 한마디씩 했다. "내 생각엔 우리 기지의 정예 요원이 남반부 회사의 직원들보다 나으면 나았디 못할 리는 없을 것 같습네다." 나는 정색하고 힘 주 어 말했다. 김이 한 얘기는 물론 겸손에서 나온 얘기였다. 그는 우주 공간에 서의 선외 활동을 익히기 위해 로씨야에 파견되었던 우리 요원 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나 내 몸을 훑는 그의 눈길에선 갈 증이 느껴졌다. <제 6장 3편> "지구 궤도 위성도 여기서 올라가서 고티는 것이 싸다고 합데다. 지구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내 다리에 느껴지는 그이 눈길을 모른 척하면서, 나는 새로운 화제를 찾아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다스럽단 얘기 를 들어본 적이 없는 터인데, 몸도 마음도 공중에 뜬 것처럼 느껴져 서 앞뒤를 잴 수가 없었다. 우습강스럽다고 어떤 낯익은 목소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이고 있었지만, 내 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올라가는 것 의 륙분지일밖에 들디 않는다문서요?" "네. 정확하게 니야기하문, 이십분지일만큼 듭니다, 여기서 올라 가는 비용이 지구에서 올라가는 비용의. 중력은 륙분지일이디만, 비용은 이십분지일밖에 되디 않습네다." "아, 그렇습네까?" "그리고 재진입 비용도 있으니끼니, 실은 더 작게 들디요. 지구 로 재진입할 때 생기는 열을 막으려면, 비용이 많이 듭네다." "아, 그렇겠습네다." 나는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 웃음을 지어보 였다. 서투른 지식을 보이다가 들통이 난 것은 마음에 별로 거리끼지 않 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지닌 공학이나 물리학 지식이 아니라 녀자로서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매력을 김에게서 다시 확인한 참이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엔 불안한 마음이 한 점 잿빛 구름처럼 걸려 있 었다. 한 사내에게 마음을 허락해놓고서 다른 사내들에게 내 몸매 를 과시한다는 것이 어쩐지 뭣했다. "하긴 비용만 따딘다문, 수리하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네다. 지구 에서 위성을 새로 만들어서 쏘아올리문, 데일 간단합네다. 실은 이 십일세기 초꺼지만 해도, 그리 했드랬습네다. 그런데 그리 하다보 니끼니, 지구 궤도가 쓰레기장이 되어버렸습네다. 그래서 요즈음은 모두 고장난 위성은 고텨 쓰구 쓸 수 없는 것들은 갖구 내려옵네 다." 그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지구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던 것 과 똑 같디요. 전엔 쓰레기를 빈땅에다 파묻었는데, 요즈음은 모두 쓰레기를 완전히 처리하잖습네까? 단기적으로 보문, 파묻는 게 리 득이디만, 장기적으로 보문, 처리하는 게 리득이라요." "그렇다구 합데다. 뉘레 그러는데, 멀디 않아서, 여기도 쓰레기 문제가 심각해딘답네다." 나는 내가 김과의 얘기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런 기술적 문제 들에 대해 흥미를 갖게된 것이었다. 물론 리명규 덕분일 터였다. "커피 잘 마셨습네다." 빈 잔을 세척대에 내려놓고, 김은 다시 수상기 앞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수상기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가 서둘러 다이알을 만져 서 소리를 낮췄다. "...할 순 없습네다. 그러나 이 문제도 결국엔 비용과 이득을 비교하는 작업으로 귀착됩네다..." 나는 그릇을 씻던 손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김인구 박사의 목소리였다. "자, 이제 다 됐시요." 김권식이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그에게 웃음으로 치하하고 화면을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연단에 선 사람은 김 박사였다. 카메라가 체육관 의 천정 한구석에 설치되어서, 화면에 나온 그림은 좀 낯설었다. "...물론 그런 비용 속엔 감압에서 나올 의학적 문제들도 들어가 야 될 것입네다." 그림은 낯설어도, 목소리는 또렷하게 나왔다. "수고 많이 했습네다." 나는 수상기 앞으로 다가갔다. "이젠 여 기 있어도, 무슨 니야기들이 나오는디 알갔구나." <제 6장 4편> "리 동무, 이 모니터는 텔레비전하고 똑 같습네다. 이것이 전원 스위칩네다. 이것이 음량 조절 스위치고. 나머지 것들은 만딜 필 요가 없습네다." "네." "그러문 내레 가보갔시요. 무슨 문제레 생기문, 알려 주시라요." 그의 눈길이 다시 내 허벅지에 머물렀다. 그가 힘들게 눈길을 떼 어 내고서 몸을 돌렸다. "네. 그리 하갔시요. 감사합네다." 그의 눈길이 머문 살에 남 은 간지러운 느낌을 이젠 의식적으로 즐기면서, 나는 그의 등에 대 고 좀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감압의 범위가 약 백분지이 가량 되므로, 이번 감압이 우리 몸에 미칠 영향은 전무합네다." 오늘 모임은 기지의 기압을 낮추는 일을 토의하기 위해 열렸다. 감압 계획은 이미 며칠 전부터 알림판을 통해 자세히 설명되었고 오 늘 모임은 다음 주부터 실시되는 감압에 따르는 실제적 문제들을, 특히 건강에 대한 영향들을, 토의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감압이 건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그 동안 요원들 사이에 말이 꽤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몸은 탄력성이 무척 크기 때문에, 그런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읍네다. 그 점을 여러분들께 보이기 위해, 례를 하나 들갔습 네다. 우리는 일천 미터 높이의 산에 어렵디 않게 올라갈 수 있습네다. 구월산이 구백오십사 미터이니끼니, 구월산을 생각하문, 되갔습네 다. 그리고 별다른 영향을 받디 않습네다. 실은 그 정도 고지에서 사 는 사람들도 많잖습네까? 이번 감압은 일백 미터 높이의 산에 올라 간 것과 마찬가집네다..." 나는 몇 걸음 물러나 비판적 눈길로 수상기를 바라보았다. 한구 석에 설치되었으므로,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진 않을 것 같았다. '쓰디 않을 땐, 뭐루, 보자기 같은 거나 상자 같은 걸루 가려놓으 문...' "...감압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을 줄일 뿐 아니라, 감압 환경에 적응하는 범위를 줄이기 때문에, 이번 감압은 오히려 여러분들의 몸 에 무리가 덜 가도록 만들 것입네다. 아울러 여러분들이 월면 세계 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네다. 잘 아시겠디만, 오래 된 기지들은 이미 해발 삼백 미터 수준으로 기압을 낮췄습네다. 여러분들도 즐려 가시는 드래코 태번도 작년부 터 해발 일백 미터 수준으로 낮췄습네다..." `그랬었나? 드래코 태번도 감압을 했다... 전혀 그런 느낌이 들 이 않았는데... 아, 그래서 그랬나?' 우주복을 벗을 때, 산에 올라갈 때 가끔 그런 것처럼 귀가 잠시 막 혔다가 뚫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설겆이를 다시 시작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수상기를 살피면 서. 어느 사이엔가 화면에서 리명규를 찾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화면이 너무 작은 데다가 비슷비슷한 차림이어서, 리를 찾기는 쉽 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 는 그것이 꽤나 흐뭇했다. 리는 맨 뒷줄에 앉아 있었다. 여전했다, 구겨진 옷하며 거푸수수 한 머리하며 좀 엉성해보이는 몸매에 진지한 낯빛하며. 그래도 내 겐 어쩐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사내다운 것처럼 느껴졌다. <<제 6장 5편>> 그가 청혼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잔잔한 웃음이 얼굴에 퍼 지는 것을 느꼈다. 속에 품었던 말을 불쑥 꺼내놓고서, 그는 무척 이나 수줍어했었다. `<우리 아이들>이라고 했디.' 그의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내 모 습이 떠오르면서, 내 속살이 문득 더워졌다. 혼자서도 어쩐지 좀 수줍어져서, 나는 부지런히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이번이 어쩌문 내 몸이 태앉을 마지막 기회인디도 모른디. 벌써 서른여슷. 여기서 예정대루 내려간다 해두, 서른야들..." 나는 고 개를 저었다. `이따가 장영실 기지에 가서 다시 말을 꺼내문, 못 이기는 체하구 받아들일까?' 내 몸 속 어느 깊은 곳에서 무슨 물결이 일렁이기 시 우리 요원들은 모사이 끝나면 바로 장영실 기지를 방문하기로 되 어 있었다. 남반부 사람들이 이산화규소에서 산소를 뽑아내는 공장 을 지난 주에 세웠는데, 그것을 자축하는 모임에 우리 기지 요원들 을 모두 초청한 것이었다. 사령관님께선 기지의 운영에 필수적인 요원들만을 남기고 모두 가라고 하셨다. 남반부 기지를 방문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나와 리는 특별히 초청을 받기까지 한 터였다. 드래코 태번에서 만났던 방송 국 기자 김수형으로부터. 리의 얘기로는 그녀는 우리와 대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텔레비 전 카메라 앞에 서서, 그것도 남반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서서,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 나로선 적잖이 두려웠다. 이스트가 들어간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올렸다. 그럴 수만 있다 면, 그와 함께 얘기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도록 하고 싶었다. 주전자의 물이?소리를 냈다. `물은 끓었고...' 군중가요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나는 수상기를 살폈다. "...셨는데, 어느 수준꺼지 기압을 내리실 계획이신디 말씀해주십 시요." 전기 전문가인 노평구 상사가 일어나서 묻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문제는 실은 내가 답변할 얘긴 아닌데." 김 박사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왕 이 자리에 섰으니, 내가 아 는 데꺼지 말씀드리겠습네다..." 뒷 줄에 앉았던 최 소좌가 자리에서 살그머니 일어서는 것이 보였 다. 나는 수상기의 수위치를 껐다. 수상기를 가릴 만한 것이 없나 둘 러다보니, 빈 포장 상자가 보였다. 사람들의 눈길이 최 소좌가 아니라 내게 쏠린 것이 나는 꽤나 흐 뭇했다. 최는 여느 때처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왼쪽 허 벅지의 화상 때문에 짧은 바지나 슬립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터라, 나는 좀 미안했다. 다구를 제대로 갖출 수 없는 살림살이였으므로, 차를 제대로 끓여 서 마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노랗고 빨간 합성수지 컵들이 차맛을 떨어뜨렸다. 그래도 모두 마실 것이 나온 것을 반겼고 차맛 이 좋닫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 칭찬은 언제 들어도 흐뭇했다. 게다가 사내들의 눈길이 기 회가 있으면 내 허벅다리에 머물러서, 내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량정애 박사와 최 소좌의 낯빛이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제 6장 6편> `내가 저런 슬립을 입고 나오문, 사람들이...' 최 소좌와 함께 한쪽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나는 연분홍 슬립을 입고서 맨 앞 줄 에 다리를 꼬고 앉은 량 박사를 슬그머니 살폈다. 어쩔 수 없이 탐 이 나는 고운 옷이었다. "자, 그러문... 차를 다 마셨습네까?" 강단에 선 김 박사가 좀 조급해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다 마시디 않으신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낭 토론을 계속 해봅세다. 기압은 장기적으론 일십 퍼센트 정도꺼지 낮출 수 있을 것입네다. 중력이 크게 작아딘 환경에선 기압도 좀 낮아디는 것이 오히려 자연 스럽습네다. 그리고 아주 길게 보면, 여기서 태어날 사람들에겐 기 압이 이십 퍼센트 정도꺼지 낮아디는 것이 이상적일디도 모르겠습네 다. 질문이 있습네까?" "네." 량 박사가 손을 들었다. "만일 일십 퍼센트로 기압을 낮 춘다문..." 그때 통신 요원인 한정필 중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급히 사령 관님께로 다가갔다. 이어 전산기 인쇄 용지로 보이는 종이를 사령 관님께 바쳤다. 사령관님께서 그 종이를 한번 훑어보시더니, 자세를 고쳐 앉으시 고 천천히 다시 읽으셨다. 그리곤 말없이 그것을 옆에 앉은 최 대 좌에게 건넸다. 그때는 이미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사령관님 쪽으로 쏠려있었다. 김 박사는 그래도 열심히 량 박사의 물음에 대해 설명했다. 최 대좌가 심각한 얼굴로 종이를 사령관님께 되넘겼다. 사령관님 께서 종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최 대좌에게 무어라고 물으셨다. 최 대좌가 무어라고 대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령관님 께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섰다. 이어 무거운 걸음으로 강단으로 나가섰다. "김 박사, 수고하셨소. 내레 잠깐 발표할 사항이 있는데..." "네, 알갔습네다." 김 박사가 황급히 탁자에서 비켜섰다. "여러분, 지금 막 들어온 소식이 하나 있는데, 아주 중요한 사항 이라서, 모두 알아야 될 것 같습네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발표하 갔습네다." 사령관님께선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모인 사 람들을 한바퀴 둘러다보신 다음, 말씀을 이으셨다, "어젯밤에 정무원에 변동이 있었습니다. 오신욱 총리께서 사임하 셨습네다." 뜻밖의 소식에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렸다. 한편으론 아주 뜻밖 의 소식도 아니었다. <비둘기파>의 지도자로 남반부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펴온 오 총리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놓고 남반부에 줏대있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매파>의 공격을 받아서 어려운 처지로 몰렸단 얘기는 나 처럼 그런 일에 관심도 없고 귀도 어두운 사람까지도 들은 터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 북반부 인민들의 위대하신 지도자 김시형 주석 동지께선 인민무력부장 리종건 차수를 예편시켜 총리에 임명하 셨습네다."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알아듣기를 기다려, 사령관님께선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총리가 바뀐 것은 물론 중대한 일입네다. 그리고 우리 기지도 그 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입네다. 도흔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그런 영향이 언제 어드케 나오리라고 예측할 수 없을 것입네다. 사령관인나 자신이나 이런 일에 대해서 잘 아는 최 부사령관도 잘 모릅네다." <제 6장 7편> 사령관님의 인자하나 힘이 실린 눈길을 받자, 사람들은 눈길을 내 리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지막하게 나오던 웅성거 림이 그쳤다. `하필이면 오늘 이런 일이 터디나...' 나는 장영실 기지 방문이 취소될까 걱정이 되었다. `제발 오늘 하루만 어드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저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리 도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네다. 우 리는 우리에게 주어딘 일들을 열심히 수행하문 됩네다. 만일 여러 분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으면, 나는 즉시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 갔습네다. 내 말 아시갔습네까?" "네." 우리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이 모임이 끝나문, 여러분들께선 예정대로 장여실 기지를 방문하십시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리명규를 쳐다보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우리는 수줍 어하면서도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뜻을 담은 웃음을 교환했다. "...장영실 기지와 도흔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 에 무엇보다도 중요합네다. 그리고 그런 도흔 관계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남반부 요원들과 사귀고 친구가 됨으로써만이 가능 합네다. 그리고 그렇게 친구가 되는 것은 당연합네다. 우리는 한 민족 아닙네까? 나는 여러분들께서 지금꺼지 맡은 일 을 잘 수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수행하리라고 믿습네다." 사령관님께선 김 박사에게로 고개를 돌리셨다. "김 박 사." "네, 사령관님." "그러문 토의를 계속하십시요. 토의 내용이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 습네다." "네, 알갔습네다." 김 박사가 다시 탁자로 다가섰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아래쪽 소식에 팔려서, 모임은 이미 생기 를 잃었다. 사령관님께서 최 대좌와 함께 나가시자, 모임엔 이내 파장 분위기가 어렸다. 김 박사도 맥이 빠졌는지, 질문 하나를 더 받아 설명하고서, 류상 현 행정부장에게로 모임의 진행을 넘겼다. 류부장도 요원들에게 알 릴 사항들 몇을 얘기한 뒤, 모임을 끝냈다. 사람들이 체육관에서 나간 뒤, 나는 최 소좌와 함께 빈 잔들을 거 두었다. 방안이 다른 때보다 훨씬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것 참 큰일인데..." 최가 혼잣소리 비슷하게 말했다. "무슨 일 말입네까?" 나는 가볍게 물었다, 호기심에서라기보다 물어보는 게 예의 같아서. 내 마음은 리명규와 함께 남반부 텔레비 전에 나갈 일로 꽉 차 있었다. "오신욱 총리가 사임한 것 말입네다." 앞 줄 바닥에 놓인 잔을 집어들고 허리를 펴면서, 최가 말했다. "영..." "총리가 그만둔 것이 큰 문제가 됩네까?" "뭐 총리가 갈리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될 리야 없디요. 그러나 이번만은 영..."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 도 감이 도티 않습네다." "그렇습네까? 우리 기지에도 무슨...?" <제 6장 8편> "오 총리가 우리 기지의 적극적 후원자였잖습네까? 오 총리가 나 서서 추진하디 않았으문,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가 이리 날래 건설 될 수 없었디요. 남반부에서 자금을 얻어서 건설했으니끼니, 이만 치 날래 세워뎠디..." 실은 남반부에서 도움을 받은 것은 자금만이 아니었다. 자금이 남반부에서 나왔으므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지를 건설한 것도 남 반부 회사였다. 제일진 요원들이 올라왔을 때는, 이미 기지가 제대 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했다. "듣고보니끼니, 최 소좌 동무래 걱뎡하시는 게... 그러문 새 총 리는 우리 월면 기지 사업에 대해 아무래도..." "당연하디요. 도흔 감정을 가뎠을 리 없디요. 리종건 차수면 매 파의 리더 격인데... 아마 우리 기지 예산이 많이 깎일 겁네다." "그럴까요?" 그녀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로선 그래 도 그녀의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월면 기지 사업은 아주 크로 중요한 사업이었으므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내 흔 들리진 않을 듯했다. "당장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벅찬 판에 우주 계획은 무엇이고 월면 기진 무엇이냐고 주장한 사람들이 들어섰으니... 정부 지원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가 되갔디만, 남반부와 관계가 소원해디문, 우리 로선 당장 곤란한데..." "왜요?" 나로선 남반부와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조금도 아쉬울 것 없었다. 그렇잖아도 우리가 남반부와 너무 빨리 가까워져서 자 본주의의 나쁜 점들에 너무 빨리 물들고 있는 참이었다. "장영실 기지로부터 이것저것 지원을 많이 받는 처지에서 남반부 와 관계가 악화되문, 당장 우리 기지에게 피해가 돌아올 겝네다." 듣고보니 그럴 만도 했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 나는 주전자와 다구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문쪽으로 향했다. "설마 우리 기지를 폐쇄하자곤 하디 않갔디." 그녀가 혼잣소리 비슷하게 말했다. "폐쇄요?" 좀 놀라서, 나는 흘긋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렴 그런 일꺼지야..." 그녀는 생각에 잠겨 고개만 끄덕였다. 부엌으로 돌아와서 주전자를 내려놓으니, 한숨이 나왔다. 차를 끓여내가는 것도 일은 일이었다. "그것 참." 최가 씁슬하게 입맛을 다셨다. "내레 어쩐지 심상찮 다 했더니만..." 체육관에서 오면서도 그녀는 내내 그 일을 생각했 던 모양이었다. "무엇이 심상찮았습네까?" 세척대에 물을 받아 찻잔들을 담그면서 나는 그녀를 돌아다보았 다. 그녀의 이마에 가는 주름들이 진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기지 의 장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그녀에 대해 존경심 비슷한 것이 내 마음 한구석에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일에 대해 진 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올라오게 된 요원들 말입네다. 아직도 바이코누르에서 기다린다 는 여섯 사람들말입네다. 그 사람들 벌써 며 주일을 거기서 묵었습 네까? 그 사람들이 쓸 장비들은 벌써 닿았는데..." 몸을 반쯤 그녀에게로 돌리고 잔을 씻으면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제 6장 9편> "아무리 생각해봐도, 매파가 득세하멘서, 그 사람들 발이 묶인 것 같습네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 따져보았다. "총리가 바뀐 것이 어젯 밤이라문... 시간상으로 맞디 않잖습네까? 그 사람들 발이 묶인 건 발쎄 삼 주도 넘었디요?" "그러나 비둘기파와 매파 간의 권련 투쟁은 총리가 사임하기 오래 전에 걸판이 났을 것이라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문, 짚히는 것들이 많습네다." "그러문 그 사람들은 어드케 나올까요? 그 사람들도 우a리 기지를 쉽게 폐쇄할 순 없는 것 아닙네까?" "그렇디요. 여론이라는 게 있으니끼니." 잠시 생각한 다음, 그 녀는 이었다, "아마 그 사람들 우리를 서서히 말려 죽이려고 할 겝 네다. 예산을 깎고 요원들을 보충하디 않고. 그래서 뿌리 뽑힌 호 박넌출이 시들듯..." 눈 앞에 뿌리가 뽑혀서 시드는 호박 넌출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 리 가지의 뿌리는 물론 평양에 있었다. 거기서 모든 것이 올라왔 다. 돈과 음식과 의복과 기계만이 아니었다. 물과 공기까지 거기 서 올라왔다. 여기서 얻는 것은 태양열 발전에서 나오는 전기뿐이 었다. 문이 열리면서, 리명규가 들어왔다. "누님, 이번 정변에 대한 뉴 스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네다." 흥분과 걱정이 짙게 배어서, 여느 때는 맑은 편인 그의 목소리가 좀 틉틉했다. "외신은 이번 일을 정 변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네다." "아, 그렇습네까?" 내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최가 반겼다. "한정필 동무에게서 들었는데, 남반부에선 <이번 개각이 북남 관계 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뜻의 논평이 나왔답네다. 지 금 모두 이번 정변이 북남 관계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느라 바쁜 모 양입네다." "그렇갔디요."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하는 건 뭐니뭐니 해도 이번에 집권 한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권력을 잡은 자가 누구냐 하는 거라요." "물론이디요. 그래 뉘레 실권자랍네까?" "아직 확실한 니야기는 없습네다. <만경대파>의 소장층 같단 니 야기가 들리는 모양인데, 아무튼, 리종건 신임 총리가 상징적 존재 라는 니야기는 거의 확실한 것 같습네다." 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기지에 나쁜 소식이 하나 있습네다." 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바이코누르에서 기다리던 우리 기지 신임 요원 여섯 사람이 오늘 아침에 폐양으로 되돌아갔답네다." 눈 앞에 어둑한 무엇이 드리우면서, 가슴 속을 써늘한 바람이 스 쳤다. 최 소좌의 비관적 전망을 듣고 그녀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얘기를 얘기로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얘기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아니, 우린 어드케 하라고? 아무리 우주 계획에 반대한다고 해 도 그렇디, 어드케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네까?" 최가 거센 목 소리로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항의를 했다. 다시 눈 앞에 뿌리를 뽑힌 호박 넌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넌 출에 핀 꽃들이 벌써 시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이 월면 기지에, 아직도 낯설고 서투른 이곳 달 나라의 삶에 큰 애착을 가졌 음을 깨달았다. 나에겐 이미 이곳이 보금자리였다. 뿌리를 내린 땅이었다. <<제 7장 1편>> "여기가 저희 스튜디오입니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서자, 김수형 이 손으로 방안을 가리켜보였다. 그녀의 말씨와 낯빛에 은근한 자 랑이 배어 있었다. "아, 네. 방이 널궈서 도씁네다." 리명규가 높은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지하인데도 천정이 무척 높군요." "정짜로 도씁네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방안을 둘러다 보았다. 스튜디오는 내가 생 각했던 것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방안에 놓인 기계들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엔 처음 들어왔지만, 어쩐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서홍씨." 김이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서홍씨." 방안을 두러 보면서, 그녀가 다시 불렀다. 역시 대꾸 가 없었다. "없나? 카메란 있는데..." 그녀가 우리를 돌아다 보았다. "피디가 잠깐 어디 간 모양인데요. 제가 찾아볼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 문간에 놓인 화분에 눈길을 주면서, 리가 대꾸했다. "좀 앉으시지요. 저기..." 그녀가 방 안쪽에 놓인 탁자와 소파들 을 가리켰다. "네, 됐습네다." 이번에 내가 대꾸했다. "스튜디오 구경을 점 하디요." 그녀는 웃음 띤 얼굴고 고개을 끄덕여 보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한숨을 내쉬고서, 나는 좀 차분한 마음으로 방안을 다시 둘러다보았 다.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사람들과 함께 몰려다니면서 낯선 공장 을 구경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넓은 것을 생각하면, 방은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편이었다. 공간 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애쓴 자취들이 눈에 띄였다. 방 한쪽 벽에 통제석으로 보이는 데가 있었고 거기 있는 큰 화면에선 아나운서가 무슨애기를 하고 있었다. 남반부 방송이었다. 내 발길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끌렸다.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천황보필당> 후보가 당 선된 것은 일본 국민들의 정치적 선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남자 아나운서였지만, 말씨는 아주 부드러워서 좀 달치 근한 뒷 맛이 귀에 남아 있었다. 한쪽 귀에만 달린, 앙증스러운 금 귀거리가 그런 뒷맛을 짙게 했다. 물론 남반부 말씨는 우리 북반부 말씨 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세 련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로선 남반부 말씨의 그런 점이 꼭 좋게 여겨지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말씨 때문에 남반 부 방송을 더욱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다음은 해저 터널 소식입니다." 화면의 오른쪽 윗 구석에 북태평양 지도가 나타났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많은 생물등이, 북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었을 때, 아시아로 부터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 고 있습니다. 그 뒤 오랫동안 두 대륙은 베링 해협으로 분리되었는 데, 마침내 해저 터널로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베링 해 저 터널 기공식 모습을 취재한 김종선 특파원이 전해 드리겠습니 다." <<제 7장 2편>> 장면이 바뀌면서, 검은 방한복을 입은 사내가 마이크를 들고 나타 났다. 그 뒤로 을씨년스러운 시가지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오늘 준공된 베링 해저 터널의 서쪽 터미 널이 위치한 러시아의 우엘렌 시입니다. 동쪽 터미널은 미국 알라 스카의 웨일즈 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베링 해저 터널은 사이베리아와 알라스카를, 즉 아시아 대륙과 북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해 줍니다. 이제 서울에 사는 사람이 기차를 타고서 엘에이나 뉴욕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면에 터널의 여러 모습들이 차례로 나왔다. "이 해저 터널의 길이는 약 구십 킬로미터이고 폭은 팔차선 도로와 사차선 철로를 수 용할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다른 나라에 만들어진 해저 터널은 내가 흥미를 크게 느낄 만한 화제는 아니었다. 나를 리를 돌아다보았다. "더기, 저그나." "네, 누님." 벽 한쪽을 덮다시피한 화초들은 살피던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이번 대담말인데 ..." 나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우리 레 먼저 허가를 받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류 부교이나 김 소좌한 테?" "허가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뭘 허가꺼지... 누 님, 걱덩하지 마시라요. 아무 문제 없을 겁네다.". "그래두..." 그의 얼굴에 남았던 웃음기가 문득 짙어졌다. "그리고 사령관님 께서 말씀하셨잖습네까. 우리 요원들이 남반부 요원들하고 사귀어 서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님, 발쎄 잊었습네까?" "그렇긴 하디만." 나는 그의 얘기에 좀 마음이 놓였다. "만일 대담 때문에 사령관님께 무슨 누를 끼티게 되문, 어드케하디?" "무슨 누를 끼틴단 니야깁네까? 사령관님께? 우리레 무슨 반동 적 니야기를 할 것도 아니고. 누님, 정짜로 걱덩할 것 없습네다. 내레 약속합네다." 그가 하도 자신있게 나오는 바람에, 아직 좀 불안했지만, 나는 고 개를 끄덕였다. "누님, 내 니야기 잘 들으시라요." 그가 한걸음 다가서서 내 눈 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일도 닐어나디 않갔디만, 혹시 무슨 일이 닐어나문, 누님은 이리 말하시라요. 난 아무 것도 모르고 다 리명규레 한 일입네다. 물어볼 것이 이시문, 리명규한테 물어보시라요. 이리 말입네다. 누님, 아시갔습네까?" "응" 내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기대면서, 나는 자신없는 소리 로 대꾸했다. "누님, 약속하시라요. 그리 니야기하갔다고." 팔에 힘을 주면서, 그가 다그치다시피했다. 그때 김이 베레모를 쓴 사내와 함께 돌아왔다. 리 또래로 보였는 데, 긴 머리에 붉은 귀거리가 묘하게 어울렸다. 그제서야 그 사람 이 우리가 공장을 둘러다볼 때 카메라를 메고 다닌 사람이란 것이 생각났다. 내 허리에 둘렀던 팔은 풀었지만, 여전히 거센 눌길로 대답을 재촉 하는 리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리 녀사, 리 동무. 인사들 하시죠. 여기 이분이 우리 피디 서 홍씨입니다. 서홍씨, 이 분이 리명순 녀사이시고 이 분이 리명규 씨입니다." 우리는 인사했다. 리명규와 서홍은 이미 인사를 한 사이임이 밝 혀졌다. <제 7장 3편> "그러면 시작합시다." 슬쩍 손목시계를 보면서, 김이 말했다. "음, 먼저 여기서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 밖에 나가서 사진을 좀 찍 겠습니다. 달 나라에서 나온 뉴스엔 우주복을 입은 모습이 나와야 만 된다고 하니까..." 야릇한 볼웃음을 지으면서, 그녀가 어깨를 추스렸다. "알갔습네다." 리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두 분께서 트랙터에서 내리시는 장면을 하나 찍고 공장을 배경으로 삼아서 한두 장 찍고... 서 피디, 그러면 되겠지요?" 그녀가 내 가슴에 마이크를 달아주는 서에게 물었다. "네.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두 분께선 마음 편하게 말씀하세요. 너무 멋있는 답변을 하려고 애쓰실 필욘 없습니다. 뭐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자연스 럽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김이 설명했다. "네, 알갔습네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리가 그 녀의 말투를 흉내냈다. 웃음판이 되었다. 우리가 제대로 자리를 잡자, 통제석에 앉은 서가 손짓을 했다. 준비되었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그는 모든 기계를 혼자서 조작하고 있었다. 세 대나 되는 카메라까지. 김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낯빛을 가다듬었다. 서가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번 산소 추출 공장의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웃 김일성 혁 명기지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이곳 장영실 기지를 방문했습니다.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이 앞에 있는 카메라를 쳐다보 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엔 리명순씨와 리명규씨 두 분을 모셨습니다. 리명순씨, 안녕 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그녀가 리명규와 먼저 얘기하리라고 여겼던 터라, 나는 한 순간 당황했다. "안녕하십네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들 어 그녀를 쳐다보고서야, 나는 내가 인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도 전에 고개를 숙였음을 깨달았다. 텔레비전을 많이 봐서 그런지, 그런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리 여사께선 지금 무슨 일을 맡아보고 계십니까?" "저는 료리삽네다." 그 말만으론 어쩐지 허전해서, 나는 이내 덧붙 였다, "비상시엔 보조 간호원의 임무도 맡습네다." "아, 그렇습니까? 무척 중요한 일들을 하고 계시군요." 그녀가 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명규씨,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네까?" "리 선생님께선 무슨 일을 맡아보고 계십니까?" "저는 버릴물 처리를 맡고 있습네다. 아울러 식물 재배도 맡고 있 습네다." "버릴물 처리라면, 폐수 재생을 의미하죠?" "네, 그렇습니다." "폐수 재생은 물이 귀한 월면 기지에선 아주 중요한 기능이죠. 리 선생님께서 먼저 오늘 장영실 기지를 보시면서 느끼신 것을 좀 말씀 해주시죠." "실은 저는 장영실 기지에 여섯 번째 찾아왔습네다." 리가 싱긋 웃었다. "김일성 혁명 기지는 건설된 디 얼마 되디 않아서, 없는 것 들이 너무 많습네다. 그런데 제가 아쉬운 소리를 할 데는 여기 장영실 기지밖엔 없습네다. 그래서 자주 찾아와서 손을 벌리곤 합네다. 그래서 제 마음에 가장 뚜렷이 남은 인상은 여기에서 근무하시는 요 원 여러분들의 친절입네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그 분들께 감사 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네다." <제 7장 4편>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리의 옆얼굴을 살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낮았건만, 그는 낯빛도 말씨도 자연스러웠다. 하는 얘기도 어 른스러웠다. 저번 드래코 태번에서 남반부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는 우리가 남반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얘 기를 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낳았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가 한 민족이니까,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하 지요. 앞으로 두 기지 사이에 보다 긴밀한 유대가 형성되기를 바라 는 바입니다." 김이 나를 바라보았다. "리 여사, 리 여사께선 장영실 기지에 처 음 오셨죠?" "네." "장영실 기지를 둘러보시면서 받으신 느낌은?" "제가 받은 느낌은..." 나는 급히 생각을 정리했다. "모든 시설들 이 지하에 건설되었단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네다. 가지 건설된 셈인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는 이제서야 시설들을 지하로 옮기기 시작했 습네다." "달 나라에선 시설을 지하에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죠?" 김의 눈 길에 뜻이 담겨 있었다. 달 나라 사정에 어두운 지구의 시정자들을 위해 설명해달라는 얘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달 나라의 바위는 열을 잘 전 도하디 않습네다. 그래서 기지를 지하에 건설하문, 열 관리 측멘에 서 돠습네다. 또하나의 리유는, 실은 저로선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리윤데, 미 세 운석입네다. 지하로 들어가문, 큰 운석이야 어쩔 수 없디만, 아 주 작은 운석들을 막을 수 있디요. 날래 지하로 들어가서, 운석 걱 덩을 하디 않아도 되문, 도캉습네다." 우리 기지의 지하 굴착 작업장으로 통하는 갱도의 문엔 미세 운석 에 의해 유리 표면에 만들어진 미세한 크레이터의 확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월면에 있는 큰 크레이터들과 똑같이 생긴 그 작은 크레이터는 꿈 에 보일까 걱정될 만큼 끔찍했다. 내 머리에 그런 크레이터가 생 긴 모습을 떠올리면, 오금이 저려왔다. "아, 그렇겠군요. 오늘 산소 추출 공장을 둘러보시면서 받으신 느낌을 좀 말씀해주시죠." "아주 도흔 공장 같습네다. 최신식 설비를 갖촌 공장이어서, 솔 직히 니야기하문, 점 부럽습네다. 이제 장영실 기지는 뿌리를 튼튼 히 내린 것 같습네다." "리 여사께선 달 나라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지난 일월에 올라왔으니끼니, 이제 꼭 넉 달이 됐습네다." "달 나라에서의 생활이 아무래도 낯설고 힘들 텐데." 김의 웃음 이 짙어졌다. "이렇게 올라오시게 된 사연 같은 것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주시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개인적인 일들을 이런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야 물론 없었다. - 사령관님께서 항공륙전여단의 대대장 이 셨을 때 낙하산병이었던 효영이 아버지가 그 대대에 배치되었다 는 것, 사령관님께서 무관으로 유럽 연방에 나가셨던 두 해를 빼놓고선 효영이 아버지가 사령관님을 가까이에 모셨다는 것, 사령관님께선 <뛰어내리는 장군>이란 별명이 가리키듯 장군이 되 신 뒤에도 부대원들과 함께 낙하하셨고 <박봉근 소장이 거느린 낙하 산병들은 그를 따라서 지옥에라도 간다>라는 얘기가 나왔을 만큼 훌 륭한 분이시라는 것, 사령관님과 사모님은 양친을 일찍 여인 효영이 아버지에겐 부모와 같았다는 것, 효영이 아버지가 효영이와 사령관님의 외손자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가 함께 죽었다는 것, 사령관님께선 김일성 혁명 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시자 상심한 사 람에겐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료 리사로 뽑으셨다는 것 따위. 그리고 그것은 이런 대담에서 꺼내기엔 너무 긴 얘기였다. 무엇 보다도, 그런 사정을 얘기하면, 사령관님께서 정실 인사를 하셨다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 요원들 가운데도 그런 생각 을 넌지시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 7장 5편> "당시엔 이리로 올라오는 것도 괜찮은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지 금은..." 나는 슬쩍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 고맙게도 김은 내가 놓은 덫을 건드려주었다. "지금은 생각이 달 라졌단 말씀이십니까?" 나는 얼굴위 웃음을 지우고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더괜찮은 일로 생각됩니다." 김과 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으로 김의 물음에 대해 대답하 는 일은 넘어갔다. 나는 슬그머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나는 다 털어놓 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 내가 남편과 아들을 어처구니없이 잃었 다는 것을, 남반부 건설업자가 철근을 제대로 넣지 않고 지은 영화 관에 남반부 영화관 주인이 정원의 배도 넘는 사람들을 들여보내서 이층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남반부 사람들, 당신네들은 그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네다>라 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한순간 온몸을 움켜쥐었었다. 이제 그 미친 충동을 지나간 것이었다. 나는 안도와 아쉬움을 함 께 느꼈다. 그런 충동을 누른 것은 잘한 일이지만, 가슴에 단단히 맺힌 슬픔과 분노를 한번이라도 그렇게 내보일 수 있다면, 좀 후련 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면, 난 단박에 유명해디갔디. 아 니갔디. 아마 나가딜 않갔디.' 김이 낯빛을 가다듬고서 리명규를 향했다. "리 선생님께선 셀레 나이트 무브먼트, 즉 월면 운동에 적극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뭐 적극적이라고꺼지 할 것은 못 됩네다만..." "김일성 혁명 기지에선 리 선생님말고도 월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분들이 계십네까?" "월면 운동에 공감하는 분들이 여럿인 것으로 알고 있습네다만."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식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아직꺼진 저 하나뿐입네다." "아, 그렇습니까? 월면 운동은 우리 반도방송을 통해서 이미 여 러 차례 소개되었는데, 간단히 정의하면, <월면 기지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자는 운동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 선생님, 제가 궁금한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조국과 월면 공 화국에 동시에 속하게 되었을 때, 그의 충성심이 어느 쪽으로 쏠릴 지 하는 것 인데... 그런 면에서 갈등이 없을까요?" "그 문제가 있긴 합네다. 그러나 제 생각엔 그것이 그리 큰 문제 가 되딘 않을 것 같습네다. 우리 시대는 우주 탐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입네다. 그래서 끝없이 넓은 프론티어가 계속 열리고 있습네다. 그런 시대엔 민족 국가의 국경이 탐험에 나선 사람들에게 가 하는 제약은 시대의 요청과 어긋납네다. 달 나라라는 프론터어에 와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해롭다기보다 의미가 없습네다. 국적도 인종도 언어도 여기선 그리 중요하디 않 습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류의 대표라는 사실입네다. 여기 와서 하늘 한쪽에 뜬 파란 달을 본 사람이라문, 누구나 그 사 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네다." 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리 선생님,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조국을 버려도 좋단 얘기입니까?" "저는 월면 기지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자신들을 인류를 대표 한 탐험가들로 여기는 것이 그들의 조국을 버리는 일이 되딘 않는다 고 봅네다. 법률적으론 어떨디 모르갔습네다만, 도덕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봅네다. 지금은 십오세기와 십륙세기에 유럽 사람들이 해외 탐험에 나선 뒤로는 처음으로 활발하게 탐험이 이루어디는 시대입네다. 그런 시 대엔 국경이 가하는 제약은 의미가 없습네다. 그래서 그때 많은 탐 험가들이 민족 국가의 국경을 벗어났습네다. 이탈리아 사람인 콜럼부스와 폴투갈 사람인 마젤란이 스페인 왕을 위해서 탐험에 나섰잖습네까? 존 캐봇도 그랬고 아메리고 베스푸치 도 그랬습네다. 지금 누가 그들보고 국경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 갔습네까?" 그의 목소리가 어느 사이엔가 높아져 있었다. <제 7장 6편> "그러나 달 나라에서도 국적이나 인종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구에선 말할 것도 없구요. 어떤 뜻 에선 그런 요소들이 달 나라에서 오히려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토 문제가 있잖습니까? 모든 나라들이 달 나라의 영토를 가능한 한 많이 차지하려고 애써서 실제로는 달 나라의 분할 점령이 진행중인데. 리 선생님께선 그 사실과 월면 기 지 사람들이 인류의 대표라는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키십니까?"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김의 얼굴을 살폈다. 나는 그녀가 월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 는 그런 내색 없이 리의 주장에 반대하는 주장을 차분히 세워서 그 의 답변을 끌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습네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국적과 인종이 아즉도 중요한 요소들입네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네다. 마젤란이 배 다슷 척에 삼백 명도 채 안되는 승무원들을 이끌고 항해에 나섰을 때, 스페인 선장들은 남아메리카의 해안에서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 켰습네다. 마젤란 함대의 승무원들은 아홉 나라들에서 왔지만, 선장들은 다 슷 가운데 너이가 스페인 사람들이었습네다. 마젤란처럼 마음이 굳 고 무자비하고 궁량이 깊은 지휘관만이 그런 반란을 진압하고 임무 를 수행할 수 있었습네다. 마찬가지로 월면공화국이 수립되려문, 콜럼부스나 마젤란처럼 뛰어 난 지도자들이 나와서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어야 할 것입네다. 앞 으로 월면 운동이 활발해디문, 죠지 워싱턴이나 시몬 볼리바르같은 지도자들이 나올 겁네다." "그러면 리 선생님께선 월면 운동이 성공하실 것으로 확신하신단 얘기인가요? 월면 운동이 현재 그리 활발하지 못하단 얘기도 있는 네..." "네. 월면 운동이 지금 좀 저조한 것은 사실입네다. 그러나 멀 디 않은 장래에 월면 사회가 나올 것이니끼니, 월면 공화국이 나오 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인류 역사는 융성하는 식민지들은 언젠가 는 독립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네다. 지중해 연안에 퍼졌던 희랍 식민지들이 그랬고 페니키아의 식민 지였던 카르타고가 그랬습네다. 근세엔 미국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같은 식민지들이 본국과의 유대를 과감하게 끊어버리 고 독립했잖습네까? 어쩔 수 없을 땐, 전쟁꺼지도 불사하면서?" "리 선생님께선 역사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이 또 깊이 아시는데, 그런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미쓰 김." 서가 다급하게 불렀다. 김이 홱 고개를 서에게로 돌렸다. "밖에 사령관님이 계신데. 들어오실 모양입니다." "사령관은 눈도 없나? <온에어> 싸인도 못 보나?" 김이 화를 냈다. 나는 남반부 사람들이 너무 위아래 구별이 없다고 여겼지만, 이번 만은 흔쾌히 김의 얘기에 동조했다. 방송중엔 사령관이라도 들어오 지 않는 것이 옳았다. "미쓰 김. 김일성 기지 사령관님께서 함께 계신 모양인데... 어쩌지요?" 서가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귀한 손님이신데..." 김이 흘긋 우리 얼굴을 살피더니 입맛을 다셨다. 이어 낯빛을 누 그러뜨리고서, 서를 돌아다보았다. "대밋. 오우케이." 서가 싱긋 웃었다. "생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섰다. 우리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 섰다. <제 7장 7편> "아, 이거 미안합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품으로 보아 장영실 기지 사령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서 여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방송중에 이리 들어오는 게 예의가 아니지만, 귀한 손님이 오셔 서... 이 스튜디오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리 무단 침입했으 니, 이해하십시오." 이어 그 사람은 뒤따라 들어선 우리 사령관님에게로 몸을 돌렸다. "박 장군님, 여기가 반도방송의 스튜디옵니다." "아, 네." 그제서야 사령관님께선 우리를 알아보셨다. 눈썹을 찡긋 올리시더니, 눈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시고서 고개를 끄덕여보 이셨다. 우리는 황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뒤로 수행안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장영실 기지 사령 관이 우리 사령관님을 슬쩍 한구석으로 데리고가더니 나직이 무엇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령관님께선 진지한 얼굴로 들으시면서 간간 고개를 끄덕이셨다. 두 분이 상당히 친하시구나... 아, 참, 그러디. 두 분께서 유 럽에서 함께 근무하셨다고 하셨디.' 그때 수행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슬그머니 한쪽으로 나오더니 리에게 손짓했다. 그를 보자, 내 가슴이 철렁했다. 보안 요원인 민장석 특무상사였 다. 오랫동안 정치보위부에서 근무한 하사관으로 악명이 높아서, 모두 김상윤 소좌보다 그를 더 무서워했다. 뜻밖이었는지, 리도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 잡은 듯, 어깨를 펴고서 민에게로 다가갔다. <독사 대가리>란 별명이 말해주듯, 여느 때도 표독스러운 민의 얼 굴이 애써 누른 화로 일그러졌다. 그가 나직하나 거세게 리를 몰아 세웠다. 민의 말소리는 물론 내 귀에 들리지 않았지만, <먼저 우리 에게 이야기르 했어야 할 것앙이요>하는 함경도 사투리는 내 귓전에 맴돌았다. 그래도 리는 태연했다.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추스려서, 어쩔 도 리가 없었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때 두 분 사령관님들께서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행한 사람 들에게로 돌아가셨다. 민이 황급히 수행원들이 보인 곳으로 다가갔다. 이어 김 소좌에 게 무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김 소좌는 사령관님의 움직임에 마 음이 팔려서, 우리 쪽을 흘긋 쳐다보았을 따름이었다. 태연한 걸음걸이로 돌아오면서, 리는 웃음 띤 얼굴로 내게 슬쩍 눈짓을 했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흠. 독사 대가리두 리명규 같은 곧은박이를 만나문...' "그러면 우리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장 영실 기지 사령관이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따라서 문쪽으로 몸을 돌리시던 우리 사령관님께서 문득 우리 쪽 으로 향하셨다. 이어 오른손을 드시더니, 엄지 손가락을 힘차게 치 켜세워 보이셨다.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흘 긋 리의 옆얼굴을 훔쳐보니, 그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몸을 바로하면서, 나는 리에게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 였다. 싱긋 웃으면서, 그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영문을 모르는 김이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 8장 1편> 뜨락또르의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머 리 한구석을 스쳤다. 귀로 들어오는 달콤한 가락이 눈으로 들어도 는 창밖의 거친 풍경에 부딪쳐 날카로운 조각들로 부서졌다. 뜨락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게 뻗은 길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 었다. 이제 장영실 기지는 지평 아래로 사라졌다. `왜 그렇디?' 가려운 발등을 우주복 안쪽에다 문지르면서, 나는 어째서 지금 마음이 무거운가 다시 생각해보았다. 두 시간 전만해 도, 나는 마음이 달떴었다. 이번 대담을 둘러싼 일들이 잘 풀린 것 이었다. 대담 자체도 잘 된 셈이었지만, 우리가 녹화할 때 사령관님께서 스튜디오를 방문하신 덕분에, 남반부 텔레비전에 나가는 것을 사령 관님께서 사후에나마 승인하신 셈이어서, 민장석도 스튜디오에서 보 인 서슬스러운 기세와는 달리 리명규에게 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역시 그 사람들하고 만난 것이...' 박 뭐라는 그 젊은이의 모 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담이 끝난 뒤, 나와 리명규는 김수형의 안내로 <영신 엔터프라 이즈>를 찾았다. 장영실 기지와 김일성 혁명 기지를 세운 회사라, 영신 엔터프라이즈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지금은 장영실 기지 가까이에 공동체를 만드는 사업을 추진한다는 얘기였다. 그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2천 명의 주민을 수용할 만큼 컸는데, 크기가 그쯤은 돼야, 공동체가 자생력을 갖출 수 있다고 했 다. 무려 2천 명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달 나라에 만드는 것은 정말 로 큰 사업이었다. 서른이 채 못 되는 요원들이 살고 있는 우리 기 지를 만드는 데 들어간 품과 돈을 생각하면, 그런 공동체의 크기가 비로소 짐작되었다. 그러나 내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사업의 규모가 그렇게 크다는 사실보다 우리를 맞은 박 뭐라는 그 젊은이가 보인 일에 대한 열정 과 자신감이었다. 그는 마치 그 사업을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공동체의 장래를 전망하면서, 그는 달 나라가 터널로 연결된 지하 공동체들로 덮일 날이 오리라고 자신있게 예언했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선 예외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나는 장영실 기지에 사무실을 가진 남반부 회사들의 직원들은 모두 그와 같으리 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의 얘기에 따르면, 장영실 기지엔 핵융합 발전소를 세우는 일을 맡은 회사도 있었다. 핵융합 발전이 실용화된 지 몇 해 되지 않았지만, 벌써 미국, 로 씨야, 유럽 연방, 그리고 일본은 달 표면에 많은 헬리움 동위원소를 리용해서 전기를 얻고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발전소를 세우려 하고 있었다. 영신 엔터프라이즈의 그 젊은이는 주민이 오백 명인 공동체만 서 도, 핵융합 발전이 경제성을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슨 자동차 회사에선 달 표면의 먼지를 반응 질량으로 삼은 차를 시험하 고 있었다. 땅 위를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가는 차였으므로, 뜨락 또르가 아니라 비행차인 셈이었다. 그런 차는 남반부 회사가 특허 를 얻은 것이어서, 만일 시험 결과가 좋으면, 기술적으로나 상업적 으로 대단한 성공일 것이라는 얘기였다. `바로 그런 점이 남반부의 강점이라...' 나는 속으로 좀 씁쓸하 게 입맛을 다셨다. <제 8장 2편> 오늘 남반부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은 나에겐 꽤나 충격적 인 경험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내가 지금까지 남반부 회사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품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깨뜨려버렸고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낫다는 믿음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나는 그들이 탐욕스럽고 돈을 벌기 위해선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 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지는 것마다 썩게 만들었고 우리 북반부 사회부의 체제가 썩은 것도 그들이 우리 공무원들을 돈으로 유혹하여 자신들의 고용분자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었다. 날림으로 지은 영화관이 준공 검사를 받은 것만해도 그랬다. 실 제로 남반부 회사들이 공무원들을 고용분자들로 삼는 일들은 이젠 예사로 여겨지는 판이었다. 물론 장영실 기지의 남반부 사람들도 탐욕스러웠다. 돈이나 이익 과 같은 말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 상 그들과 만나 얘기해보니, 그들에겐 그런 탐욕밖에 무엇이 더 있 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맡은 일과 관련하여 나름의 꿈 같은 것이 있었 고 그런 꿈이 그들로 하여금 일에 온 힘을 쏟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활발했고 모든 일에서 자발적인 듯했 다. 바로 그런 점들이 우리 북반부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 들이었다. 남반부 사람들에게 비기면, 우리 기지에선 이내 눈에 뜨 이게 꿈이 많고 모든 일에 열성적이고 자발적인 리명규까지도 평범 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전엔 우리에게 그런 점들이 부족하단 것을 그리 절실하게 느 끼지 못했다. 남반부 사람들이, 특히 회사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 을 보고서야, 나는 같은 조선 사람들이지만 우리와 남반부 사람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텔레비전으로본 남반부 사회의 모습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과는 차이가 컸다. `바로 그런 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활기차게 만드는 것일 텐 데... 어째서 그럴까? 나는 다시 속으로 물었다. 자본주의는 리기주의를 바탕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아글 타글 제 리익만을 챙긴다고 했다. 우리 북반부와 같은 사회주의 사 회는 리타주의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제 리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생각했다. 리타주의가 리기주의보다 낫다는 것은 낮이 밤보다 환하다는 것만 큼이나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무리 애써도, 답은 나오지 않고 골치만 아파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명규도 모르는 걸 내가...' 이름은 사회주의 사회지만 속으론 자본주의 사회 뺨치게 자본주의 를 따른다는 중국에서 살았던 리도 내 물음에 대해 시원스러운 얘기 를 하지 못했다. 그저 경쟁이 자본주의의 강점이란 얘기만 했다. 경쟁을 하게 되 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야 나 도 알았다. 그러나 협동이 중요하다는 것도 분명했다. <경쟁만 있구 협동 정 신은 없는 사회레 어드케 발전할 수 있디?>라는 물음에 그는 씨의 웃으면서 머리만 극적거렸다. <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에 북한어/평안도 방언 등이 도착되 었습니다. 많은 이용바랍니다. > <제 8장 3편> "누님. 더기 보시라요." 옆에 앉은 리가 내게로 몸을 기울이면 서 앞쪽을 가리켰다. "뭔데?" "더기 사람이 보이디요?" "사람?" 나는 리의 손길이 가리킨 곳을 살펴보았다. 김장고속도로의 왼쪽으로 누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산을 쓴 채. 물론 우산은 아니었다. 우주복의 머리로부터 집광판을 높이 세운 것이었다. "보이디요?" "응. 뉘레 데리...?" "셀레스 브라운이란 미국 아이라요. 열네 살난 에미나이인데 고 다드 기지에서 태어났디요." "아이가 어드케 데리 혼자서 쏘다니디? 산보하는 것처럼?" "그래서 유명하디요. 별명이 <피어레스 셀레스>랍네다. <겁 없 는 셀레스>란 뜻이라요. 데리 혼자서 쏘다니기를 도하해서, 이 근 처지형은 저 아이만큼 아는 사람이 없답네다. 보시라요, 걷는 게 얼마나 가볍고 우아한가. 힘이 하나도 안 드는 것 같디요?" "응. 정짜로 그런데." 집광판을 머리에 이고도 그 에미나이는 아주 가볍게 걷고 있었다. 필요없는 몸직이 전혀 없이 힘을 들이지 않고 걷는 모습이 리의 말 대로 우아했다. 그 사이에 거리가 좁혀져서, 나는 그 아이의 등에 서 여분의 산소통으로 보이는 둥근 통의 보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달 나라에도 원주민이 생긴 겁네다. 중력은 낮고 공기도 물도 없는, 이 적대적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태어난 겁네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녀느 때처럼 그의 얘기는 좀 과장 된것 같다는 생각을 밝히지 않고. 그래도 그의 말씨에 담긴 열정이 따스한 기운으로 내게로 옮아오기 시작했다. "이곳의 미래는 저런 아이들에게 속합네다. 여기서 태어나서 자 란 아이들에게." "저런 아이들이 지금 메치나 되디?" "박진동 씨레 그러는데, 거의 백 명은 될 거랍네다. 더런 아이들 은 지구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과는 여러 모로 다릅네다. 생긴 것부터 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은 더 다르고." "그렇갔디. 우산처럼 생긴 것은 집광판이 분명하디?" "네." "그런 걸 머리에 이고도 잘도 걷네. 거츠장스럽딘 않을라나?" "그렇디도 않을 겁네다. 여기선 공기가 없으니끼니, 구조가 그리 단단할 필요가 없고. 아마 무게도 아주 가벼울 겁네다." "더런 걸 꼭 달고다녀야 하나?" "우주복 아래에 달린 기계 구두에 전력을 공급해야 하니끼니, 멀 리 쏘다니려문, 집광판이 있는 것이 도티요. 그리고 판이 언제나 태양을 향하므로, 양산 노릇도 히디요. 일석이조인 셈이라요." "그렇갔군. 더런 우주복은 언제 나왔나?" "얼마 되디 않았시요. 누님, 한번 보시라요." 그는 고갯짓으로 뜨 락또르 안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모든 해치를 열었잖습네까? 아무리 오래 여기서 살아도, 지구에 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겐 우주복은 너무 좁은 겁네다. 그러나 저 아이에겐 그렇디 않습네다. 집이나 마찬가지라요." 그는 이제 뒤 로 처지기 시작한 아이를 돌아다보았다. <<제 8장 4편>> "모든 해치를 열었잖습네까? 아무리 오래 여기서 살아도, 지구에 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겐 우주복은 너무 좁은 겁네다. 그러나 저 아이에겐 그렇디 않습네다. 집이나 마찬가지라요." 그는 이제 뒤 로 처지기 시작한 아이를 돌아다보았다. 우리를 보자, 그 아이가 멈춰서더니 손을 흔들었다. 우주복 가슴 에 파란 새가 그려져 있었다. 무엇이 문득 가슴에서 차오르면서 목이 뻣뻣해졌다. 살아있는 것 이라곤 하나도 없는 거친 들판에서 비정하게 내리지지는 햇살을 받 으며 혼자 서서 손을 흔드는 그 아이의 모습은 그리도 외롭고 연약 하면서도 밝고 용감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가슴을 펴고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켜본 적이 없는 아이가, 맑은 시냇물에 손을 담근 적도 바닷물에 뛰어든 적도 없는 아이 가, 파란 하늘 속으로 솟구쳐 오르는 새의 힘찬 날갯짓을 본 적이 없 는 아이가, 결코 새가 날 수 없는 빈 하늘 아래 파란 새의 모습을 가슴에 품 고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내 가슴에 아프도록 또렷이 새겨졌다. 눈시울이 따가와지는 것을 느끼면서, 리를 따라, 나도 우주복에서 손을 빼어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아이는 우리를 보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여기 달 날라만이 아니라 다른 우주 공간이 더런 아이들 차지가 될 겁네다." 리의 목소리에 감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마음을 드러낼 것 같아서,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리명순 동무," 두 자리 앞쪽에 앉은 최옥순 소좌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데 아이레 메칠 전에 엔비씨 방송에 나온 것 아 십네까?" 다른 사람들이 아이를 돌아다보았다. "아니요. $모릅네다." "엔비씨 방송에 나왔는데, 말을 아주 잘 합데다." 최는 내가 리 와 함께 남반부 텔레비전에 나간 것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다시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제 작아진 아이는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가슴 에서 무엇을 불러냈다. "...태양계에서 사람들이 제대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는 곳 은 달과 화성밖에 없습네다, 누님." 뒤늦게 리의 목소리가 그 아이 에게 팔린 내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화성은 조금이긴 하디만 대기가 있고 달보다 중력이 훨씬 큽네다. 그래서 화성에선 우주선을 발사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화성 사람들은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에 적응하기가 달 나라 사람들보 다 훨씬 어렵습네다. 그래서 달은 우주 려행이 시작되는 기지 노릇을 할 것이고 달 나 라 사람들은 우주 공간의 탐험을 독점하다시피 할 것입네다." 그것은 리에게서 열 번도 넘게 들은 이야기였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디요. 육체적으로만 그런 것 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렇습네다. 지구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별 나라를 탐험하고 식민지를 건 설하는 일처럼 스케일이 큰 일을 제대로 해내기 어렵습네다. 실은 태양계 전체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기도 어려울 것입네다. 배운 것이나 경험한 것들이 모두 지구 중심이디요. 그래서 궁극적으론 여기 달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인류의 미 래를 이끌어나가게 될 겁네다." 그것도 여러 번 들었던 얘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얘기들이 내 가슴에 절실하게 닿았다. `내레 여기서 아일 낳으문... 이 사 람의 아일 낳으문...' "난 확신합네다, 누님."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방금 한 생각에 얼굴을 붉히는 사이에도, 나는 더운 기운이 아랫도리로 모이는 것을 느꼈다. 오른쪽 귀에 그의 더운 숨결이 닿 으면서, 정신이 한순간 아득해졌다. <제 8장 5편> "우리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언젠가는 우주선을 타 고 먼 행성으로 탐험을 떠날 겁네다." 내게 전하려는 뜻이 담겨서, 그의 목소리는 틉틉했다. 나는 그가 본능적으로 내 허리에 팔을 두르려고 했다는 것을 느꼈 다. `흠. 달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우주복을 입었을 땐, 허 리에 팔을 두르려고 하딘 않갔디.' 김수형의 농담을 생각하고, 나 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촬영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갑자기 등이 가려워졌다. 그래서 몸 을 비틀었더니, 김이 눈치를 채고서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이 놈의 우주복은 불편하기가... 가려워도 긁을 수가 있 나, 머리가 흐트러져도 가다듬을 수가 있나. 손짓을 제대로 할 수 가 있나, 어깨짓을 할 수가 있나. 리 여사, 난 말입니다, 이 놈의 우주복만 입으면, 장기적으론 우주복을 입고 생활하는 것이 사람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리란 생각을 하곤합니다. 몇 세대 지나면, 우주복을 입었을 땐 말할 때 손짓으로 의사 소통 을 돕는 것이 아니라 눈썹만을 써서 의사 소통을 돕는 사람들이 나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님, 무엇이 그리 재미있습네까?" "아무 것도 아님메." 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런데, 저 그나, 난 우리 북반부레 남반부에 점점 뒤떨어지는 것이 자꾸 걱덩 이 되는구먼. 오늘 보니끼니, 남반부 사람들은 우린 생각도 하디 못한 것들을 추진하고 있던데..." 그가 진지한 낯빛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레 좀 떨어디고 있디요. 그러나, 누님, 너무 걱덩할 것 없습네다. 잘 됩 겁네다." "그래두... 그 사람들은 지금 이천 명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 들구 핵융합 발전소꺼지 세운다구 하는데... 먼지를 반응 질량인가 뭔가루 삼아서 세계에서 첨으루 달 나라 비행차를 만든다구두 하 구... 우리가 그런 일을 할라문 한참 있어야 하잖아?" "그렇긴 하디요. 그래도 우리가 그런 일들을 못 할 까닭은 없잖 습네까?" 순진함으로 가득한 얼굴로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어 그의 얼굴이 문득 열리면서 환한 웃음이 꽃송이처럼 피었다. "못 할 까닭이야 없갔디만... 우린 아래쪽에서 지원두 적구. 필 요한 사람들도 제대로 올려보내딜 않으니. 그리구 지원두 지원이 디만, 모든 걸 아래쪽에서 다 통제하려구 드니. 생각은 다 폐양에 서 할 테니 너희는 그저 시키는 대루 해라, 이런 식이디 않아? 그러나 남반부 사람들을 봐. 저그나도 눈으로 보았잖아? 말단 직원이 우리 기지에선 행정부장도 갖디 못한 권한을 갖구서 일을 시 원스럽게 처리하는 걸?"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놀랐습네다, 누님." 이번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누님이 똑똑 하신 줄이야 전부텀 잘 알았디만, 누님 정짜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디셨습네다." 그의 칭찬에 좀 머쓱해져서, 나는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거칠 고 단조로운 풍경이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다. <제 8장 6편> "누님, 우리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네다. 우리는 돈도 없고 관료 주의 때문에 일하기도 무척 어렵습네다. 그래도 여기는 달 나라입 네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네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요. 폐양에서 회전의자를 돌리는 관료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보여주어야 합네다." 그다운 얘기였다. 그래서 듣기 시원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래쪽 사람들에게 우리 의견을 당당하게 내놓고 그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받아들이게 될 날이 올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적어도 우리 생 전엔 올 수 없을 터였다. 물론 나는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혹시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날까 걱정이 돼서, 나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고개 만 끄덕였다. "누님, 메츨 전에 <셀레나잇 타이드>에서 서평을 하나 닒었습네 다. <새로운 봉건 시대>라는 책을 평한 글이었는데 거길 보니끼니, 이런 니야기가 있습데다. 우주 공간이나 달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 에 있는 사람이 처리하게 된다. 메시지가 오고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현장에 있는 사람 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리얼 타임으로 받아 일을 처리하기 어렵다. 그래서 경우맞춤이 아주 중요해딘다. 그래서 달 나라는 월면공화국 으로 독립하기 전에 실질적으로 독립적 지위를 누릴 수 밖에 없다. 대개 이런 내용입네다." "그럴 듯한 니야기구먼." "그렇디요? 이제 화성에 식민지가 건설되문, 거기선 그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요. 토성이나 해왕성의 위성들에 기지들이 설 치되문, 그런 기지들은 처음부텀 실질적으로 지구로부터 독립하게 되리란 니야기디요. 한 마디하고 며 분씩 기다려야 대답이 오는 처지에서, 무슨 니야기 가 되갔습네까? 이제 우리에겐 그런 사정이 아주 중요합네다. 여 기 달 나라에선 그런 우주 공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니끼니, 그걸 잘만 리용하문 우리는 관료주의의 속박에서 의외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네다. 가만히 관찰해보문, 발쎄 나아디고 있습네다. 우리가 많이 나아디 면, 다음엔 폐양의 관료들에게 일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겁네다." 그의 진지한 열정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옮아왔고 내 가슴 속의 그늘을 좀 걷어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세상 일은 어느 것이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도 그렇게 회의적인 생각을 품는 것이 어쩐지 좀 부끄러워져서, 나는 그의 눈길을 피해 뒤를 돌아다보았다. 뜻밖에도 그 조그만 계집아이가 아직 보였다. 거친 지평 위에 우 습강스러운 우산을 쓰고서 혼자 선 모습은 다시 내 가슴에서 안스럽 고도 자랑스러운 감정을 불러냈다. 문득 내 가슴에 덮였던 그늘이 걷혔다.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희망이 가득한 가슴으로 나는 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석쉰 목소리가 나왔다. "저그나 말이 맞슴메." <제 9장 1편> `자러 가야디. 발쎄 열한 시가 다 되어 가는데...' 나는 한번 더 스스로에게 일렀다. 그러나 움직이진 않았다. 그 저 부엌 안을 다시 둘러다보았다, 무엇을 찾는 눈길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저녁은 장영실 기지에서 먹었고 내일 아침 식사 준비는 이미 끝난 터여서, 부엌에서 할 일은 없었다. `텔레비전이라두 하나 있으문, 이럴 때...'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곳에선 텔레비전조차 자기 것을 가질 수 없었다. 무게가 나가 거나 부피가 큰 물건들은 이곳에선 모두 사치품이었다. 물론 휴게 실엔 텔레비전이 세 대나 있고 브이티알도 한 대 있으니까, 정 보고 싶으면, 그리로 가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뭐 꼭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가슴이 달뜨면서도 허전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으므로, 오래된 영화 같은 것을 좀 보다가 자리에 들고 싶을 따름이었다. 문이 열리고 리명규가 들어왔다. "누님." 반가운 웃음이 저절로 내 얼굴에 퍼졌다. 나는 세척대에 기댔던 엉덩이를 뗐다. "아즉도 잠을 자디 않았슴마?" "이제서야 샤워를 했습네다." 느린 웃음을 얼굴에 올리면서, 그 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넘겼다. "통신실에 가서 뉴스를 점 듣느라구..." 그러고보니, 그의 머리가 젖어 있었다. 그가 샤워를 끝내고 수건 으로 몸을 말리는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너무 생생한 그 심상을 눈앞에서 억지로 밀어내면서,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뉴스?" "네. 아래쪽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디 궁금해서... 그런데, 누님." "응?" >내레 누님께 보여드릴 게 하나 있는데... 누님 지금 피곤하시디 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별루... 실은 잠이 잘 올 것 같디 않아 서 텔레비전이나 점 볼까 하던 참인데..." "아, 그러셨습네까? 그러시문, 온실로 가십세다." 그가 다가와 서 곁에 섰다. "온실? 온실은 왜?" 온실을 찾기엔 좀 늦은 시간이었다. 햇살이 환하긴 했지만. "꽃이 하나 폈는데, 누님께..." 내 얼굴을 살피면서, 그가 말끝 을 흐렸다. "그래? 그러문 가서 봐야디." 나는 선선히 응락했다. "꽃은 메칠 전에 폈는데, 기회가 마땅티 않아서..." 그가 내 어 깨에 손을 가볍게 둘렀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낮에 남반부 텔 레비전에 함께 나갔단 얘기가 퍼져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제 그와 나 사이의 관계를 무슨 특별한 사이로 여기는 눈치였다. 처음엔 점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9장 2편> "통신망에 들어온 뉴스들을 보니끼니, 이번 정변에 대해서 벼라별 니야기들이 다 나옵데다." 복도의 벽과 천정을 덮은 덩굴들을 전문 가의 가벼우나 놓치지 않는 확실한 눈길로 살피면서, 그가 말했다. "눈치를 보니끼니, 이번 정권의 실력자가 남용순 중장이란 것은 거의 확실한 모양입네다." "남용순 중장?" "네. 지금 군사보위사령관이랍네다. 만경대파의 핵심 멤버라고 합데다." "만경대파라문, 우리 기지에 대해서..."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디요. 우리 기지에 대해서 돠은 감정을 갖딘 않았갔디요." "그럼 어드케 하디?" "할 수 없디요 뭐. 총리가 바뀌었을 때, 이미 각오한 것인데..."나 를 돌아다보면서,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그 사람들이 우 리 사령관님을 불러내릴까 걱덩이 됩네다." "우리 사령관님을? 왜 사령관님을 불러내리디?" 그는 잠시 대꾸하지 않고 걸었다. "우리 사령관님께 만경대파에 속하디 않으시거든요. 사령관님은 야전군파에 속하시잖습네까? 이 번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모두 정치군인들입네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당장은 아닐디라도, 그 사람들이 월면 기지 사령관을 자기 네들 사람으로 바꾸려고 할 겁네다." 나는 여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가 갑자기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혼자 아래쪽으로 내겨가시려고 뜨락 또르에 오르시는 사령관님의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 고개를 수그리고 걷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사령관님만이 아닐 겁네다. 아마도 우리 요원 모두를 불러 내릴 겁네다. 사상교 육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우리 요원 모둘?" 나는 기계적으로 물었다. 두려움이 가슴의 살을 꽉 움켜쥐었다. "네." 내 굳은 얼굴을 보더니, 그가 심각해진 낯빛을 풀었다. "누님, 너무 걱덩하디 마시라요." "어드케 걱덩하디 않을 수 있갔어?" 내가 쏟아낸 것은 속에 쌓인 두려움이었지만, 입밖에 내고보니, 그에게 화를 낸 것처럼 들렸다. "사령관님께서..." "쉬이." 그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에 댔다. 하려던 얘기가 무엇인지 깨닫고, 나는 나오던 말을 급히 되삼켰다. 온실 앞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온실 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그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누님." 그의 얼굴에 뜻모를 웃음이 슬며시 피어났다. "응?" 그에게 미안했던 참이라, 나도 좀 열적은 웃음을 지었다. "걱덩이 되시갔디만, 그래도 너무 걱덩하디 마시라요. 새옹지마 란 말도 있잖습네까?"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 폈다. 그러나 그의 웃음 밑엔 걱정이나 두려움은 깔려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가슴에 아직 남아있던 두려움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 9장 3편> "누님, 우린 지금 우리레 지구가 아니라 우주 공간에서 살고 있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네다. 아까 내레 니야기한 것처럼, 월면공화국이 독립하기 전에 실질적 으로 독립적 지위를 누리리라고 예측한 사람들도 있습네다. 폐양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딘 못할 겁네다." 그가 문을 열 었다. 온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그리 생각 해서 그런지, 온실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보다 공기가 신선한 것 같 았다. 냄새는 분명히 훨씬 좋았다. 창과 천정을 뒤덮은 덩굴풀들 사이로 떨어진 햇살이 팔뚝을 간지 럽혔다. 온실은 천정과 세 벽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누님, 이리로..." 리가 나를 온실 안쪽으로 이끌었다. 온실에 들어와본 지 한 주일쯤 되었는데, 그 동안에도 온실은 풀빛 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꽃도 훨씬 많이 핀 듯했다. "리명규 동무, 사업이 잘 되는 모양이웨다. 저번보다 작물들이 많 아딘 것 같은데..." 나는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보입네까?" 그가 반갑게 받으면서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 리곤 아쉽게 덧붙였다, "물만 조금 더 있으문..."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하에 새로 판 공간을 수경 재배에 쓰고 싶했는데, 수경 재배 를 제대로 시작하기엔 지금 기지에 있는 물이 넉넉지 못했다. 어느 월면 기지에서나 물은 기지의 확장을 제약하는 요소였다. 아 래쩍에서 모든 얘기들이 돈 타령으로 끝나듯, 이곳에선 모든 얘기들 이 물 탸령으로 끝났다. "누님, 여기 보시라요."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쪼그려앉았다. 양배추를 가꾸는 곳이었다."뭔데?" 그의 무릎을 짚고 나도 쪼그리 고 앉았다. "이걸 보시라요." 그가 가리킨 것은 양배추 잎사귀에 난 구멍이 었다."꼭 벌거지가 파먹은 구멍같구먼." 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벌거지가 생겼단 니야긴가?" "제." 그가 싱긋 웃었다. "배추벌레가 생겼습네다." "그래?" 배추벌레가 생겼단 얘기는 좀 뜻밖이었다. 그가 그 동안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애썼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벌레가 생기면, 골치가 아플 터였다. 기지는 너무 조그만 생태계라, 해충을 없애려고 농약을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노력은 지금까진 헛되지 않아서, 며칠 전에도 그는 자랑했었다, 진딧물이나 깍지벌레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아, 여깅구나." 양배추를 살피던 그가 반갑게 소리쳤다. "누님, 여길 보시라요." 그가 양배추 뒤쪽을 가 리켰다. 고개를 빼어 넘겨다보니,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잎사귀 위에서 꼬물거렸다. "어드케 저런 벌거지가 나타났디?" "나도 잘 모르갔습네다. 진딨물이나 깍지벌레라문, 또 모르갔는 데, 배추벌레라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가 생긴 이래 최대의 수수께끼로구먼." 그가 머리를 젖히고 소리내어 웃었다. <제 9장 4편> 그의 맑은 웃음이 내 가슴에 남은 두려움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냈 다. 문득 더운 기운이 아랫도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무 릎을 흔들었다. "저그나, 그런데 왜 잡디 않고 그냥 놔두디? 키우기라도 할 셈이 신가?" "네, 한번 키워볼랍네다." 그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뭐? 키워?" 나는 입을 벌리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원래 뚱딴지 같은 소리를 잘 하긴 했지만, 배추벌레를 키운단 얘기는 곧 이 들리지 않았다. "네. 누님, 생각해보문, 얼마나 신기한 일입네까? 딴 벌레도 아 니고 배추벌레라니. 여기 월면 기지에서.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 온실 안을 가리켰다. "배추벌레가 나타났다는 건 이 온실이 하나의 생태계가 되었다는 증거아니갔습네까?"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구먼." 속에 품은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토해놓는 내가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선 그의 비위를 맞출 얘 기만 고르곤 했다. "한번 생각해보시라요, 누님, 이 놈이 자라서 나비가 된 걸. 배추 흰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서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는 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흰 나비가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모 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기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나로선 당장 벌레 먹은 양배추로 료리를 만들 일이 마음에 걸렸다. "나비레 이 꽃에서 데 꽃으루 날라댕기는 것이야 도티. 나비레 그리하문, 꽃두 열매를 잘 맺을 거구. 그렇긴 한데, 저그나, 이 배 추벌거진 꼭 양배추만 먹어야 되나? 딴 건 안 되구?" "하하. 누님, 걱덩하디 마시라요. 벌레 먹은 양배추를 갖다 드 리딘 아니 할 테니끼니." 우리는 함께 웃고 일어섰다. "난 걱덩할 것 하나도 없음메. 벌거지 먹은 남새를 갖다 주문, 저그나한텐 그런 닢사구만 골라서 주디." 해놓고 보니, 듣기 좋은 농담이 아니었지만, 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여깁네다." 그가 멈춰서서 온실 안쪽 구석에 가까운 곳을 가리 켰다. 온상처럼 만들어진 곳이었다. 입구를 빼놓곤 호박 넌출들이 덮어 서, 풀빛 천막처럼 보였다. 호박은 온실에서 가장 번성하는 작물이 었다. 달 나라에선 동물보다 식물 , 식물에서도 나무보다는 풀이, 특히 덩굴풀이, 잘 자란다고 했다. "쉴 곳을 또하나 만들었습네다. 데 앞에 있는 곳보다 여기가 좀 아늑합네다. 누님도 잠깐 쉬고 싶으시문, 여기로 오시라요." 단숨 에 설명하고서, 그가 좀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이어 몸을 숙이고 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 슴이 조여들었다. 안은 밖에서 보기보단 넓직했다. 밖에 있다 들어와서 그런지, 좀 어둑했지만, 잘 정돈되어서 깔끔했고 아늑했다. 한쪽에 반으로 접 힌 매트리스가 있었고 그 위에 전산 인쇄지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반대쪽엔 비닐로 덮인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꽃이 핀 화 분 둘이 있었다. "여기 앉으시라요." 그가 상자를 덮은 비닐을 손으로 쓸어 먼지 를 털어냈다. 나는 거기에 엉덩이맘 걸쳤다. "보기보단 편한데. 저그나레 만 든 의자라?" "네." 그가 싱긋 웃었다. "누님, 이것이라요. 이것이 그 꽃이 라요." 그가 내 옆에 놓인 화분을 가리켰다. <제 9장 5편>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붉은 꽃이 탐스럽게 핀 선인장 을 살폈다. 그러고서야 나는 그의 손길이 그 옆에 있는 조그만 풀 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눈길로 물었다, 무슨 얘기냐고. "이건 애기장대라는 풀입니다." "애기장대?" "네, 애기장대. 이리 볼품없이 생겼어도, 여기 월면 기지들에선 많이 가꾸는 풀입네다. 이 풀이 실은 우주선 안에서 씨에서 씨까지 한 생활주기를 보낸 첫 식물입네다." 나는 잠시 그의 말뜻을 새겼다. "씨에서 씨까지라. 그러문 이 풀의 씨를 지구에서 받아서 우주선 안에 뿌려 다시 씨를 받았단 니 야긴가?"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견스러워하는 낯빛을 지었다. 그렇게 한 풀이 대견스러운지, 아니면 자기 말뜻을 알아들은 내가 그런지. 문득 흥미를 느끼고, 나는 상자에서 내려와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 풀이 그랬단 말이디..." 대궁 끝에 조그만 흰 꽃들이 촘촘히 붙어서 피어 있었다. 잎새는 길쑴하고 줄기엔 가는 털이 나있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해도, 좋게 볼 데가 없는 풀꽃이었다. 들판에서 만났다면, 누구라도 두 번 쳐다보지 않을 풀이었다. "아주 노날 니야기디요. 식물이 과연 중력이 없는 우주선 안에서 도 제대로 자라날 수 있난 아무도 확실히 몰랐던 시절이었디요." "그랬나? 그런데 이 풀은 어디서 났디? 이것도 남반부 사람들 한테서 얻었나?" "네. 장영실 사람들한테서 얻었습네다." 그가 좀 검연쩍 낯 빛을 지었다. "그 사람들이 그거는데, 전라도 내장산에서 풀씨를 받아왔다 합데다." "내장산?" 나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문 거기서만 자 라나?" "그건 잘 모르갔습네다. 아마 그렇딘 않을 겁네다. 하여튼 이 풀이 처음으로 우주선에서 처음으로 씨를 맺은 풀이라길래, 씨를 받 아왔디요. 꽃이 피문, 누님께 드릴려구..." 그가 한 얘기의 뜻이 문득 여름날의 소나기럼 내 마음을 적셨다. 소나기가 몰아오는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흙냄새가 내 얼굴을 휩쌌 다.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그의 거센 눈길을 받아들 였다. 내 두 다리가 제 뜻으로 열렸다. 그가 쪼그린 채로 한 걸음 내게로 다괌왔다. 내 허벅다리에 얹힌 그의 손이 여름 햇살에 잘 달궈진 돌처럼 뜨거웠다. 그 돌에 잠긴 햇살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떨고서, 나는 고개만 돌려 그 풀꽃을 내려다보 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조그만 들꽃들이 으레 그러하듯, 조그만 꽃이 그런데로 아름다웠다. 문득 그 볼품없는 풀꽃이 어떤 탐스런 꽃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주선 안에서두 풀이 제대루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 고... 그래서 낮선 세상에서두 새로운 풀포기들이 자라나리란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풀... 이제 달 나라에 서두...' <제 9장 6편> "누님." 두 손으로 내 허벅다리를 움켜쥐면서, 리가 억눌린 소리 를 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맑은 눈 속에 거센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길 같기도 하고 물길 같기도 한 그 기운은, 한번 그의 눈에서 나오면 무엇으로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 손이 저절로 그에게로 뻗어나갔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축축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그의 냄새가 내 얼굴을 휩쌌 다. "아." 가느란 신음이 나오면서, 내 눈이 감겼다. 이어 나도 모 르는 새 벌어진 내 입으로 그의 혀가 지그시 밀고 들어왔다. 세상이 빙그르 돌면서 아득해졌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매트리스를 펴는 동안, 나 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흔들리는 몸을 따라 정신이 출 렁거렸다. 마침내 매트리스 위에 눕혀지자, 한숨이 나왔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천정을 덮은 호박 넌출이 눈을 가득 채웠다. '호박 넌출 아 래 신방을 꾸몄구나...' 어쩐지 지금 이 자리가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잊혀졌던 기억 한 토막이 앞으로 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렇게 천막처럼 하늘을 가린 닢사구들을...'j 기억이 고개를 들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어째서 이 자리가 그 리도 낯익게 느껴졌는지를. 효영이를 밴 곳도 이렇게 너른 잎사귀 들이 하늘을 가린 곳이었었다. 묘향산 기슭이었다. 그가 서둘러 옷을 벗고 옆에 누웠다. 막 샤워를 한 그의 살갗이 시원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날 묘향산에서 있었던 일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쳤다. 그 아득한 시절의 기억은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았 다.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썰물처럼 저절로 물러나기 시작 했다. 내 몸은 그 기억이 뒤에 남긴 갯벌이었다. 벗고 누운 그 갯 벌로 새로운 물살이, 시원하면서도 뜨거운 물살이, 밀려들어오고 있 었다. "아." 외마디 소리가 새어나왔다. 리의 입속으로 한껏 빨려들어 간 내 왼쪽 젖에서 저릿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도 모르 는 새 내 팔은 그의 머리를 힘껏?안고 있었다. 마침내 내 몸 위에 그의 몸이 묵근하게 실렸다. 익숙한 기억에 끌려서, 내 몸이 풀리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하려고 애썼지만, 한껏 일어선 그의 욕정이 그를 거세게 몰아세웠다. 아픔 한 토막이 갑자기 마른 쇳냄새를 하고 다가왔다. 그 냄새가 낯설어서, 내 마음은 한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 냄새는 오래 가 지 않았다. 뒤따라온 즐거움의 촉촉한 냄새가 익숙한 몸짓으로 품 을 벌려 낯선 냄새를 안았다. 리의 숨결이 거칠어지면서, 두 해 동안 살 속에 고였던 절망과 외 로움이 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놀림이 빨라지면서, 그렇게 울어나온 절망과 외로움이 누런 가루로 우리 둘레에 흩어졌다. 그 위에 그의 땀이 뚝뚝 떨어졌다, 마른 땅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어느 순간 그의 몸놀림이 갑자기 빨라졌다. 내 몸이 먼저 알아차 리고 진저리를 치자, 내 마음이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욕 정이 내뿜는 더운 바람을 타고, 자유로워진 내 마음은 애기장대 꽃 들이 하얗게 핀 열락의 고개를 긴 날갯짓 한 번으로 넘었다. <제 10장 1편> '냄샌 구수한데...' 나는 코로 가져갔던 돼지고기 통조림을 헤아 리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맛은 어떨디 모르갔다. 아무래도 생 고기보단 못하갔디?' 이곳에선 생고기야 물론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리명규의 얘기 로는 어떤 기지에선 돼지를 기른다고 했다. 고기 때문이 아니라 실 험을 위해서. 가축들 가운데선 돼지가 낮선 우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다고 했다. 배에서도 잘 자라서, 옛날엔 바다를 건너 먼 곳 으로 가는 돛배마다 돼지를 길렀다고 했다. '칼파스를 먹어본 지도 이제...' 효영이 아버지와 함께 가끔 들 렀던 모란봉 근처 칼파스 집을 떠올리면서, 나는 통조림의 국물을 큰 남비에 따르고 고기를 도마 위에 조심스럽게 쏟아놓았다. "누님." 리명규의 목소리였다. 나는 긴장해서 칼을 집으려던 손길을 멈췄다. 좀 당황스러웠다.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줄곧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를 다시 대할 때 어떤 낯빛을 해야 징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판이었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얼굴에서 낯빛을 아예 지우고서 천천히 돌아다보았다. 리는 그냥 문간에 서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얼굴에 수줍은 웃음 을 띠고 손엔 애기장대 화분을 들고. "잘 잤슴마?" 긴장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좀 삐걱거렸다. "네, 누님. 이거..." 그가 화분을 내밀었다. 안도감이 조여들었던 가슴을 부드럽게 씻었다. 나는 그의 됨됨이 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에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번 동침하고나면, 사내들은 너무 오만해지는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사내들이 동침한 녀자를 자기들의 소유물로 여기는 듯했다. 그렇지 않을 것같았던 사내들도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행동하 는 일이 흔한 듯했다. 하긴 효영이 아버지도 그랬었다. "고맙슴메." 나도 모르게 얼굴에 퍼진 웃음이 밝다는 것을 따라 서 밝아진 그의 얼굴이 확인해주었다. "여기다 두는 것이 아무래도..." "그렇디 않아도 꽃이 핀 화분이 하나 있었으문, 하던 참인데... 여기다 놓디." 나는 수상기가 놓인 구석으로 다가갔다. "네." 그는 내가 가리킨 곳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꽃이 너무 작아서..." "그렇디도 않슴메. 언뜻 보문, 꽃이 별 것 아닌 것 같디만, 가만 히 들여다보문, 제법 곱슴메." "그렇디요?" 그가 조심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내 몸이 저절로 그에게로 쏠렸다. "저그나." 불러놓고보니, 저그나란 말이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그렇다고 따로 좋은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네?" "내레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인데요?" 그의 손이 내 왼쪽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 었다. <제 10장 2편>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손길에서 무엇이 내 살로 흘러 들 어오는 듯했다. "내레 어느 높은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내 둘레에 애기장 대 꽃들이 하얗게 피어 있더라구. 그런데 어드메서 흰나비 한마리 가 팔랑팔랑 날아오더니만, 바로 내 다리 사이에 핀 꽃 위에 사뿐히 앉더라구." "그래서요?" 문득 짙어진 목소리로 그가 채근했다. "그러더니, 어드케 된 일이디 모르갔디만, 그 흰 나비레 저그나가 되어서..." 아무리 꿈 속의 일이었지만, 얘기하기가 쑥스러워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누님." 갑자기 욕정이 솟구쳤는지, 내 엉덩이를 움켜쥐면서, 그 가 억눌린 목소리로 불렀다. "내레 잠깐..."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황급히 떨어졌다. 돌아다보니, 최옥순 소좌였다. 텔레비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우 리는 인사를 나눴다. "휴게실에서 이걸 가져왔디. 곧 뉴스가 나올 시간이라..." 좀 떨떠름했던 마음을 뚫고서,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왈칵 솟았 다. 리와 내가 나오는 장면이 9시 <뉴스 모니터>에 나온다는 것이 이미 어제 알려졌으므로, 우리 요원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을 볼 터였 다. 바쁜 아침에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부엌에서 일하는 내가 볼 수 있게 텔레비전을 가져온 것은 마음에서 울어나오지 않으면 보여주기 어려운 친절이었다. 그녀가 부엌을 한바퀴 둘러다보더니, 문 옆의 벽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걸 데가 여기밖엔 없는데." "네, 거기가 도캉습네다." 리가 냉큼 동훌했다. "그녀는 벽에 텔레비전을 걸더니 서너 걸음 물러나서 괜찮은가 살 폈다. "조금 높긴 하디만, 뭐..." "잘 됐시요." 리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녀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화면에 웃은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마구 달리는 비행차 한 대가 나왔다. 그 뒤를 경찰 비행 차가 뒤쫓고 있었다. <반도방송>의 연속극이었다. 그녀가 돌아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제서야 그녀는 화분을 보 았다. "어, 이게 무슨 꽃입네까?" "애기장대란 풀입네다." 리가 대꾸했다. "꽃이 폈길래..." "애기장대?" "네. 실은 이 풀이..." 리가 그녀에게 애기장대의 내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두 사람에게서 물러났다. 료리대로 돌아와 도마 위의 고기를 썰어 남비에 넣었다. "이 풀이 처음으로 우주선에서 씨를 맺은 풀이라..." 리의 설명 이 끝나자, 최가 허리를 굽히고 그 풀을 살폈다. "리 동무, 그런데 그 우주선이 무슨 우주선이었습네까?" "살류트라고, 노날 소련의 우주 덩거장이었습네다." "소련? 그러문 아주 노날 니야기로구먼. 이십세기 일이디요?" "네." 그가 싱긋 웃었다. "이십세기 니야깁네다." "그땐 소련이 우주 탐험에서 가장 앞섰다구 하디요? 미국이나 유럽 연방보다두 앞섰다구?" "네. 맞습네다. 스푸트닉은 소련이 쏘아올렸고 가가린은 소련 시민이었디요. 우주 공간에서 사고로 죽은 첫 우주인꺼지도 소련 시민이었습네다. 소련이 무너져서 여러 나라로 갈라지기 전꺼진, 소련이 우주 탐험을 주도했습네다." 어느 새 그의 목소리와 낯빛이 진지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때 소련의 우주 계획을 맡았던 사람은 <소련은 우주의 해안이 되었다> 라고꺼지 자랑했습네다." <제 10장 3편> "그런 소련이 어드케 그리 망했디?" 최가 혼잣소리 비슷하게 탄 식했다. "리 동무, 난 리해할라구 애를 써두 도저히 리해할 수가 없습네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그렇게 많은 것을 성취한 사회가... 자본가 계급만을 위하는 자본 주의 사회들이 더리 떵떵거리고 사는데..." 양배추를 썰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이 우리 북반부 사람들이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 "뭐 소련꺼지 니야기할 게 있습네까? 우리 북반부만 봐도 그렇디 요." 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남반부보다야 우리가 훨 씬 잘 출발했디요. 남반부 정권이야 미 제국주의자들이 키운 친일파들 아닙네까? 우리 북반부는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고서 진정한 인민 들의 락원을 세웠디요. 그리고 처음엔 우리가 훨씬 더 잘 살았습네다. 지금은 잘 믿어디디 않는 일이디만. 그러다가 우린 점점 뒤디고 남반분 점점 잘 살게 되어서, 이젠 비교가 되디 않을 정도로 울리가 뒤떨어뎠으니..." 그는 어깨를 추스렸다. "그런데, 리 동무, 우리 기지하고 장영실 기지를 통합한다는 니야 기가 있습데다. 두 기지의 사령관들 사이에 이미 깊은 니야기들이 오갔다구 하던데. 리 동문 그런 니야길 듣디 못했습네까?"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나도 듣긴 듣었습네다." "리 동문 어드케 생각하시요? 그런 니야기레 사실인 것 같습네 까?" "글쎄요. 전 잘 모르갔습네다만," 그가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럴 가능성도 있긴 있습네다..." "...라면, 역시 <바이리날 씨>죠. 앞으론 꼭 녹원 약품의 <바이 리날 씨>를 찾으세요..." ,어느 사이엔가 텔레비전에선 방송극이 끝 나고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새장의 카나리아가 맑은 가락 한 마디 를 뽑았다. "이번에 총리가 경질된 것도 관련이 있다고 합데다." 흘긋 텔레 비전을 살피면서, 최가 말했다. '최 소좔 도대체 어디서 저런 니야기들을 듣나?' 카나리아 모이 를 세척대의 서랍에서 꺼내면서,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살 폈다. "그렇갔디요. 이번에 들어선 정권이 워낙 우주 계획에 적대적이 니끼니, 사령관님께서도 무슨 대책을..." "어떤 사람은 우리레 어저께 장영실에 간 것두 다 리유가 있다구 꺼지 합데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디도 모르디요." 그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종 소리가 나면서, 9시 보도 프로그램이 시작 되었다. 머리를 유행에 맞춰 짧게 깎은 아나운서가 인사했다, "시 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월 이십칠일 피비씨 <뉴스 모니터> 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내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리가 나오지 않 았더라도, 우리는 보도를 놓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우리가 북반 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는 데는 남반부의 방송들보다 더 좋은 것 이 없었다. "오늘 첫 소식은 남북 관계에 관한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연방 의회의 의장단은 개성 만월대의 연방의사당에서 회의를 갖고서 최근 북한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세 변화를 토의하기 위해 연방 의회를 소 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소식은 정치부 이순동 기자가..." <제 10장 4편> 그 소식 다음엔 북반부에 새로 들어선 정권의 실력자에 대한 소식 이 나왔다.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눈치를 보니, 남반부에서도 아 직은 평양의 사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에 장영실 기지에 산소추출 공장이 세워졌다는 얘기가 나 왔다. 우리는 모두 긴장해서 보았다. 그러나 리와 내가 나온 장면 은 아주 짧아서 이내 끝났다. 저녁께 찍은 장면들의 십분지일도 방영되지 않은 듯했다. 적잖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내가 살기 힘든 달나라로 올라온 까닭을 설 명하는 장면이 잘 나와서, 다행스러웠다. 리와 최가 함께 웃었다. "더 괜찮은 일로 생각됩네다." 최가 내 말씨벧 흉내냈다. "하하, 리명순 동무, 텔레비전에 여러 번 나와 본 솜씜네다." 우리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변인인 세코 움베라 가나 외상은 달 나라는 이미 월면 기지 를 건설한 나라들만의 것이 아니고 온 인류의 공동 재산이라는 사실 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월면 극지의 빙상을 개발하는 일은 언제나 그런 사실을 기억하면서 <월면 개발에 관한 국제 협약>과 유엔 총회 결의 이천 사십팔 호의 규정에 따라 조심스럽게 허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 다..." 우리가 이리로 올라올 무렵, 일본의 지질 탐사대가 남극에 가까운 <쉬레딩거 계곡>에서 꽤 큰 얼음 덩이를 찾아냈다. 그래서 월면 기 지들의 극지 얼음 탐사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졌고 달 나라의 지역적 분할 문제가 다시 심각한 정치적 논점이 되었다. 문이 열리더니, 김상윤 소좌가 들어섰다. "안녕들 하십니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김 소좌가 지금 부엌에 찾아올 일은 없었 다, 사전 허가없이 텔레비전에 나간 일을 따지는 것을 빼놓으면, 리 와 최는 제대로 대꾸했지만, 나는 그저 우물거렸다. "리명순 동무." 김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네, 김 소좌 동무." 나는 그의 웃음에 좀 마음이놓였다. 내가 걱정한 것은 나 때문이라기보단 리명규 때문이었지만, 내게 웃는 낯 을 보이다가 이내 리에게 화를 낼 것 같진 않았다. "리 동무 텔레비전에 나온 걸 지금 보고 오는 길인데, 말을 아주 잘 합디다." "감사합네다." "그런데 한 가지..." 그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앞으 론 그런 데 나갈 때, 나나 민장석 상사한테 미리 한 마디만 해 주시 오. 리 동무도 잘 아시겠지만, 그게 옳은 절차앙이요?" "네. 알갔습네다." 그는 리를 돌아다보았다. "리명규 동무도 마찬가지요." "네. 잘 알갔습네다." 리가 머리를 긁었다. 전화기 종이 울렸다. 가까이 있는 최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우리 요원들이 그렇게 허가도 받지 않고 그런 데 나가면, 내립장 이 아주 곤란할 것앙이요? 잘 좀 부탁합네다." "리명순 동무." 수화기를 든 채, 최가 나를 불렀다. "통신실에 서 온 전환데, 사령관님께서 리 동무를 찾으신답네다. 지휘소로 가 보라요."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김에게 묻는 눈길을 던졌다. 그가 가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명순 동무레 지금 사령관님께 갑네다." 최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제 10장 5편> 나는 일할 때 흰 가운 대신 입는 흰 재킷과 흰 모자를 벗었다. "그러문 사령관님 방에 가보갔시요."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 하고서 문쪽으로 향했다. "누님." 리가 불렀다. "왜?"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나는 고개만 돌렸다. "누님께서 사령관님께 야단맞을 일 한 적 없디요? 있습네까?"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뉘레 알갔어? 갔다 오문, 니야기해 줄께."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내 허벅다리에 머문 김의 눈길이 끈끈했 다. 직업이 그런데도, 김은 자신의 욕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나는 그의 눈길을 태연히 무시했다. 그러나 속으론 적잖이 마음 이 쓰였다. 그의 눈길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간밤에 리와 동침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한 마당에 그 렇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녀자란 다 그런 건가? 아니문, 나만 그런가?' 복도로 나와 문 을 닫자, 어쨌든 김과 리의 눈길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아, 리 동무." 내가 사령관님 방 앞에 닿았을 때, 문이 열리면 서, 사령관님의 당번이자 운전병인 한호가 나왔다. "들어가보시라 요. 기다리십네다." "네." 한의 낯빛이 밝아서, 나는 좀 안심이 되었다. `사령관님 께서도 이번 대담을 보신 모양이구나.' 내가 사령관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사령관님께선 화상전화 앞에 서 계셨다. 사령관님께선 언제나 서서 전화를 하셨다. 화면엔 사 모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사령관님께선 내 인사에 고래를 끄덕여 답례하시고 나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셨다. "여보, 효영이 오마니레 여기 왔소." "사모님, 안녕하셨습네까?" 전화기 카메라 앞에 서자, 나는 사모 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나야 뭐 늘 그렇디. 효영이 오마니도 그래 잘 있었슴마?" 사모 님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카랑카랑한 뒷맛이 어렸 다. "네. 저두..." "텔레비전을 봤디. 어찌나 반가운디." 지구에서 오는 까닭에, 사모님의 얘기는 역시 더뎠다. 그래서 얘기가 무척 느리게 나아가 는 느낌을 주었다. "사모님께서두 텔레비전을 보셨습네까?" "그럼. 근식이 외큰아바지레 아츰에 알려주셨는걸." 근식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아픔 한 줄기가 가슴을 후비고 지나 갔다. 나는 사모님의 얼굴을 살폈다. 사모님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같았다. 슬픔이나 그리움과 같은 감 정이 어린 곳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사모님은 나보다 훨씬 큰 아픔을 겪으 신.것을. 나는 남편과 자식이 죽은 것만 슬퍼하면 되었지만, 사모 님께선 자기에게 맡겨진 외손자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까지 견디 셨을 터였다. <제 10장 6편> "사모님께서 이젠 안경을 쓰셨습네다." 저번에 화상전화로 뵈었} 을 때는, 사모님께선 안경을 끼지 않으셨었다. 눈이 침침해서 병원 에 가봐야겠다곤 하셨지만. "그래." 사모님의 얼굴에 어린 웃음에 좀 서글픈 기운이 섞였다. "내가 늙었다는 증거가 또하나 늘어난 셈이디." "안경을 끼시문, 점 불편하실 텐데... 수술을 받으시문, 아주 간 단하게..." "나도 수술을 받고 싶었는데. 병원에 가보니, 의사레 하는 말이 난 각막 수술을 받기엔 너무 늙었다는 거야. 게다가 수정체가 굳어 진 건 어쩔 수가 없다나. 그래서 안경을 끼는 게 도캉다구..." 사 모님이 가볍게 한숨을 쉬셨다. "그래두 안경이 잘 어울립네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서, 나는 꽤나 다행스러웠다. "그래?" 사모님의 낯빛이 좀 밝아진 듯도 했다. "그런 니야길 하는 사람들이 있더구만. 내가 듣기 도흐라구 하는 니야긴 아닌디 모르디." "아닙네다. 정짜로 잘 어울립네다." 나는 급히 대꾸했다. 다행 스럽게도 요즈음엔 젊은이들이 멋으로 안경을 끼고 다닌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것이 생각났다. "요즈음엔 덞은이들이 안경을 많이 낀 다구, 그게 류행이라구 하던데요." 사모님은 가볍게 웃으시면서 고개 끄덕이셨다. "사모님께서 빨리 이리로 올라오셔야 할 텐데요..." "그래야 될 텐데..." 사모님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이어 사모 님께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셨다. "효영이 오마니." "네, 사모님." "만일에... 효영이 오마니,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서, 내레 날래 올라가디 못하게 되문, 효영이 오마니가 근식이 외큰아바지를 잘 보 살펴드리게. 물론 지금도 효영이 오마니가 잘 한다고 그러시디 만..." 검은 안개가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분명히 사모님은 무엇을 알 고 계셨다. 전화로 얘기할 수 없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좋 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나도 사모님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면서 말했다, "네, 잘 알갔습네다." "그러문, 잘 있으라요. 이리 얼굴을 보니, 반갑구. 마음도 놓이 구." "네, 안녕히 계십시요."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카메라 앞에서 물러났다. 사령관님께서 사모님과 얘기하시는 것을 방 한쪽에서 지켜보다가, 나는 사령관님의 말씨가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령관님은 딱딱하게 말씀하는 분이 아니셨다. 사모님과 애기하 실 때는, 말을 자주 채뜨리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공적인 자리에 나가신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 셨다. 전파가 풍요의 바다와 평양 사이를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시 기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았다. 문득 리명규가 들려준 <새로운 봉건시대>란 말이 생각났다. `정 말로 그럴디도 모르디. 이렇게 멀리 떨어딘 곳에선...' "무엇이 그리 재미있디?" 사령관님의 말씀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새로운 봉건시대란 말이 마음을 꽤나 푸근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이곳과 지구 사이 의 큰 거리가 우리 기지와 요원들을 평양의 관료들로부터 지켜줄 것 만 같았다. "아닙네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제 11 장 1편> 다른 요원들이 뜨락또르에서 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내린 나 는 사람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둘레를 살펴보았다. 어둑한 풍경 속 에서 드래코 태번의 풀빛 네온 싸인과 환한 가로등 불빛은 환상적 경험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점은 저번과는 상당히 달라보였다. 물론 그때는 낮이었고 지금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점은 밤 풍경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서있었다. 환상적 분위기까지도 어쩐지 자연스럽 게 다가왔다. 내 기억 속의 주점은 비정하게 내리지지는 햇살 속에서 황량한 풍경 과 부딪쳐 불협화음을 내던 인공적 물체였다. '드래코 태번이 바뀌었을 린 없고... 내가 바뀌었단 니야기가 되나' 나는 스스로에게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문득 그 싱거운 얘기 속에 든 진실의 알맹이가 뜻밖으로 단단한 몸 짓을 하면서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 다. 어둠 속에 달빛을 받고 흐릿하게 빛나는 우주복만 문에 들어왔 다. '그땐 막 낮이 시작되었을 때였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둘 러다보았다. '지금은 초승달이 떴으니, 겨우 반 달이 지났는데... 그 동안에 세상도 바뀌었고 나도 바뀌었고...' 세상은 분명히 바뀌었다. 평양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새로운 사람들이 정무원과 인민군의 요직들을 차지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새로운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진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큰 변화들이 우리 기지에 영향을 미치지않을 수는 없었다. 과 학기술부에서 비용을 한껏 줄인 긴축 실행 예산을 만들어 보고하라 는 지시가 올라왔다고 했다. 우리 요원들은 그 지시를 우리 기지의 앞날을 가리키는 징조로 여겼다. 그러나 정말로 크게 바뀐 것은 나 자신이었다. 만일 내가 바뀌지 않았다면, 바깥 세상이 바뀐 것이 내 마음에 그리 또렷이 새겨질 리 없었다. 전 같으면, 정권이 바뀌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띄장 기 지의 예산이 줄어드는 일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내 둘레의 일들에만 관심을 가졌었다. 열심히 일하면, 어디가 나 내가 먹고 살 것은 있으리라고 여겼고 길흉화복이야 하늘에 매인 일이라고 믿었으므로, 세상 일에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기지의 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기지의 정상 적 운영에 대한 위협이고 그런 위협은 내가 막 찾은 사랑에 대한 위 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위협의 징조들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되었고 그런 징조 들의 냄새를 맡는 데 꽤나 능숙하게 되었다. 이제는 텔레비젼의 보도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보게 되었고 남반부에 서 일어난 사건들의 뜻과 북반부에 대한 영향을 따져보게까지 되었 다. 그리고 우리 기지 바깥으로도 눈길을 돌려서, <셀레나이트 무브먼 트>에 든 터였다. 리명규의?뜻을 따른 일이긴 했지만, 내가 스스로 무슨 단체에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발 몇 달 동안만 우리 기지에 무슨 일이 일어나디 않게...' 리명규가 내 팔을 가볍게 잡고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을 해보 였다. <제 11장 2편> 현관에 있는 옷장에 우주복을 넣고서, 나는 남반부 사람들이 와있 나 둘러다보았다. 오늘 모임은 고장남 통신 위성을 고치러 지구 궤도로 올라갔던 요 원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자축하는 모임이었다. <두 조선 기지 요원들이 협력하여 수행한 이번 임무는 두 기지 사 이의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공식 논평이 있었고 두 기 지의 행정부장들이 주선한 터라, 거의 공식적인 모임이었다. 답답한 기지에서 벗어나 드래코 태번을 찾게 된 것은 당연히 반가 웠지만, 나는 김수형과 다시 만나는 일에도 은근히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특히 그녀의 솔직한 성격과 거리낌 없는 말씨는 언제나 둘레를 살피면서 말하는 버릇을 길러온 나에겐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졌다. 아울러 두 기지 사이에 통합을 위한 협상이 이미 오래 전에 시작 되었다는 풍문이 사실인가 그녀에게서 확인하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리 녀사. 리 선생님, 어서 오십시요." 소리 없 이 틱톡이 나타났다. "아, 틱톡 씨. 안녕하십네까?" 우스꽝스러우 나 이젠 친군하게 느껴지는 그 로봇에게 나는 따뜻한 웃음을 지어보 였다. "더기, 장영실 기지 김수형 씨레 왔습네까?" "아직 안 오셨습네다. 장영실 기지 분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 니다." 그가 머뭇거리지 않고 대꾸했다. "아, 그렇습네까?" "두 분께선 이리 오시지요." 틱톡이 앞장을 섰다. 객장 안으로 들어서자, 무도장에서 한 쌍의 남녀가 춤추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박진동 씨와 레이디 오렉스라는 앎을 깨닫고, 나는 좀 놀랐다. 나는 사람이 로봇과 춤을 춘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와 리의 걸음이 느려진 것을 느끼고, 틱톡이 돌아섰다. 이어 쇠로 만들어진 얼굴에 미소 비슷한 낯빛을 올리고서, 춤추는 사람들 을 가리켰다. "보기 아름답지요?" "네." 아름다움 것을 보고 로봇이 느끼는 감정이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같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흘끔 틱톡의 낯빛을 살폈다. "네. 정짜로 보기 도씁네다." 리도 도의 했다. "틱톡 씨, 여기서 잠깐 구경했으면 하는데..." 나는 틱톡과 리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러시면 두 분께선 여기서 구경하시지요. 혹시 필요하신 것이 으면, 절 부르십시요. 전 현관으로 나가보겠 습니다." 박진동 씨와 레이디 오렉스가 추는 춤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남 자는 제 자리에서 맴돌고 녀자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품으로 보아, 서양의 무슨 민속 춤이 분명했다. 박 씨가 한쪽 구석에서 손과 발로 박자를 맞추는 사이, 레이디 오 렉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복잡하고 어려워보이는 움직임을 하면서 무도장을 한 바퀴 돌았다. 달의 중력이 약해서 지구에서보다 몸놀림이 훨씬 수월한 데다가 그녀는 롤러 스케이트를 신어서, 그녀가 춤추는 모습에서 나는 피겨 스케이팅이나 아이스 댄싱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도장을 우아한 몸짓으로 한 바퀴 돌아온 그녀가 박 씨와 만나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제 11장 3편> 아픔에 가까운 그리움이 내 가슴의 살을 헤치고 지나갔다, 긴 꼬 리를 끌면서. 춤추는 두 사람은 그리도 가깝고 정다워 보였다. '두 사람? 사람?' 내가 어느 사이엔가 레이디 오렉스를 로봇이 라기보단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을 깨닫고, 나는 좀 어이가 없어졌 다. 마침내 춤이 끝났다. 안쪽에서 뜻밖에도 큰 박수 소리가 났다. 리도 열심히 손뼉을 쳤다. 따라서 손뼉을 치면서, 나는 안쪽을 살폈다. 사내들 대여섯이 한 쪽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도 자세가 많이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휴가를 얻어 지구 궤도에서 내려온 우주인들 인 듯했다. 달은 여러 모로 우주 정거장과 지구의 가운데였다. 그래서 지구 궤도의 우주 정거장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구가 아니라 달에서 쉬었다. 그리 하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적응의 문제가 훨씬 덜 심 각했다. 특히 무중력 상태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은 지구로 돌아가 는 것을 포기하고 달에 정착했다. 박 씨와 레이디 오렉스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안쪽에 자리잡은 사람들을 향해 우아하게 절했다. 이어 레이디 오렉스가 박 씨에게 무어라욱 말했다. 그러자 박 씨가 돌아서서 우리 쪽을 살폈다. 우 리를 보더니, 그가 손짓으로 인사하면서 다가왔다. "리 녀사, 리 동무, 안녕하십니까" "안녕들하십네까?" 리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박 선생님, 춤을 잘 추십네다." 박 씨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레이디 오렉스," 리는 녀자 로봇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정짜로 춤을 잘 추십네다. 내가 지금꺼지 본 사람들 중 에서 제일 잘 추십네다." 그도 레이디 오렉스를 녀자로 대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어려서 <오즈> 얘기들을 읽었다니, 그로선 그녀가 꽤 나 친숙하게 느껴질 터였다. 인사가 끝나자, 박 씨가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갑시다. 레이디 오렉스, 우리 자리를 찾아보지." "네. 이리 오십시요." 레이디 오렉스는 안쪽 벽 가까이 있는 자 리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고무나무 화분들이 늘어서 있어서, 밖에 선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장영실 사람들은 아직...?" 우리가 자리를 잡자, 박 씨가 리에 게 물었다. "네. 아직 도착하디 않은 것 같습네다. 올 때가 됐는데..." 그가 손목 전산기를 들여다보았다. "리 녀사께선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박 씨가 얼굴에 뜻이 담긴 웃음을 띠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대꾸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꾸했 다. 어쩌면 박 씨는 나와 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들었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은 리와의 관계를 내 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단계 는 아니었다. "박 선생님," 내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리가 대신 나섰다. "레이디 오렉스가 춤을 정짜로 잘 추던데요. 전부터 그렇게 잘 췄 습네까?" <제 11장 4편> "음, 그렇진 않습니다. 레이디 오렉스는 작년에 롤러를 새 것으 로 바꿨는데... 다리 근육에 더 빨리 반응하는 것으로. 댄싱 프로 그램은 지난 주에야 넣었습네다." "아, 그렇습네까? 댄싱 프로그램은 <휴머나이즈드 프로그램>입네 까?" "네. 그렇습니다." "프로그램이 큰 편인가요?" "네, 조금. 설명서엔 <휴리스틱 서킷>이 상당히 크고 탄력적이라고 나왔습니다." 리가 먼 곳을 바라보는 눈길로 잠시 생각했다. "그러문 레이디 오렉스가 상당히 <엔한싱>되었단 니야긴가요?" "네." 박 씨의 낯빛이 문득 진지해졌다. "그렇게 봐야 되겠지 요." "박 선생님, 음, 그런 엔한싱에서 무슨 문제는 없었나요?" 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후유증이랄까..n" "없었습니다. 실은 나도 그 점에 대해 신경을 썼지요. 댄싱 프 로그램을 넣고서 쭉 관찰해왔는데, 아직까진 성격에 변화가 생긴 것 같진 않습니다." 웃음으로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레이디 오렉스는 계속 새로운 스텝들을 생각해내네요. 정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관 쪽이 좀 시끄러워졌다. 조선 말이 들렸다. 레이디 오렉스가 우리가 주문한 음료수를 내왔다. "장영실 기지 사람들이 온 건가?" 박 씨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 한 이십 명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잠깐 실례합니다." 박 씨가 서둘러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그나," 박 씨와 레이디 오렉스가 함께 현관 쪽으로 나가는 것 을 바라보면서, 나는 리에게 물었다. "아까 박 선생이 레이디 오렉 스의 성격에 변화가 생긴 것 같딘 않다구 했는데, 그게 무슨 니야기 디? 로봇도 성격이 바뀌나?" "일반적으로 로봇은 성격이 바뀌디 않습네다. 전자뇌의 용량을 늘려도. 그러나 레이디 오렉스는 보통 로봇이 아니거든요. 인간화 로봇입네다. 그래서 레이디 오렉스에게 새로운 인간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서 전자뇌가 엔한싱되문, 그러니까 전자뇌의 기본 능력이 커디문, 성격이 조금 바뀔 수도 있습네다." "인간화 로봇? 그게 뭐디?" "음..." 그가 생각에 잠겨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어드케 설명 해야, 누님께서 이뻣 알아들으실라나..." 누가 큰 소리로 틱톡을 불렀다. 남반부 사람들이 닿으면서, 주점 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누님, 로봇의 전자뇌는 말입네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단일 논리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입네다. 그러나 사람의 뇌엔 그런 논리 프로 그램이 없디요. 없다는 것이 현재 정설이디요. 사람의 뇌는 대신 조그만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습네다. 그런 조 그만 프로그램들은 특수한 일들을 하는 데는 아주 뛰어나디만 일반 적인 일을 수행하는 데는 로봇의 전자뇌에 들어간 논리 프로그램보 다 못합네다. 그렇게 된 것은 사람의 뇌가 아주 긴 세월에 걸텨 진화를 통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데... 사람의 뇌는 구조부터 그렇게 되어 있습 네다. 사람의 뇌는 악어나 뱀 같은 파충류의 뇌에 늑대나 말 같은 포유 류의 뇌가 덧씌워디고," 그는 왼 손으로 주먹을 쥐고 오른 손으로 그 위에 무엇을 씌우는 시늉을 했다. "그 위에 다시 사람의 뇌가 덧씌워딘 것입네다. 누님, 무슨 니야 긴디 아시갔습네까?" <제 11장 5편> "알 것두 같구. 모를 것두 같구." "바로 그겁네다." 그가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상태는 로봇에겐 없습네다. 보통 로봇에겐요. 알 문 알고 모르문 모르디요. 인간화 로봇은 모든 로봇들에게 공통된 기본 논리 프로그램에 특 수한 일을 처리하는 프로그램들을 결합시킨 전자뇌를 가딘 로봇입네 다." "그래?"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 로봇을 만들 디? 그런 로봇이 보통 로봇보다 낫나?" "어떤 면에서 낫디요. 다른 면에서 오히려 못하구요." "그래? 어떤 면에서 못하디?" ? "누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시라요. 어린애들에게 계산하는 걸 가르틸 때, <오 더하기 륙은 얼마디?> 하고 물으문, 어린애들은 잘 모르디요. 그러나 <사과 다슷 개에다 사과 여슷 개를 더하문, 사과 레 모두 메치디?>하고 물으문, 이내 알디요." 나는 효영이에게 셈하는 것을 가르치던 일이 생각났다. 그 기억 이 불러낸 아픔이 견딜 만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나는 고개 를 끄덕였다. "응, 맞아. 효영이두..." "참, 누님은 아이를 키워보셨디요." 살피는 눈길로내 얼굴을 쳐 다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추상적 숫자보단 구체적인 사물을 갖고 계산하는 데 능숙합네다. 아까 니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하등 생물로부터 진 화해온 까닭에 그렇디요. 인간화 로봇은 그점에서 사람과 좀 비슷 합네다. 그래서 계산과 같은 일에선 인간화 로봇이 보통 로봇보다 못합네다." "리해하기 어려운데." 나는 두스 엠로드를 한 모금 마셨다. 시 원하고 부드러운 술 맛을 즐기면서, 나는 마음이 실린 눈길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무엇이 답답해서, 사람들이 그런 인간화 로봇을 만들디? 보통 로봇보다 못한 걸 왜 일부러..." "아, 그거 말입네까? 원래 인간화 로봇은 사람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뎠습네다. 그러나 한번 그것이 나오자, 사람들이 그것 을 찾기 시작했습네다. <컴패년 로봇>으로요. 친구나 애완동물 노릇을 하는 로봇말입네 다. 사람들은 그런 컴패년 로봇이 사람과 아주 비슷하기를 바라디 요. 당연한 니야기아니갔습네까?" "응." 나도 그런 로봇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것이 인 간화 로봇蜜나 컴패년 로봇으로 불린다는 것은 몰랐지만. 우리 북 반부엔 그런 컴패년 로봇이 드물었지만, 남반부만 해도 흔한 모양이 었다. 유럽에선 그런 로봇에게 사람에 버금가는 권리를 주자는 운동도 벌써부터 나왔고 그런 로봇에게 재산을 남기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 았다. 결혼하는 대신 컴패년 로봇과 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 앞으론 큰 사회적 문제가 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박진동 씨와 레이디 오렉스가 춤추던 모습을 떠올렸다. `레 이디 오렉스 같다문, 리해할 수도 있갔다.' 지금까지 나는 이성과 사귀는 것보다 컴패년 로봇과 사는 것을 좋 아하는 사람들을 변태성욕자들로 여겼었다. 그런 로봇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지더라도, 그것들과 사는 것은 기계를 통한 수음이 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선뜻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제 11장 6편> "그 문제엔 실은 또하나잘 측면이 있습네다. 인류는 쭉 진화해왔 고 앞으로도 진화할 것입네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진화 에서 다음 단계는 또하나의 생물적 종이 아니라 기계 인간일 것이라 고 말합니다. 무슨 니야기냐 하문, 지금꺼진 진화를 통해서 환경에 더 잘 적응하 는 생물적 종들이 나왔디만, 그러니끼니 아주 단순한 세균들로부터 꽃을 피우는 고등 식물이나 사람이나 고래와 같은 고등 동물들이 진 화했디만, 이젠 그런 식의 진화맙을 생각할 순 없다는 것입네다. 사람이 출현한 이상, 사람의 특질들을 사람보다 더 잘 갖춘 무엇이, 즉 기계 인간이 나와야 한다는 겁네다. 그래서 사람은 점차 사라디 고 로봇들이 사는 세상이 나올 거란 니야깁네다." "그러문 로봇이 사람보다 더 사람답단 니야긴가? 그건 말이 되디 않는 것 같은데?" "언뜻 생각하문, 누님 말씀대로 말이 되디 않는 니야기디요. 그 러나 어떤 뜻에선 그 니야기도 맞습네다. 사람의 특질들 가운데서 가장 사람다운 것은 생각 는 것 아닙네까? 로봇은 다른 기능들보다 생각하는 기능이 크게 발달한 존재디요. 그래서 그런 면에선 로봇은 사람보다 오히려 사람답습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게 니야기 할 수도 있나?" "게다가 로봇은 사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낫습네다. 훨씬 튼튼 하고 오래 삽네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환경을 오염시키디 않습네다. 특히 공기나 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주 공간 에서 활동하는 데는 로봇이 아주 유리합네다. 여기 달 나라에서도 그렇잖습네까?" 무엇에 홀린 듯한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는 얘 기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하도 매끄러워서, 흠을 잡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중간단계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지구 생물의 진 화에서 인류가 맡은 역할은 기계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 는 것이라고꺼지 주장합니다." "설마 그렇게꺼지야..." 홀린 듯한 마음을 깨우치려고 나는 고개 를 흔들었다. 그가 싱긋 웃었다. "거기꺼진 그래도 괜찮은 편입네다. 중간단 계론자들 가운데 정말로 대담한 사람들은 기계 인간이 제대로 진화 하문 언젠가는 에너지로만 이루어딘 에너지 인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합네다. 그런 에너지 인간은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엄청난 에너지를 리용하 게 되니끼니, 거의 모든 면에서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갔디요. 그 런 상태가 인류의 진화의 목표라는 니야깁네다." "저그나는 그런 니야길 믿슴마?" "나요?" 그가 잔을 비웠다. "나는 잘 모르갔시요. 하긴 지금 뉘레 알갔습네까? 몇십만 면, 몇백만 년 뒤에 일어날 일을? 하디 만 재미있디 않습네까?" 재미라는 말이 마음 속으로 들어오자, 문득 가슴에서 두려움의 안 개가 피어올랐다. '재미? 그런 니야기가 재미있다구? 옐가 과연이 사람을 따라갈 수 있을까? 사람들이 사라디고 로봇들이 가득 찬 세상이 올디도 모 르는데, 그런 니야기가 재미있다구 태연히 니야기하는 사람을? 배 운 것이 없는 내가 대학꺼지 다녔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을?' 아까 뜨락또르를 타고올 때, 나는 초승달인 지구를 리에게 가리키 면서 밤인 부분에 흩어진 빛들이 어디냐고 물었었다. 나는 지나가 는 얘기로 물었는데, 그는 이내 손목 전산기로 계산하더니 그 빛들 이 무슨 도시들인지 말해주었다. 나와 그는 늘 그와 같왑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나보다 여듬이나 적은데... 내가 제대로 따 라가디 못하문, 이 사람은...' 두려움은 어느 사이엔가 단단하게 뭉쳐져서 가슴을 압박했다. `날 경멸하게 될까? 싫증을 낼까?" <제 11장 7편>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주장합네다, 로봇이 진화할 수 있도록 우리 가 도와줘야 한다고. 그러나 로봇은 진화할 길이 없습네다. 사람과 같은 생물은 돌연 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할 수 있디만, 로봇은 그런 과정이 없 거든요. 공장에서 만들어디고 나면, 바뀔 수가 없잖습네까? 그리고 로봇 을 만들어내는 일을 맡은 로봇들은 보다 나은 로봇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없습네다. 그래서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은 인간화 로봇 을 만들어낸 겁네다. 로봇이 점점 더 많은 인간화 프로그램을 갖추 게 되문, 언젠간 그런 욕망을 갖게 될디도 모른단 니야기디요." 두려움을 애써 누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박 씨가 돌아왔다. "흠. 내 술이 다 식었군. 아니, 더워 졌군." 그는 싱긋 웃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남반부 사람들이 다 왔습네까?" 리가 물었다. "아니요. 또 올 겁니다. 그런데, 리 녀사." "네." "리 녀사께서 주신 레시피가 인기가 좋습네다. 그램서 도로시에 게 얘기했더니, 리 녀사에게 사례를 해야 옳지 않느냐고 합디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일천 셀 몬입니다. 카드를 하나 만들까 하다가 리 녀사 처지에선 현금이 차 라리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길래..." "아니, 그건..." 나는 손을 저었다. "그 레시피를 우리 드래코 태번이 리 녀사에게서 얻어 이용하고 있으니, 우리가 리 녀사에게 사례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약소하지 만, 받으십시요." 나는 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받으시라요." "감사합네다, 박 선생님." "도로시가 리 녀사를 보고 싶어하는데, 요새 너무 바빠서. 두 분 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드래코 태번은 지금 큰 회사와 손을 잡 아야 합니다. 이제 여기 달 나라에서 사업하는 것도 이렇게 개인이 조그맣게 하던 시절은 끝났습네다. 그래서 지금 도로시는 파트너를 물색하고 협상하느라 정신이 없습네다." "그러문 도로신 큰 기업에 의지하디 않고 혼자서 사업하겠다던 꿈 을 버린 셈인가요?" "솔직히 얘기하면, 그런 꿈은 의욕적이었디만 비현실적이었습니 다. 난 처음부터 그 점을 지적했었지요. 드래코 태번이 지금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월면 관광 사업에 진출하려던 몬테칼로 그룹이 갑자기 파산한 데다가 불경기가 닥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 경기도 회복되었고 우주선 운임도 많이 싸져서, 월면 관광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월면 관광이란 것이 워낙 돈 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라서..." 박 씨는 고개를 저었다. "자아, 그럼 난 가봐야 하겠습니다. 나중에 셀레나이트 무브먼트 의 조선인 회원들의 모임이 내 방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두 분께서 도 참석해주십시요." 그가 떠나자, 리가 봉투를 집어 내게 내밀었다. "누님, 이거 가 방에 넣으시라요." 봉투는 꽤나 두툼했다. 그 두툼함이 일천 셀먼은 나에겐 석 달 봉급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내 눈앞으로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스쳤다. 한순간 순수한 기쁨이 내 머리 안쪽 을 환하게 비췄다. `이제 남반부 사람들이 그리도 돈에 미친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내 마음 한쪽에서 보이지 않는 누가 탄식처럼 속삭였다. <제 12장 1편> "전 좀 회의적입니다." 탁자 건너편에 앉은 이홍은 박사가 고개 를 갸웃했다. "남극이든 북극이든, 경제적으로 의미있을 만큼 큰 빙상을 발견할 가능성은,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리 크지 않습니 다." 박진동 씨는 이 박사를 <시스팀즈 엔지니어>라고 소개했다. 리명 규가 이 박사는 <제네랄리스트>라고 덧붙였다. 갓 서른을 넘긴 것처럼 보이는 사내였는데,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 하고 있었다. 장영실 기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스팀즈 엔지니어나 제네랄리스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진 몰라도, 그가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아, 그렇게 생각하십네까?" 내 오른쪽에 앉은 리명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드물게, 리는 이 박사에게 크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이 박사님, 장영실 기지에선 극지의 얼음을 탐사하려는 계획이 없습네까?". 이번엔 내 왼쪽에 앉은 량정애 박사가 물었다. 우리는 <셀레나잇 타이드>의 편집실로 쓰이는 박진동 씨의 방에 모여 있었다. 모두 열한 사람이었다 - 우리 기지 요원들이 넷, 장 영실 기지 요원들이 다섯, 박진동 씨, 그리고 <셀레나이트 무브먼 트>의 간사라는 자니 카트라이트. 장영실 기지 사람들 가운데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에 든 사람들은 마흔 명이 넘는다고 했지만, 우리가 겨우 넷이란 사정을 생각해서, 그들은 이번 모임에 참가할 대표로 여섯만을 뽑았다, 곧 합류할 김 수형까지 쳐서. 젊고 예쁜 데다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라서, 김은 장영 실 기지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기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이번 모임의 공동 사회자로 뽑혔고 덕분에 한창 흥이 높아진 객장에 서 선뜻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가벼운 화제를 올리고서 낯을 익히 고 있었다. 화제가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일본 탐사대가 남극 에서 빙상을 발견한 일로 흘렀다. "실은 있습니다. 그렇죠, 전 박사님?" "네?" 김상윤 소좌와 무엇을 얘기하던 전승현 박사가 고개를 들 고 좀 놀란 낯빛으로 이 박사를 쳐다보았다. "전 박사님, 우리 기지도 세웠죠? 극지 얼음을 탐사할 계획말입 니다." "아,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탐사 팀을 구성할 겁니 다." 전 박사는 얼마 전에 길을 잃은 김 소좌를 구해준 지질학자였다. 마흔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몸집이 작고 살결이 가무잡잡해서, 허 위대가 크고 살결이 허연 편인 김 소좌와 대조적이었다. 찬찬히 뜯 어 보면, 그래도 밉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꺼리지 않을 만큼 친 밀해진 듯했다. `독신인가? 아래쪽엔 아무도 없고?' 가벼운 호기심이 내 머리 한쪽에서 꼼지락거렸다. 하긴 그녀에겐 그런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련애 와 결혼이 다른 것들이란 얘기만은 아니었다. 아직도 전통적 결혼에 큰 무게를 두는 북반부 녀성들과는 달리 남 반부 녀성들은 결혼을 가볍게 여겼다. 원래 영구 결혼의 시험 단계 로 나왔다는 계약 결혼이 이젠 영구 결혼과는 별 관계 없이? 행해진 다는 얘기였다. 이미 동성 결혼도 법으로 인정받은 판이었다. <제 12장 2편> "아, 그렇습네까? 잘 됐습네다. 장영실 기지에서 이번에도 우리 김일성 기지 요원 한 사람을 그 탐사 팀에 넣어주시문, 아주..." 량 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웃음판이 되었다. 장영실 기지 사람 두엇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박사님, 어드케 생각하십네까? 지금 제가 제안한 것..." 량 박사가 부드러우나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물었다. `흠. 량 박사가...' 나는 슬그머니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목소리는 량 박사가 사람을 설득할 때 쓰는 목소리였다. 그 녀가 그런 목소리를 내면서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녀의 뜻 에 맞서기 어려웠다. 심리학자 겸 정신과 의사인 그녀에게 맞서려 는 사람은 어차피 드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아직 생각해보지 못해서..." 전 박사가 좀 당황 스러운 낯빛으로 말을 더듬었다. "좋은 생각 같긴 한데... 강봉진 박사님께 말씀드려보지요." "그러면 김일성 기지에서 그 탐사 팀에 들어갈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네." 이준석이 흘끗 김 소좌를 쳐다보았다. 이는 장영실 기지의 대변인이었다. 다시 웃음판이 되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고, 전 박사가 얼굴을 붉혔다. 김 소좌는 태연히 맥주 잔을 집어들었다. "전 박사가 팀 리더가 되문, 당연히 내레 참가해야디." "그런데 말이요, 이 박사, 이번 빙상 발견으로 <스나크-헌팅 프 로젝트>가 영향을 받지 않겠소?" 웃음이 사그라지자, 박진동 씨가 이홍은 박사에게 물었다. "네, 아무래도 영향을 받긴 받겠지요. 그러나..." 손등으로 수 염 자국이 거뭇한 턱을 문지르면서, 이 박사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 었다. "제 생각엔 그리 큰 영향을 받을 것 같진 않습니다." 생각에 잠긴 눈길로 박 씨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오히려 활기를 되찾을지도 모르죠." 이 박사가 진지한 어조로 말 을 이었다. "월면 기지들이 점점 커지면서, 물에 대한 수요는 빠르게 늘어나 는데, 그런 수요를 채워줄 얼음이 극지에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빙 상의 발견으로 높아진 관심을 스나크 프로젝트에 돌릴 수도 있을 테 니까요. 반은 얼음인 혜성을 끌어다 쓰는 것이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실 은 가장 경제적이란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얘기가 달라지잖겠습니 까? 장 마티뇽이 어제 <셀레나잇 타이드>에 쓴 것처럼, 이번의 빙상 발견은 실은 스나크 프로젝트를 발진시킬 기회죠. 우리가 잘만 이 용한다면 말입니다." "혜성을 낚아서 이리로 끌고 오는 것이 쉽딘 않갔디요?" 량 박사 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량 박사가 쓴 <낚아서>란 말이 내 마음에 묘한 울림을 남겼다. 그녀에겐 예측하기 어려운 면들이 있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도 잡히지 않온 무엇처럼, 나는 그녀의 속을 좀처럼 짚을 수가 없었 다. 그녀가 풍기는 냄새도 묘했다. 깊은 골짜기의 냄새랄까, 큰 나무 들의 싱그러운 냄새에 썬은 잎새들의 곰팡내가 섞인 묘한 냄새가 났 다. 이 모임에 나온 것만 해도 그랬다. 리명규까지도 그녀가 셀레 나이트 무브먼트에 가입한 줄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쉽진 않죠." 이.박사가 그녀에게 한껏 밝은 웃음을 지어보 였다. "그러니, 량 박사님, 언뜻 보기보단 덜 어렵습니다. 혜성을 <낚아서> 이곳으로 끌어오는 데 필요한 기술들은 실은 모두 이십 세 기에 나왔습니다. 혜성의 궤도 계산, 도킹, 소프트 랜딩... 만일 혜성의 궤도를 수 정하는 데 우주선의 동력을 쓰기로 한다면, 가장 어려운 것은 도킹 일 똬니다. 혜성의 핵이 돌거든요." <제 12장 3편> "아, 그렇습네까? 그렇게 돌문, 일이 상당히 복잡하갔구먼." "네. 전형적 혜성은 지름이 일 킬로미터 가량 됩니다. 그러니 까..." 혜성을 끌어와서 한꺼번에 엄청난 물을 얻는다는 얘기는 아주 멋 졌지만, 그 일을 실제로 하는 방법이나 혜성의 특질 같은 것들은 내 겐 그리 흥미있는 화제는 아니었다. 이 박사가 그 사업의 내용을 설명하는 동안, 내 마음은 다른 곳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긴 탁자 끝에 박진동 씨가 곧은 자세로 앉아서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카트라이트는 얘기에 끼지 않고 헤드폰 을 통해 영어로 번역된 얘기들을 듣고 있었다. 그의 뒤쪽 벽에 월면공화국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없었으니, 새로 만들어 건 모양이었다. 무척 복잡한 깃발이었다. 은하계가 깃발의 배경 노릇을 했고 가 운데에 태양계가 자리잡았다. 물론 달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은하 계는 사진을그대로 옮겨놓았고 태양계는 그린 것이었다. 천연색으 로 금속판 위에 새긴 터라, 아주 산뜻했고 뜻하는 바도 또렷했다. `하긴 이젠 깃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깃발은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비실용적이었을 터였다. 그 러나 사진을 손쉽게 그대로 금속판에 옮겨 새길 수 있는 지금 세상 엔 그런 깃발이 전통적 깃발들보다 오히려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것에 비기면, 반도기나 인공기나 태극기나, 모두 어린애들이 만 든 것 처럼 느껴졌다. `반도기도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게 아니라, 잘 찍은 위성 사진을 넣었으문... 막 해가 떠오르는 모습 같은 걸루...' "...얼음을 캐서 이리로 날아오는 비용이 엄청나니까, 혜성을 끌 어오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란 사실은 간단한 계산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나 제가 극지 얼음 탐사에 비판적인 건 그런 경제적 이유에서만 은 아닙니다." 여전히진지한 어조로 이 박사가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얘길 하지 않는데," 맥주로 목을 축이고서, 이 박사는 말을 이었다. "얼음을 캐내는 것은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지구에서 노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 우린 달 나라 엔 파괴될 만한 자연 환경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실은 달 나라 의 모든 풍경이 바로 소중한 자연 환경입니다. 잘 살펴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달 나라 풍경이. 지구의 풍경 과 다르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죠. 그리고 벌써 월면차 자국이 나지 않은 곳이 없단 얘기가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달은 바람도 비도 없어서, 사람의 파괴적 행동이 남긴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몇십억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모습을 마구 파괴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리명규가 감심한 듯 고개를 열 심히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왜 장영실 기지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그는 다 분히 설교적인 투로 얘기했지만, 어쩐지 야시끝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광물 탐사는 그렇잖아도 심각한 영토 분쟁을 가열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주장한 쉬레딩거 계곡컸 광권에 대해서 벌 써 말들이 많잖습니까? 반면에 혜성을 끌어오면, 영토 분쟁의 열기 를 식히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라이트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에 펴놓은 수첩 전산기에 무엇을 입력했다. <제 12장 4편> "특히 중요한 건 혜성이 극지의 빙상보단 과학적으로 훨씬 흥미로 운 물체란 점입니다. 달 나라의 빙상을 탐사해서 얻을 지식이 얼마 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혜성에?대해선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 트 혜성운의 존재까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거든요. 더구나 혜성은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남은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혜성 에 대한 연구는 태양계의 기원을 밝히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동안 혜성의 쌤플을 몇 번 채취했지만, 혜성을 통째로 가져와서 연구하는 것관 다릅니다. 그리고 텔리메트리가 아무리 발전되었다 고 하더라도,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죠. 문젠 돈이 죠."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서 말을 이었다. "지구의 정부들이 그런 프로젝트를 위해서 큰 돈을 쓰려고 하질 않죠."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얘기는 결국 돈 얘기로 끌 나더구만." 박진동 씨가 말했다. 웃음이 터졌다. 사람들이 동의하는 뜻의 얘기를 했다. "우주 탐사엔 돈이 많이 들어서, 특히 그랬습니다. 새로운 우주 계획이 나올 때마다, 소위 <현실적인 사람들>은 합창을 했습니다. 지구 위의 문제들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데, 우주 탐사에 돈을 써 야 하느냐?" 이 박사가 씁슬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좀 재수없는 소리빽 아닌지 모르지만," 이준석이 말했다. "이 박사, 만일 그냥 놔두면 지구와 충동하게 된 혜성이 나타난다고 합시다. 그러면 돈 문젠 깨끗이 해결되는 것 아니요?"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죠. 스나크 프로젝트를 입안할 때, 실제로 그 얘기가 나왔습 니다." "아, 그랬습니까? 나도 뭘 좀 아는구나." 이어 이는 문득 진지 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실제로 급니까?" 이 박사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긴 있습니다만 크진 않습니다. 혜성이나 혜성이 갈라진 조각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은 대략 이 천년에 한 번 정도 됩니다. 이십 세기 초 에 사이베리아에 큰 놈이 하나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님, 혜성이 나타나문, 언제 끄러옵네까? 들어올 땝네까, 아니문, 태양을 돌아서 다시 밖으로 나갈 땝네까?" 리명규 가 물었다. "스나크 프로젝트에선 근일점을 돈 뒤에 끌어오는 걸로 되어 있 죠. 아마 그게 합리적일 겁니다." "아, 네. 어째서 그렇습네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는데... 먼저, 혜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알 려면, 꽤 오래 관찰해야 합니다. 혜성을 끌어오는 일에선 핵의 자 전 속도가 아주 중요한 자룐데, 그것을 알려면, 뭐 당연한 얘기지 맏, 정확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좀 오래 관측하는 것이 좋죠. 혜성의 궤도를 놓고 중력 효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어느 정돈가 따진 다음 그것을 핵 의 자전 효과로 해석하거든요." "아, 네에."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12장 5장> "그리고 근일점을 돈 뒤엔 혜성에서 분출되는 꼬리가 역추진 로켓 역할을 해서 혜성의 속도가 좀 느려집니다. 그리 큰 건 아니지만, 그것도 고려 사항이 되겠죠." "하디만, 이 박사님, 혜성이 근일점을 돌고나면, 얼음이 .꼬리로 흩어져서 많이 줄어들 것 아닙네까?" "줄어들긴 하지만, 뭐 그 정도야... 대략 일 퍼센트 정도 줄어드니 까요." "아, 미스 김이 오누만." 문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준석이 반색했 다. "미안합니다." 김수형이 숨찬 목소리로 말하고서 갑숙 고개를 숙 였다. 모임의 사회를 보느라 달아올라서, 그녀의 얼굴은 알맞게 익 은 토마토였다. "미스 김 자리 여기요, 여기." 이가 익살스럽게 소리치면서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아, 나도 한때는 젊고 인기가 있었는데..." 량 박사가 탄식조로 말했다. 웃음이 터졌다. "량 박사님은 아직도 인기가 높습니다." 이 홍은 박사가 뜻밖에 도 정색하고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러문 이따가 단 둘이 만나요." 량 박사가 매끄럽 게 대꾸했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 박사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나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량 박사의 옆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드 러우면서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무슨 권위가 어린 얼굴이 었다. 자칫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는 이 박사의 말을 매끄럽게 처리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그 얼굴에 어린 차분한 자신감이 말해주 고 있었다. 감탄하는 마음에 고마운 마음이 더해졌다. 남반부 사 람들과 마주 앉은 자리에 그녀가 나왔다는 사실이 적잖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회의를 시작할까요?" 웃음이 가라앉자, 박진동 씨가 말 했다. "저 때문에 아직도..." 그녀가 박 씨에게 묻는 눈길을 던졌다. "아니, 괜찮아요. 미스 김을 기다리는 동안에 서로 낯을 익혀서 오히려 잘 된 것 같습니다." 김에게 웃는 낯빛을 보인 다음, 박 씨 는 낯빛과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늘 이렇게 모여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모임은, 엄 격하게 따지면,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의 모임은 아닙니다. 무브먼트 에 참여한 조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박 씨가 카트라이트를 슬쩍 돌아다보았다. 얼굴에 슬쩍 웃음을 올리면서, 카트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조국의 통일에 대해 기여할 길 을 찾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통일의 첫 단계로 서 김일성 혁명 기지와 장영실 기지가 하나로 합치는 일을 도울 길 이 없는가 모색하는 것입니다." 적잖이 놀라서, 나는 리명규에게 묻는 눈길을 보냈다. 나도 두기 지의 통합 문제가 오늘 모임에서 화제로 나오리라고 생각했었다. 아까 객장 안에서 들으니, 장영실 기지 사람들은 두 기지의 통합 문 제를 드러내놓고 얘기 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처럼 주 의제 가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리가 어깨를 슬쩍 추스렸다, <나도 모르갔슴메> 하는 뜻으로. 이 어 고개를 갸웃했다. <제 12장 6편> 두 기지를 합치는 일이 갑작스럽게 의제로 나왔다는 것과 그런 일 을 미리 알았을 만한 리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 내 마음을 적잖이 불 안하게 했다. "그러면 먼저 김만욱 과장이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랄까 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 이 같아야, 통일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박 씨는 장영실 기지의 기획과장이라는 김을 쳐다보았다. "김 과장, 그럼 시작하시죠." "네." 김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 로, 우리가 통일에 대한 시각을 정리하는 일은 통일 논의의 첫 걸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 운동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 겠습니다. 제 얘기가 좀 딱딱하더라도 또는 이미 잘 아시는 것이라 하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은 서른을 갓 넘긴 사내였는데 몸집은 작았지만 단단해보였다. 그에게선 공무원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째 니야기레 점점 수상하게 돌아간다...' 김의 얘기를 들으면 서, 나는 조금 전 박 씨의 설명을 듣고 느낀 불안감이 한층 짙어지 는 것을 느꼈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사람들이 미리 얘기를 맞쳤다는 것이 드러난 데다가 남반부 정부의 공무원으로 보이는 김이 그 사람들 가운데 하 나라는 사실까지 겹쳐서,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 았다. "우선 살필 것은 통일이 부진했던 이유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물론 통 일 비용이었습니다." 김은 전자 수첩을 참고하면서 얘기를 풀어가 , 기 시작했다. "통일 작업이 시작되었을 땐, 남한 사람들이 통일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물론 흔쾌히 부담할 리야 없지만, 그래도 부담하지 못하겠다고 나 설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통일 세력>이란 말이 가장 큰 욕으로 여겨졌던 시절이었으니, 하기야 당연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러나 남한의 근로자들은 그런 부담에 대해 완전한 보상을 요구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일 부담금을 낸 만큼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어렵게 만든 것은 북한 노동자들의 참여에서 나온 임금 하락 을 남한의 노동조합이 결사적으로 막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 서 남한의 임금이 내려간 것이 아니라 북한의 임금이 남한 임금에 가까운 수준으로 단시일에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기업가들은 그렇게 빠른 임금 인상에 저항하거나 이윤의 폭을 줄이는 대신 손쉬운 길을 택해서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했 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 까?"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실 기지의 통신 요원인 김승훈이 조 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진동 씨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 널린 빈 잔들을 살피는 것을 보니, 마실 것을 주문하려는 것 같았 다. "그래서 남한 사람들은 싼 노동력을 통해 경제의 활성화를 이룰 수 있력 기회를 놓치고 대신 임금의 급상승을 통해 경제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근본적 갈등은 따라서 통일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구매력이 남한 사람들에게서 북한 사람들에게로 많이 이전되어야 한다는 당위와 남 한 사람들이 그런 이전을 실질적으로 거부한 현실 사이에서 나왔다 고 볼 수 있습니다." 레이디 오렉스가 들어왔다. 우리는 마실 것들을 주문했다. <제 12장 7편> "그런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것은 남한과 북한 사이의 관계가 다시 악화된 것이었습니다." 억양이 거의 없는 목소리로 김이 얘기 를 이었다. "북한 근로자들의 남한 유입을 막는 각종 장벽들이 급속히 구축되 었고 그런 장벽은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따로 살아온 두 사회의 시민들이 하나로 합칠 기회를 없앴습니다. 필연적으로 남한 주민들과 북한 주민들을 갈라놓은 지역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연방제는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 사회가 진 정한 통일 사회로 진화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나는 꽤나 지루하고 답답했다. 다행히, 생각지도 않았던 일천 셀 먼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는 일을 생각해 낸 덕분에 견딜 만했다. 순간적 충동에서 시킨 위스키를 마시면서, 나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주문 할 것들을 꼽아보았다. "...내력과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씀해주셨 습니다." 박진동 씨가 말했다. 나는 내 선물에 놀라서 즐거워하는 리명규의 모습을 그리던 환상 에서 끌려나왔다. 리의 손목 전산기는 아주 낡은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몇 해를 더 쓸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벌써부터 신형을 하나 선물로 줄 생각을 했었다. "이제 월면 기지들이 건설되었으니, 진정한 통일을 성취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여기선 평양이나 서울의 영향력이 그 리 크지 않습니다. 북한과 남한을 갈라놓는 장벽도 높지 않습니다. 실제로 두 기지 사이의 관계는 무척 우호적입니다. 게다가 두 기 지의 사령관들이 모두 통일을 위해서 개인적 이익을 희생할 각오까 지 되어 있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두 기지의 요원들 사이에 우주로 나가는 관문인 달 나라에 와서까지 한 민족이 둘로 갈라질 순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 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얘기한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엔 진정한 통일을 위한 황금의 기회가 놓여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박 씨는 단단 한 눈길로 우리를 둘러다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우린 후세 사람 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황금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못 난 세대라고. 운명이 부과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못난 사 람들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김 과장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 달 나라에 모인 우리는 모두 운명이 부과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엘 리트라는 것을. 특히 셀레나이트 무브먼트의 회원인 우리는 눈앞의 조그만 이해 타산을 떠나 큰 공동의 이익을 살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늘 부 드러웠던 박 씨의 얼굴은, 지금까진 드러나지 않았던 뜨거운 열정과 굳은 의지로 받쳐져서, 윤곽이 뚜렷했다. 거의 젊게 보였다. 박 씨의 그런 얼굴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리명규의 얼굴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았음을. ` 어쪄면 그래서 두 사람이 그리 친한지도 모르지...' 이어 나는 김수형의 얼굴 모습은 어떻게 보면 내 얼굴과 아주 비 슷하다고 한 최옥순 소좌의 말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게 끌린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자신의 특질을 보았다는 얘기인지 도 몰랐다. 나는 김수형을 슬쩍 훔쳐 보았다. "어제 두 기지의 사령관들이 두 달째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두 기지의 통합에 관해서." 무엇이 내 뒷머리를 때린 것처럼, 한순간 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눈을 채웠던 김의 모습이 멀리도 사라져갔다. `그랬었구나. 벌 써 두 달이나...' <제 12장 8편> "...평양의 정변이 촉진 작용을 해서, 협상은 요 며칠 사이에 급 속한 진전을 보았습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박 씨가 목소리를 좀 낮췄다. "두 사령관들이 양해 각서를 만들었다는 얘기 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니, 그런 사실을 모 르고 있었던 사람은 나뿐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그 동안 두 기지 요원들 가운데 몇 사람들과 제가 몇 번 만나서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런 논의에서 두 사령관들의 통 합노력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특히 두 기지의 통합 노력을 적극적으로 도울 위원회를 설치하자 는 김수형 동지의 제안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실천에 옮기기로 했 습니다. 그래서 가칭 <통일촉성동맹>을 설립하고 규약의 초안을 작 성했습니다. 김 소좌, 준비됐죠?" "네." 김상윤 소좌가 대답하자 전승현 박사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김 소좌가 얇은 서류를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김 소좌께서 한번 읽어보시죠." 박 씨가 권했다. "네. 그런데," 김 소좌가 씨익 웃었다. "저보단 김수형 동지께서 읽으시는 것이듣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게 좋겠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김은 끝내 사양했다, 김일성 혁명 기지 요원이 읽는 것이 옳다면서. "그러면 제가 읽겠습니다." 김 소좌가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제일조. 명칭. 본 동맹은 <통일촉성동맹>이라 칭한다. 제이 조. 목적. 본 동맹은 조선의 진정한 통일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 다. 특히 김일성 혁명 기지와 장영실 기지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 진한다..." 귀론 김 소좌의떠듬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눈으론 서류의 글자를 따라가면서,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옳은가 생각했다. 북반부와 남반부의 완전한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 혁명 기지와 장영실 기지 사이의 통합도 나는 마음이 그리 내키지 않았 다. 남반부와의 통일을 반기기엔 어려서 받은 남반부 사람들의 인상이 너무.나빴다. 특히 술에 취해서 북반부 녀자들에게 돈 다발을 흔들어대던 남반 부 사내들의 모습은,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도, 속을 뒤집히게 했 다. 남반부 사람들과 상대해서 우리 북반부 사람들이 이득을 볼 일은 없다는 생각은 여기로 올라온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한번 두 기지 의 통합이 이루어지면, 우리 기지의 이익은 장영실 기지의 이익을 위해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 뻔했다. 반면에 통합을 추진해온 이가 사령관님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사 령관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잘못일 리 없었다. 적어도 다른 길들 보다 났다고 보아야 했다. 그리고 리명규도 통합에 적극적으로 찬 동했다. 게다가 아까 박진동 씨가 얘기한 것처럼, 평양에서 일어난 정변 은 우리 기지의 앞날에 그늘을 던지고 있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도, 우리 기지가 평양에 대해 조금이라도 버티려면,$장 영실 기지의 협조가 필요하단 것쯤은 알았다. <제 12장 9편> 규약은 긴 편이어서, 김 소좌가 다 읽자, 사람들에게서 가벼운 한 숨들이 나왔다. "김 소좌, 수고하셨습니다." 박 씨가 말했다. "잘 모르시거나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앞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나는 지금 필요한 것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그냥 넘어가기엔 무엇인진 모르지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 았다. "그러면," 박 씨가 자리를 한바퀴 둘러다보았다. "모두 규약에 찬동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좋습니까?" 몇 사람이 그렇다고 대꾸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 다. "잠깐만." 량 박사가 손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박 씨가 멈칫했다. "네, 량 박사. 말씀하시죠." "제가 보기엔 모두 좋습네다, 취지도 좋고. 동맹을 결성하는 것도 좋고, <통일촉성동맹>이란 이름도 좋고. 규약도 대체로 좋습네다. 그러나 저는 동맹을 결성한단 니야기를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 습네다. 그래서 점 얼떨떨합네다. 그렇디요, 리명순 동무?" "네."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번엔 내가 얼떨떨해서, 생각 도 하기 전에 대꾸가 먼저 나갔다. "리명규 동무는 어떻습네까? 점 얼떨떨하디요?" 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겐 량 박사가 무슨 결론을 이끌어내려 는지 이내 보였을 터였다. 그래도 량 박사의 무게가 실린 눈길에 맞설 수는 없었는지, 좀 겸 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점 얼떨떨합네다." "그래서 모든 게 다 도티만,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에서 온 사람 들은, 아마도 김상윤 소좌 동무를 빼놓곤, "김 소좌에게 잠시 눈길 을 준다음, 량 박사는 말을이었다. "점 생각해보는 게 도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도흔 일이라도, 너무 날래 하려 서두르문, 탈이 나는 법아 닙네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형이 얼굴에 서글픈 웃음을 디고 나와 량 박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들이 무슨 대표는 아니니끼니, 기지의 다른 요원들의 뜻도 들어서 참고하는 것도 도흘 것 같습네다. 뭐 그 사람들의 찬 동을 받자는 것이 아니라, 리해를 구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흘 것 이란 니야깁네다. 그렇디요, 리명순 동무?" "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꾸했다. 량 박사가 방금 한 얘기 가 바로 내가 생각해내려고 애썼던 것이었다. 잠시 불안하게 느껴지는 정적이 자리 위에 서성거렸다. 매끄럽게 규약을 통과시켜 단숨에 동맹을 발족시키려던 사람들은 좀 당황스러 운 낯빛을 했다. 량 박사의 주장이 빈틈이 없었고 일을 주선한 사람들의 성급함을 지적한 셈이어서,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네, 좋습니다." 마침내 박진동 씨가 실망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량 박사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좋은 일도 너무 서두르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죠. 그러시면 세 분께선 돌아가셔서 김일성 기 지의 요원들과 상의하시고 그 결과를 제게 알려주십시요.. "네, 그리 하디요." 박 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량 박사의 얼굴엔 그지 환한 웃음만이 어렸다. <제 13 장 1편> 걸음이 너무 빠른 것 같아서, 나는 억지로 걸음을 늦췄다. 내가 온실로 가느라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사람들이 수근 거릴 터였다. 이제 사람들은 나와 리명규 사이가 정짜로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은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걸음을 늦췄어도, 뒤꿈치에 느껴지는 탄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정짜로 탄력이 느껴지는 것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 리는 젖가슴이었다. 김수형의 얘기가 생각나서, 나는 싱긋 웃었다. 무슨 얘기 끝엔가 그녀는 <내가 달 나라를 사랑하는 이유들 가운 데 가장 큰 이유는 달 나라가 내 젖가슴을 잘 보살펴주기 때문입니 다> 라고 해서 좌중을 웃음판으로 만들었었다. 실제로 여기선 작은 중력 덕분에 가슴띠의 도움이 없이도 젖가슴 이 오똑한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 나처럼 젖가슴은 크나 나이가 든 녀자들에겐 달 나라의 작은 중력이 정짜로 고마웠다. 걸음도 바쁘고 마음은 훨씬 더 바빴지만, 내 눈길은 복도의 풀들 을 자동적으로 살폈다. 물론 리명규에게서 배운 버릇이었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그가 기르는 식물들에 대해 훨씬 큰 관심을 갖 게 되었다. 온실로 들어서자, 하모니카 소리가 나를 맞았다. 좀 어둡고 텁텁 한 복도에서 들어온 참이라, 그 소리는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 다. 리명규를 찾아 온실 안을 둘러다보면서, 나는 그 시원한 바람을 깊 이 들이마셨다. 리는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를 한껏 뒤롸 적힌 채 하모 니카를 불고 있었다. 여기로 올라올 때, 어린 이복 누이가 준 하모 니카라고 했다. 나를 보더니, 그가 밭갑게 웃으면서 일어섰다. "누님, 어서 오리시라요." 거푸수수한 머리와 환한 웃음이 묘하게 어울려서, 그에겐 풋과일 처럼 신선한 분위기가 어렸다. 웃도리를 벗은 그의 몸에선 차분한 힘이 느껴졌다. 내 가슴에 땀을 떨구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문득 팽팽해진 내 살 속을 피가 세차게 흘렀다. "무슨 노래디? 난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땀으로 촉촉할 그의 살을 쓰다듬고 싶은 총동을 누르면서, 나는 짐 짓 태연하게 물었다. 누르는 내 뜻에 그 충동이 거센 탄력으로 저 항했다. "이번에 새로 배운 노랩네다. 남반부의 동요디요. 장영실 기지 의 도서실에 동요집이 한 권 있길래..." 의자를 내 쪽으로 밀어놓 으면서, 그는 고개로 책상 한쪽에 놓인 전산기를 가리켰다. 전산 기 화면엔 악보가 나와 있었다. "한번 더 불러보라요. 듣기 도씀메." 그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고 자기 의자에 앉으 라고 손짓하면서, 책상의 한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가락은 동요답게 단순했다. 그래도 그 가락엔 어쩐지 든는 이에 게서 잊혀진 기억들을 불러내는 듯한 무엇이 있었다. 한순간 내 마음은 압록강 가에 자리잡은 내 고향의 풍경과 냄새들 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이 차츰 멀어져갔다. 이윽고 내 마 음엔 그것들이 남긴 아릿한 슬픔만이 파란 못물로 고였다. <제 13 장 2편> "누님, 어떻습네까, 노래가 ?" 손수건으로 하모니카를 닦으면서, 그가 물었다. "글쎄..." 그 단순한 노래가 불러낸 뜻밖에도 복잡한 감정들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노랠 들으니끼니, 고향 생각이 나는구먼. 노날 사람들이..." "그렇슴마 ?" 사랑과 욕정이 짙게 밴 그의 눈길이 내 얼굴과 몸을 더듬었다. 나는 손길처럼 량감있게 닿는 그의 눈길을 다소곳이 받아들였다. 그의 눈길에 몸을 내맡기고 그의 눈속에서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 는 것을 바라보는 것엔 나름의 짙은 기쁨이 있었다. "그 노래도 가사가 있나 ?" "네. 실은 가사레 아주 도씁네다. 내레 한번 불러볼까요 ?" "응. 한번 불러 보라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서, 그가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그 의 눈길이 멀어졌다 싶자, 그의 입에서 낮고 차분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네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네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디요.... 그 가사가 불러낸 기억 한 토막이 꽃송이로 활짝 피어났다. 시골 도시 변두리의 낡은 이층짜리 련립주택 앞 조그만 꽃밭에 흔한 화초 들이 심어져 있었다. 간 밤에 내린 비로 흙 냄새는 싱그러웠고 화 초들은 생생했다. 열 두어살난 계집아이가 그 꽃밭을 가꾸고 있었 고 그 옆에서 두어 살 적은 사내아이가 거들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 었다. 뒤에서 남편도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느라 주름살이 깊어진 녀인이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띠고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찬히 들 여다 보면, 그 흔한 화초들 속엔 과꽃도 몇 송이 피어있을 터였다. 그 광경 위에 다른 기억이 불러낸 광경이 겹쳤다. 이제 서른살이 넘은 그 계집 아이가 사내 동생과 다투고 있었다. 다투는 까닭은 별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 내외가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것 에 마음이 상한 판인데 어머니가 남기신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동 생이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처분한 것이 그녀의 속을 긁은 것이었 다.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내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생각해보면, 내 가 싸운 것은 동순이가 아니었다. 내가 꾸짖은 것은 옆에 앉은 올 케였다. 동순이가 결혼한 뒤 사람이 바뀐 것은 제 아내에게 휘둘려 서 그렇다고 나는 믿었다. 이리 멀리 와서 돌아다보면, 싸울 것도 없는 것들을 놓고 싸운 것 이었다, 단 하나 남은 혈육과. 그리고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도 얄밉게 행동한 올케까지도. 시집간 디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문 더 생각나요. 리의 목소리가 내가슴에 긴 여운을 남겼다. 잔잔한 슬픔의 못물 에 잔 물결이 일었다. "도흔데. 노래두 도쿠, 가수도 도쿠. " 리의 노래를 칭찬하는 사이에도, 나는 이리로 올라올 때 동순이에 게 련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프게 떠올리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더운 물살로 밀려와서, 나와 동생 사이에 솟 은 얼음의 벽을 녹였다. '여기서도, 맘만 먹으문, 쉽게 전화할 수 있는데. 맘만 먹으문...' <제 13 장 3편> 하모니카를 한구석에 내려놓더니, 그가 책상 한쪽에 쌓인 책들 속 에서 잡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누님, 오늘 <루나스케입>이 새로 나왔습네다." <루나스케입>이 월면 기지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문 학동인 <셀레나이츠>에서 내는 동인지라는 것과 리가 얼마 전에 동 인인 장영실기지 요원의 소개로 <셀레나이츠>에 들었다는 것을 가까 스로 기억해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슴마?" "이번 호엔 내 시도 실렸습네다." 그가 수줍게 덧붙이고서 내 얼 굴을 살폈다. "저그나 시가? 하, 대단한데. 점 보디." 이미 그의 시를 여러편 본 터라, 그리 뜻밖의 얘기는 아니었다. "여깁네다." 그가 펴보인 장엔 글이 위쪽엔 영어로 씌어있었고아래쪽엔 한글로 씌어있었다. 아십니까 당신은? 외 1편 리명규 아십니까 당신은 닢사귀레 가지레 당창 하늘로 발돋음하는 까닭을 ?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이 당창 하늘을 올려다보는 까닭을 ? 중력의 우물 속에 갇힌 살이 하늘로 보내는 눈길이 그리도 애틋한 까닭을 ? 어느 찌들리고 시든 거리에서 당신의 걸음이 저절로 멈출 때... 두 번을 읽고나니, 그시의 뜻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리가 얘기 하고자 한 것은 인류는 우주로 뻗어나가도록 되었다는 것이었 다. 그가 하는 얘기야 물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시는 내겐 그저 그래 보였다., 뭐 그 시가 어떻다는 것보다 내가 원래 시라는 것을 그리 높이 여기지 않았다. 가만히 보면, 시라는 것은 별것도 아닌 일들을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아 대단한 것처럼 꾸미는 놀음 같았다. 시를 읽고 소리내어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들이 속이 좀 빈것처럼 생각되었다. 물론 나는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 았다. "도흔데. 내레 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디만, 저그나 시는 아주 도흔데..." 생각하지 않아도, 칭찬은 술술 나왔다. "누님이 도타 하시니끼니, 내레 점 안심이 됩네다." 그가 흐영한 낯빛으로 그 장을 넘겼다. "여기 또하나 있습네다." <나는 미리 슬퍼한다>라는 제목을 단 시였는데 꽤 길었다. 사람 이름들과 땅 이름들이 많이 나왔다. 더러 내가 아는 것들도 있었으 나 대부분은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내겐 그것이 앞의 것보다 나아보였다. "저그나." "네 ?" "난 이 시가 앞의 시보다 나은 것 같은데." 나는 과감하게 내 생각을 밝혔다. "특히 이 구절이 도하. <나는 미리 슬퍼한다 은하계의 비단길을 트다가 죽을 탐험가들을. 무덤 속에서 낯익은 잠을 즐길 운명이 아 닌 그들의 언제까지나 낯설 운명을>." "그렇슴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누님, 여러 사람들 이 그 시가 괜찮다고 합데다." <제 13장 4장> "저그나레 이리 멋딘 시인인 줄은..." 나는 그의 시를 정직하게 칭찬할 수 있게 된 것이 꽤나 흐뭇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에게로 몸을 숙였다. "축하합네다, 시인 리명규 동무." 그가 나를 번쩍 들어서 무릎에 앉혔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몸 속 깊은 곳에서 둑 하나가 터졌다. 그에게로 얼굴을 돌리자,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눈은 스르르 감겼다. "누님, 여기 보시라요." 긴 입맞춤이 끝나고 숨을 돌리자, 그가 잡지의 겉장을 가리켰다. "모쉐 실버먼." 다시 마음을 가다듬기는 쉽지 않았다. 어쩐지 낯선 이름은 아니 었지만, 모쉐 실버먼이 누구인지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입안 에 남은 감촉을 즐기면서,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미스터 실버먼이 우리 동인지에 시를 여섯 편이나 기고했습네다. 한번 생각해보시라요, 누님, 실버먼이 아마튜어들이 만드는 동인지 에 시를 여섯 편이나 기고했다는 걸."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내시들이 실버먼의 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실릴 때가 올 줄은 정짜로 생각지 못했습네다." "실버먼이란 사람이 그리 대단한가?" 대꾸보단 그의 가슴을 쓰다 듬는 데 더 마음을 쓰면서, 나는 무심코 물었다. 그가 한순간 입을 벌리고 나를 살폈다. 이어 내 볼에 입을 맞췄 다. "하아아... 누님, 마스터 실버먼은 작년에 노벧 문학상을 탄 시인입네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여긴 왜 올라왔 디? 그 사람도 월면 기지의 요원인가?" "아닙네다. <뉴 자이언>에 살려고 올라왔습네다." "그렇슴마? 그러문 그 사람 유태인인가?" "네. 원래 유럽 연방 시민이었디요. 파리에서 자랐는데, 작년 에 파리에서 유태인 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네다. 그 사건을 유럽 연방 정부에서 그냥 덮어두려고 하자, 그런 태도를 비난하고서, 작년 가을에 이리로 올라왔습네다. 그가 올라온 것이 한동안 화제가 됐드랬시요. 덕분에 <세컨드 자이 어니즘>이 다시 활력을 얻었다고꺼지 했디요." <뉴 자이언>은 서쪽 지역에 건설되는 유태인들의 공동체였다. 근 년에 서양 여러 나라들에서 반유태주의가 갑자기 기승을 부리자, 유 태인들 사이에 달 나라에 새로운 터전을 꾸미자는 움직임이 일어났 다. 이른바 <이차 시온주의>였다. 나는 참을성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에, 리의 시든 실버먼 의 시든,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유태인들의 공동체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빨리 그와 함께 자리에 눕고 싶었다. "누님, 미스터 실버먼이 우리 동인지에 시를 기고한 것에서 내레 무슨 계획 하나를 생각해냈습네다." 어쩐지 중요한 얘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그의 얼 굴을 살폈다. "무슨 계획인데?" "만일..."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만일 우리 기지에 무슨 일이 닐어나문, 내레 눈 딱 감고서 뉴 자이언으로 망명하갔습네다. 거기 가서 무슨 사업을 새로 시작할 생각입네다." "망명?" 놀라서 멍해진 내 마음 속으로 그의 말을 기계적으로 받 는 내 목소리가 아득히 들어왔다. "네." 그가 고집스럽게 확인했다. "왜 그런 니야길 하디? 무슨 일이 있었슴마?" 알지 못할 두려움 이 가슴을 꽉 죄어서, 나는 내 낯빛을 살피는 그를 다그쳤다. <제 13장 5편> "뉴스 못 들으셨습네까? 지금 폐양에선 해외 공관의 책임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답네다. 련방 정부의 대사나 부대사로 해외에 나간 우리 북반부 외교 요원들을 말입네다." "그래? 왜 그러디?" "아마 새로운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모양입네다. 그리 고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도 함꼬 확인하갔디요."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문 저그나는 폐양 사람들이 우리 사령관님도 불러내릴디 모른다고 생각하나?" "네." 창을 덮은 오이 잎새들 사이로 보이는 검은 하늘을 보지 않는 눈으로 내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조만간 그 사람들이 우리 사령관님도 소환할 겁네다. 거기꺼진 확실한데... 한번 내려가시 문, 사령관님께서 다시 올라오긴 점 어려울디도 모릅네다." "그래서 그런 사태가 발생하문, 저그나는..." 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아직도 그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사령 관님께서 폐양으로 불려가신다 하더라두, 저그나레 그렇게 뉴 자이 언으루 망명할 필요꺼지야 있을까? 사령관님이 내려가시문, 물론 큰일이긴 하디만..." "궁극적으론 우리 요원들 모두가 불려내려갈 겁네다." 그의 목소 리가 무거웠다. "모두?" "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얘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북반부에선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자유롭게 살고 있 었다. 폐양 사람들 눈에 그런 우리 기지가 어떻게 비칠지는 상상하기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 요원들은 두 해가 지나면 기지에 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안 내려갑네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의 말씨는 속에 큰 돌이 든 것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체류 기간이 끝나서, 내려갈 때가 돼도, 난 여기 달 나라에 남을랍네다." "여기 남아?" 내 가슴 속에서 또하나의 두려움이 솟았다. "왜 여기 남을라구 하디?" "내레 전에도 여러 번 누님께 니야기했디요? 여기가 지금 정짜로 뜻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여기가 인류가 뻗어나가는 생장점 이라고?" 나는 자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이리로 올라올 때 이미 지구 땅을 다시 밟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네다." 나는 그가 한 말을 새겨보았다. 너무 급작스러운 얘기여서, 정신 만 얼떨떨할 뿐,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랐다. 그가 우주 탐사나 셀레나익트 무브먼트와 같은 일들에 관심이 아주 큰 것이야 이미 알 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이 이렇게 극단적인 줄은 몰랐었다. 달 나라에서 자라난 우리 아이들이 먼 행성들의 탐사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그가 얘기했을 때도, 나는 그의 얘기를 별 생각없이 받아 들였었다. 눈 앞에 그를 따라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낯선 공동체로 살러가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믿음직스러웠지만, 영어라곤 떠듬거리는 인사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내 처지에선, 그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 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그나." "네?" "왜 하필 뉴 자이언이디? 망명하는 것이야 거기보단 장영실 기지가 차라리 낫디 않을까? 아무래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보단 같 은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게..." "하아, 누님도 남반부 사람들을 두둔할 때가 다 있습네까?" 이어 그는 정색했다. "내레 뉴 자이언으로 가려는 것은 월면 기진 역시 기지기 때문이 디요. 아무리 커도, 월면 기진 성격상 임시적이디요. 반면에 공동 체는 영구적입네다. 그렇잖습네까? 내레 찾는 건 영구적인 겁네 다. 내 운명을 가능한 한 영구적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이 옳디 않갔 습네까?" <제 13장 6편>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살피는 눈길이 내게 묻고 있었다. <나랑 함께 갈랍네까?>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려고, 나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저그나가 방금 무슨 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실은 전부터 이곳에서 무슨 가게를 하나 낼까 하는 생각을 해왔 시요. 처음엔 망명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그랬는데. 그러다가 좀 깊이 생각해보니끼니, 그럴 듯합데다. 내레 돈이 없으니엑니, 처음 엔 박진동 선생이나 도로시의 힘을 빌려서... 이 근처에서야 물론 어렵갔디만, 서쪽 지역으로 가문, 미국 기지하 고 일본 기지 가까이로 말입네다, 드래코 태번의 분점을 내는 것도 가능할 겁네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나는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 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또 무엇이 있나?> "술집이 아니드라도, 공동체엔 여러 가지 기능들이 필요하니끼니, 도흔 것을 하나 생각하기만 하문..." 한순간 머뭇거리더니, 그가 결연히 덧붙였다, "저엉 안 되문, 그곳에 수경 재배 요원으로 취직 하디요." "달 나라에서 솜씨 도흔 수경 재배 기술자는 언제라도 환영을 받 갔디." 나는 지금은 그의 자신감을 높여주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 다. "저그나 작물 재배 솜씨야 더 말할 것이 없으니끼니..." 그가 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뉴 자이언 같은 공동체 들이 앞으로 또 생길 겁네다. 미국의 모르몬 교도들이 뉴 자이언 근처에 <뉴 솔트 레이크 시티>를 건설한 계획을 세웠다는 니야기도 있습데다." "그렇슴마? 이러다간 종교 집단들이 달 나라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류행하갔구먼." 나는 짐짓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네. 지금 많은 사회들에서 근본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니끼니, 그 럴 가능성도 작딘 않디요. 그래서 달 나라의 개척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올라올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습네다. 실은 전통적 으로 그랬습네다.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서 개척하는 것은 흔히 종 교적 소수파들이디요. 미국이 바로 그런 경우 아닙네까?" 나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섰다. 호박 넌출로 덮여 포근해 보이는 우리 <신방>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직이 말했다, "저그나레 망명하 문, 나도 따라가갔슴메." 한동안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더운 숨결이 내 오른 귀에 닿았다. 내 팔을 잡은 그의 손이 뜨거웠다. "누님." "응?" "만일 누님이 나랑 함께 가디 않갔다고 했으문..." 감정이 짙게 배어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만일 내레 저그날 따라가디 않갔다고 했으문...?" 그를 돌아다 보면서, 나는 짐짓 고집스럽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수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문질렀다. "만일 누님 이 날 따라가디 않갔다고 했으문... 그래도 나는 때가 되문 망명했 을 겁네다. 그러나 나 혼자 사는 삶이 무슨 재미레 있갔시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는 것은 언제라도 반 가운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밝은 냄빛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이미 누님이 함께 간다 했으니끼니..."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천천히 안쪽으로 향했다. .너른 호박 잎사귀들이 거센 전 등 불빛을 가려주어서 아늑한 우리 신방을 향해. 곧 맛볼 짙은 즐 거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해서, 내 마음에선 다른 생각들이 한옆으로 밀려났다. 두 해 만에 다시 이어진 열락의 회로가 몸 속에서 고압 선처럼 웅웅거렸다. <제 13장 7편> 매트리스를 깔고 함께 누운 뒤에야, 나는 그의 몸이 아직도 굳었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녀느 때보다 말수가 적었고 내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길엔 뻣뻣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음이 자꾸 무슨 생 각으로 끌리는 듯, 눈길도 멀었다. "저그나, 또 무슨 일이 있슴마?" 내 아랫배를 쓰다듬는 그의 오 른손을 끌어 두 다리 사이에 넣고 허벅지로 꼭 끼고서,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가 이내 눈길을 돌렸다. 그저 손을 내게 맡 긴 채. 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나는 기다렸다. 이럴 때, 기다리는 것엔, 그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그리고 그가 스스로 손을 움직여 나를 애무하기를 기다리는 것엔, 양념처럼 살짝 섞인 괴로움 으로 오히려 섬세해진 즐거움이 있었다. 그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가 마음을 정한 것이었 다.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내 아랫도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실은 아까 드래코 태번에 들렀더니,"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즐거움의 맥동에 아득해진 내 마음 속으로 그의 얘기가 들어왔다. "박진동 선생께서 좀 나쁜?소식을 하나 알려줍데다. 장영실 김 사령관님께서 우리 사령관님께 경고했답네다, 폐양에서 <사수대>를 동원해서 두 기지의 통합 사업을 방해하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다 고." 거칠게 흐르는 즐거움의 물살 위로 힘겹게 고개를 쳐들고, 나는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수대?" "네. 누님, 혹시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이 있습네까?" "아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이 처음인도." "사수대는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의 약칭이디요. 사수대는 비밀 조직인데... 말하자면 일종의 프락찌야 집단입네다." $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웃몸을 반쯤 일으켰다. "프락찌야라 구 했슴마?" "네." 그가 슬그머니 내 다리 사이에서 손을 뺐다. "사수대는 주석님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프락찌야들이라고 합데다." "주석님께서?"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문... 우리 기지 요원들 가운데에 프락찌야가 있단 니야긴가? 주석님께 직접 보고하는?" "네. 그런 니야기디요. 나도 사수대란 것이 있단 니야기만 들었 디, 실제로... 이번 정보는 남반부에서 나온 것이니끼니, 정확할 겁네다. 이번에 집권한 세력이 프락찌야를 시켜서 흑작을 부리려 한다는 것이디요. 폐양에서 월면 기지를 통제하기가 곤란하니끼니, 그리 사수대를 통해 두 기지의 통합을 막으려고 나설 만도 하디요." "그래?" 나는 얘기를 끝내고 싶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얘 기가 아니었다. "저그나, 걱덩이 되긴 하디만, 사령관님께서 잘처 리하시갔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니야긴 내일 다시 하디. 사수댄간 뭔가 하는 것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 손길이 그의 일어 선 남근을 스쳤다. 그가 싱긋 웃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 속의 어두운 생각을 흩 어 버리려는 것처럼. 이어 웃몸을 내 배 위에 얹었다. <제 13장 8편> 저릿한 즐거움이 그의 禿횬막 빨려들어갗 왼쪽 젖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누가 그런 프락찌야일까 생각해보 았다. 그럴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다른 편으론 모두 의심스러웠다. 사령관님과 리명규를 빼놓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가 온몸을 내 몸 위에 싣자, 옆으로 밀려났다. 그는 익숙해진 몸짓으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내 몸도 익숙한 몸짓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아득해진 정신 속으로 즐거움이 흰 꽃 들로 피어났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즐거움의 넌출이 내 살 의 더 깊숙한 구석으로 순을 뻗었다. 그 순에서 더 아름다운 꽃들 이 피어났다. 이윽고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더운 물살이 차츰 낮아지기 시작했 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젖가슴에 고인 땀을, 내 땀에 합쳐진 그 의 땀을, 내려다보았다. 그 땀이 우리가 함께 찾았던 열락의 땅을, 즐거움의 후미진 구석들을 생각나게 했다. 갑자기 북받친 사랑에 나는 수염이 까슬까슬한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마치 우리를 내던지려는 것처럼.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좀 약했다. 리가 다시 몸으로 나를 덮었다. 위에서 내 몸 위로 떨어지는 것 을 자신의 몸으로 막으려는 것처럼. 땅은 계속 흔들렸지만, 다행히 흔들림은 점점 약해졌다. 나는 리의 몸을 한껏 껴안았다. 흔들리는 땅은 우리가 사는 세상 이 거칠고 낯선 세상임을 일깨워주었다. 땅의 흔들림은 목숨을 가 진 것들을 거부하는 달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지짓인 모양이데. 아니, 월진이디." 내 몸을 덮었던 몸을 일으 키면서, 그가 농담을 시도했다. "정짜로 월진이었나?" 나는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어쩐지 월 진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월진이 드물고 지진보다 훨씬 약하단 것 을 훈련소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다. "월진밖엔..." 그가 자신없는 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싯구가 떠올랐다. <나는 미리 슬퍼한다 은하계의 비단길을 트다가 죽은 탐험가들을>. 나쁜 징조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싯구 를 마음 속에서 몰아냈다.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눈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도 나 와 같은 생각을 했음을. 월진은 아니었다. 월면 기지에서 일어난 무슨 사고였다. 그리고 달 나라에서의 사고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 더라도, 치명적이었다. 그러자 내 마음을 감싸려는 것처럼, 그가 얘기를 바꿨다, "누님, 월진은 아닌 것 같고. 과학자들의 실험일 수도 있습네다. 지질학 자들이 무슨 실험을 할 수도 있디요. 누님도 기억하시디요? 아폴 로 십사호가 실험한 것말입네다." "응." 대꾸는 했어도, 나는 땅이 흔들린 것이 그런 실험 때문이 었다곤 생각지 않았다. 그런 실험을 한다면, 누구라도 미리 월면 기지들에게 알렸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갑자기 시려오는 뼛 속으로 느꼈다, 무슨 큰 재앙이 이곳 사람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는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정액이 내 몸속에서 허벅지로 .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한껏 오무렸다. 그로부터 받은 물을 다시 내 자궁 속으로 넣으려는 것처럼. 메마른 이 땅의 바위 바닥에 쏟기엔 물은, 그것도 새로운 목숨이 들어있는 그 짙은 물은, 너무 아까웠다. <제 14장 1편> "당연하디요. 우리레 이리로 올라온 디 발쎄 오개월이 넘었으니 끼니. 여러분들이 의식했든 하디 못했든, 우리 몸은 그 동안 열심 히 달 나라의 약한 중력에 적응해 왔습네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몸 은 모두 처음 올라왔을 때와는 상당히 다릅네다. 근육 조직이 좀 줄어들었고 뼈에선 칼슘이 줄어들었습네다/ 혈액도 상부로 재배치됐고 골격의 구조도 약간 변했습네다." 얼굴에 가벼 운 웃음을 띤 채, 김인구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인 .사람들을 둘러다보았다. 내 오른쪽에 앉은 최옥순 소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박 사에 대한 감탄과 사랑으로 그녀의 얼굴은 환했다. 그녀는 여러 사 내들과 동침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김 박사에게 쏠려 있었다. 안타 깝게도 김 박사는 그녀에게 마음은 그리 끌리지 않는 눈치였다. "따라서," 김 박사가 신봉섭에게 말했다. "지금 신 동무레 지구 로 내려가문, 신 동무의 몸이 지구의 중력에 다시 적응하는 데는 여 러 달이 걸릴 겁네다." "네, 잘 알갔습네다." 신이 대꾸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령관님께서 며칠 전 갈릴레오 공 항 가까이에서 추락한 미국 우주선 <니미츠 호>의 승무원들과 탑승 객들의 장례식에 가셨으므로, 모처럼 커피를 끓인 것이었다. 이 모임은 <통일촉성동맹>의 설립에 관해 논의하는 모임이었다. 높은 사람들이 사령관님을 수행했으므로, 기지엔 녀느 때보다 좀 자 유롭고 한가로운 분위기가 어렸다. 그래서 사람들의 몸짓과 목소리 도 다른 모임들에서보다 크고 자연스러웠다. `뭐니뭐니해두, 커피만한 건 없디.' 입안에 남은 커피의 뒷맛을 즐기면서, 나는 비스켓을 한 조각 집어들었다. "노평구 동무, 니야기하시오." 김 박사가 말했다. 노가 들었던 손을 내렸다. "네, 감사합네다, 김 상좌 동무. 제 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 몸이 그렇게 많이 변했으문, 우리의 건강 상태는 지금 어떤가, 별 이상은 없는가, 하는 점입네다." 김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걱덩입니다. 그러나 걱덩 할 것은 없습네다. 그런 신체적 변화의 속도와 폭은 예상한 것에서 벗어나디 않았습네다. 여러분들 모두 건강합네다. 특히 노 동무는 건강 상태가 아주 량호합네다." 웃음이 터졌다. "네, 잘 알갔습네다." 노가 좀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대꾸했다. 나는 흘긋 왼쪽에 앉은 리명규를 살폈다. 그의 잔엔 아직도 커피가 남아있었다. 그가 후줄근해 보이는 손수 건을 꺼내 소리나지 않게 코를 풀었다. `왜 저리...'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살폈다. 며칠 전 부터 그는 풀이 죽어서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오늘 모임에선 아직까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감기에 걸린 탓도 있 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그의 마음에 무겁게 얹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가?' 나는 좀 조급해진 마음으로 모 인 사람들을 슬쩍 둘러다보았다. <제 14장 2편> 통일촉성동맹을 만드는 일이 되어가는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만 도했다. 이번 모임은 벌써 세번째 모임이었다. 그 동안 많은 사람 들이 토론에 참여했고 갖가지 얘기들이 나왔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첫번 모임에선, 누가 두 기지의 통합에 랒해 사령관님으로부터 아 직 공식적 얘기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서, 그 문제에 관해 얘기하 다가 끝났다. 그끄저께 있었던 두번째 모임에선 통합 문제로 평양 과 사이가 나빠질 경우 우리 요원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 가능 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런 가능성에 관해 논의가 제대로 이루지기도 전에, 화제는 어찌 어찌하다가 그렇게 오래 달 나라에 머물 경우 우리 몸이 무슨 영향 을 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흘러버렸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들 의 관심을 끌 만한 주제였다. 그래서 오늘 모임은 그 문제를 집중 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그 문제를 따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야 나도 인정했지만, 어느 사 이엔가 이번 모임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옆으로 밀려났다는 것 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런 모임에 영향을 미칠 길이 없다는 것도...' 나는 다 시 그를 흘긋 살폈다. 바로 옆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 적잖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비록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 터 아낌과 존경을 받았지만, 그가 이런 모임을 주도할 만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공식적 모임에선 무엇보다도 지위나 나 이가 중요했다. 나이가 젊은 데다가 군인들이 대부분인 조직에서 민간인인 까닭 에, 그는 해군 중좌인 량정애 박사나 김상윤 소좌처럼 자신의 뜻을 서슴없이 내세울 수가 없었다. 왝래서 어느 사이엔가 량 박사가 모 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춘기의 소년처럼 다루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태 도에 속으론 반발했지만, 그녀의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하도 능란해 서, 그로선 어떻게 해볼 길이 없었다. 오늘은 김상윤 소좌까지 사 령관님을 수행해서 고다드 기지에 간 덕분에, 량 박사의 역할이 더 욱 돋보였다.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지문, 도흘 건 없는데... 내가 중간에서 다 리를 놓아 두 사람 사이가 너무 나빠디디 않게 해야...' p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겁네다 - 완전한 무중력 상태와 약한 중력 사이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상당히 큰 중력 아래서 발생해서 진화했습 네다. 그래서 중력이 전혀 없는 상태는 큰 문제들을 야기합네다. 여러분들께서 우주선을 타고 여기로 올 때 경험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은 무중력 상태에선 여러 가지로 부정적 영향을 받습네다." 우주선에서만이 아니라 달 나라에 닿은 뒤에도 겪은 괴로움을 떠 올리면서, 나는 모르는 새 고개를 저었다. 눈치를 보니, 다른 사람 들도 그때의 기억은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중력 상태가 야기하는 신체적 문제들 중엔 아직도 해결되디 않 은 것들이 있습네다. 그래서 과연 사람이 별 나라로 여행할 수 있 갔느냐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습네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전해 질의 감소입네다. 무중력 상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적혈구와 전해질의 감소 인데, 적혈구는 처음엔 감소하디만, 한두 달 지나문, 회복되기 시작 합니다. 그러나 전해질은 계속 감소합네다. 달 나라엔 중력이 있 으므로, 그런 전해질의 감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네다. 그점을 잊지 말아야 합네다." "김 상좌 동무." 해군 중사이면서 전산 전문 요원인 박순조가 손 을 들었다. "박순조 동무, 니야기하시오." "네, 감사합네다.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저번 모임에서 김안옥 박사 동무레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레 여기서 오래 근무한 뒤에도 지구로 내려가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네 다." 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김안옥 박사 쪽에 흘긋 눈길을 주었 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이 논의의 맥을 제대로 짚은 것이 었다. <제 14장 3편> "남반부의 장영실 기지와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를 통합하는 일이 그 일을 추진하는 분들의 예상대로 잘 풀릴 수 있습네다. 한편으론 뜻밖의 문제가 생겨서, 잘 풀리디 않을 수도 있습네다." 그 단단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만일 일이 잘 풀리디 않아서 우리레 여기 월면 기지에 오래 체류 하게 될 경우, 우리 몸은 과연 무슨 영향을 받을 것이며 우리가 과 연 지구에 내려가서도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문 감사하갔습네다." "박 동무가 말하는 그 <오래>가 어느 정도 긴 시간을 뜻합네까?" 김 박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박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십 년 정도로 잡으문, 아니 되갔습네운?" 이어 변명처럼 덧붙였다. "이 런 일에서 시간을 점 여유있게 잡아야 합네다." "십 년이라. 박 동무레 아주 장기적으로 보는구먼." 김 박사가 빙그레 웃었다.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뜻밖에도 거센 분노의 낯빛이 박의 얼굴 을 스쳤다.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야 당창 도흔 일이디요." 량 박사가 웃으 면서 박을 가볍게 두둔했다. "박 동무, 내레 조금 전에 니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긴 기간에 대 해선 자료가 없습네다. 달 나라에서 십 년씩이나 산 뒤에 뒤늦게 지구로 내려간 사람은 아직꺼진 없었습네다. 실제론 앞으로도 좀처럼 나올 것 같디 않습네다. 현재 월면 기지 들이 모두 요원들이 한꺼번에 이 년 이상 근무하디 않게 하고 있잖 습네까? 지금꺼지 관찰된 경우 중에서 가장 긴 것은 삼 년 칠개 월 간 여 기서 지낸 뒤 지구로 귀환한 사람의 경우였습네다. 따라서, 박 동 무레 나보고 <내레 여기 월면 기지에서 십 년 동안 근무한 뒤에 지 구로 내려가문, 다시 활동할 수 있갔습네까?>라고 묻는다문, 내레 할 말은 없습네다. 모른다는 니야기 밖엔." "그러문 김 상좌 동무, 오 년은 어떻습네까?" 박은 고집스럽게 물었다.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따라서 웃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박의 얼굴 을 스친 분노의 낯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박은 해군 중사로 전산 전문가였다. 녀는 때는 그는 마음씨 좋은 젊은이었다. `저렇게 맘씨가 도흔 젊은이레 화를 낼 정도가 됐으문, 사람들이 크게 걱덩하고 있단 니야긴데. 겉으룬 태연한 척들 하디만...' "오 년에 대해서도 지금 자료는 없습네다." 마찬가지로 고집스럽 게 김 박사가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가 뭐 법정에서 지술하는 것도 아니고... 내 추측을 한번 말해보갔습네다." 사람들이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14장 4편> 기대에 찬 얼굴로 김 박사의 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자, 앵 까부터 여러 번 눌러넣었던 어두운 생각이 슬그머니 다시 떠올랐다. `이 사람들 가운데 뉘레 <사수대> 프락찌얀가?'~ 리명규의 얘기를 들어보니, <사회주의 혁명 수호대>는 정짜로 무 서운 조직이었다. 2011년 북반부와 남반부가 <조선 련방 공화국>으로 통일될 때, 우 리 북반부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 있는 방책들을 여럿 마련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사 수대였다. 그 조직의 요원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위기를 맞을 때 마지막 후위 로 활약하기 위해 북반부 사회의 여러 전략적 부분들에 몰래 투입되 었다. 그 일이 하도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서, 201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북반부의 지도층에서도 나 왔을 때, 그런 사람들이 암살되면서, 비로소 사수대의 정체가 차츰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조직의 정체는 밖에 제대로 알려 지지 않았다. 리의 얘기를 듣자, 나는 사령관님의 안전에 대해 마음이 쓰였다. 지금 두 기지 사이의 통합을 막는 길들 가운데 가장 쉽고 확실한 것 은 사령관님을 암살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리가 지적하기 전에 나도 생각했었다. "지금 달 나라에서 오 년 이상 산 사람들은 많습네다. 여기서 태 어난 아이들도 있습네다. 그들의 신체는 달 나라의 약한 중력에 비 교적 잘 적응했습네다. 그래서 지구에서만 산 사람들이 신체완 여 러면에서 다릅네다. 특히 여기서 수태되어 태어난 아이들은 그렇습 네다..." 김 박사의 얘기를 한귀로 들으면서, 나는 슬그머니 둘레의 사람들 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처음엔 우리 기지의 요원들 스물셋 가운데 적어도 셋은 의심에서 벗어났다 고 여겼다 - 나와 사령관님과 리명규. 그 얘기를 리에게 하자, 그는 소름이 끼치는 얘기를 했다. 사수 대로선 통합 운동을 막기 가장 좋은 방법은 사령관 자리에 자신들의 프락찌야를 앉히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사령관님을 모욕하는 듯해 서, 나는 리에게 화를 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의 얘기는 리 론적으론 맞는 말이었다. 프락찌야를 가려내는 일은 그만큼 어려웠 다. `하긴 꼭 프락찌야가 들어왔으리란 법도 없디.'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무엇인지 모르 지만, 나는 오늘 모임에서 어쩐지 좋지 않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니야기하문, 나는 그들에게 지구로 내려가도 도타고 니야기할 자신이 없습네다. 그들의 신체가 궁극적으로 다시 지구의 강한 중력에 적응한다 하더라도, 그런 적응은 신체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습네다. 신체는 어떤 형태로든지 그런 무리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합네다. 물론 운동을 열심히 하문, 어느 정도 신체의 퇴화를 막을 수도 있디 요. 그러나 운동으로 약한 중력의 효과를 장기간에 걸텨 상쇄하긴 어렵습네다." "네, 잘 알갔습네다." 박이 대꾸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한 다는 생각을 하면, 그래서 하늘은 파랗고 땅은 부드럽고 촉촉한 지 구를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駑 갑자기 캄캄해 지면서 숨이 가빠졌다. <제 14장 5편> "량 박사 동무, 말씀하시디요." 김 박사의 말에 한참 시끄러웠던 자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네. 김 상좌 동무께서 다방면적으로 그리고 세말적으로 설명해 주신 덕분에 이제 논점은 분명해딘 것 같습네다." 량 박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 나라에서 오래 지낸 사람의 몸은 다시 지구의 강한 중력에 적 응하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설령 제대로 적응한다 하더라도,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입네다. 그러문, 김 상좌 동무, 그렇게 몸이 지불하는 대가는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입네까?" 김 박사가 어깨를 추스렸다. "뉘레 알갔습네까? 자료가 아주 드 문데? 이거 확실한 니야긴 아닌데, 다시 내 추측을 니야기하문, 그 렇게 다시 적응한 몸은 정상적으로 산 사람들의 몸보다 빨리 늙을 것입네다. 그리고 나이가 들문, 아마도 여러 가지 병들에 시달릴 것 같습네다. 특히, 김 박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심장과 뼈에 문제가 생길 가 능성이 높습네다." 량 박사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를 하나 들문, 젊을 때 아주 힘든 운동을 한 운동 선수를 생 각할 수 있습네다. 젊을 때 몸을 혹사한 운동 선수들은 대개 늙어 서 여러 가지 병을 앓게 됩네다. 그리고 오래 살디도 못합네다. 그래서 다시 지구의 중력에 적응한 사람은 수명이 짧아딜 겁네다. 얼마나 짧아디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갔디요. 성격과 체질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날 테니끼니."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수슨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막히면서,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마음 이 두 기지의 통합에 반대하는 쪽으로 도는 것이 눈에 훤히 들어왔 다. 그들의 눈앞엔 이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만이 어른거릴 터였다. 빨리 무슨 수를 좀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마음만 다급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 았다. 나는 흘긋 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모임의 분위기를 받아들인 듯했다. 얼굴은 어두웠고 어깨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급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꼭 다문, 입술엔 오히려 비장한 결의 같은 것이 어렸다. 문득 멍해진 가슴을 아픔 한 줄기가 뚫었다. 그가 말할 수 없이 안스러워지면서, 그를 감싸서 험한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충 동이 내 몸을 잡았다. 그가 꼭 내가 낳은 어린 아들처럼 느껴졌다. 품에 안고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다시 내뱃속에 넣고서, 포근 한 잠을 자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그의 뜨거운 남근이 내 살을 헤치고 들어올 때면, 나는 그를 모두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부대끼곤 했다. 그의 온몸을 뜨겁고 단단 한 덩이로 뭉쳐서 내 자궁 속으로 넣고 싶은 미친 충동에 사로잡혀 그의 몸을 힘껏 껴안고서 숨을 헐떡이곤 했다. 그 생각이 나면서,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내가 지금 주착없이...' 나는 덜미가 좀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리가 나를 흘긋 돌아다보았다. 내 눈길에서 내 마음을 읽은 모양 이었다. 그의 눈에서 욕정의 불길이 확 타올랐다. 울분인지 절망 인지 모를 그의 무거운 감정이 기름 노릇을 해서, 그 불길을 다른 때 보다 훨씬 거셌다. 그때 한정필이 들어와서 김 박사에게로 다가갔다. "여러분," 한의 얘기를 듣고나서, 김 박사가 말했다. "지금 텔 레비전에서 장례식 광경을 방송하고 있답네다. 그래서 질문하실 분 이 계시문, 질문을 받고서 오늘 토론을 결속하갔습네다. 그러문 질 문하실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급해하는 소리가 났다. "질문할 분이 없으문, 오늘 토론은 이걸로 결속하갔습네다." 김 박사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강단에서 물어났다. 서둘러 박수를 치고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휴게실을 향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 등에 량 박사의 밝으나 힘이 들어 간 목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그러문 다음 모임은 삼사일 후에 개 최하갔습네다. 감사합네다." <제 15 장 1편> 토마토를 넣자, 혼합기가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리가 하도 커 서, 세척대 건너편에 놓인 합성수지 그릇들이 덜덜거렸다. '그것 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부품이 망가뎠다구 해두, 이리...' 나는 지금 강당에서 열린 모임에 내갈 토마토 즙을 만드는 참이었다. 이젠 온실의 토마토가 제대로 익어서, 즙을 만들 만큼 토마토를 딸 수 있 는 데다가, 오늘 모임이 무척 중요했으므로, 나는 모처럼 차 대신 토마토 즙을 내가기로 한 것이었다. 마침 김수형이 준 꿀 한병도 있었다. '소린 요란해도, 가는 거야 제대로 갈갔디.' 꿀을 친 토마토 즙을 마 시고서 입맛을 다실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짐짓 너그러운 눈길로 몸 을 떠는 혼합기를 내려다보았다. 혼합기 속에 들어간 토마토들이 갈리면서, 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수상 기에서 나오는 사령관님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해졌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네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상기 화면에 나온 사령관님의 모습을 살폈다. 사 령관님께선 녀느 때처럼 하도 많이 빨아서 물이 바랜 여름 작업복을 입고 계셨다. 옷이 좀 헐렁한 것도 같았다. 이리로 올라오신 뒤로, 사령관님께선 눈에 뜨이게 마르셨다.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의 주름은 골이 깊어졌다. '사모님께서 올라오시문,마음이 얹잖으시갔디...' 나는 적잖이 무거운 마음으로 사모님의 당부를 떠올렸다. "...우리 김일성 혁명기지에게 가장 도흔 길은 장영실 기지와 합티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네다." 사령관님께선 잠시 말을 멈추시고서 강 당 안에 모인 사람들을 한바퀴 둘로다보셨다. "일단 그런 결론이 나자, 나는 곧 장영실 기지의 김용휴 사령관과 두 기지의 통합에 관해 의론하기 시작했습네다. 다행히 김 사령관도 이문제 에 대해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네다. 그래서 우리의 협상은 상 당히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렇게 합의서를 만들게 되었습네다. 물론 여러분들께 처음부터 사정을 니야기하고 동의를 얻어서 일을 진행 하는 것이 옳았습네다. 그러나 이런 일에선 무엇보다도..." '잘 하문,시간이 제대루 맞갔다. 사령관님께서 말씀을 마티신 뒤 바로 들고 들어가문,분위기도 살아날 것이구...' 나는 다시 토마토를 집어넣 었다. 혼합기 소리가 이내 사령관님 목소리를 밀어냈다. 고장난 혼합기를 살 피더니, 김권식은 능동소음 뭐라는 부품이 고장나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소리를 중화시킨다는 조그만 부품 하난가 고장이 나자, 여태껏 소리 하 나 내지 않고 움직이던 기계가 그렇게 시끄럽게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 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두달을 견뎌야 하다니, 쯧쯧.'나는 다시 혀를 찼다. 김은 부품이 올라오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부품에 따 라선 두 달보다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평양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른 것보다 거 기서 우리 북반부 사람들이 남반부 사람들에게 뒤지는 것이었다. 장영실 기지에선 필요한 것들을 서울에 신청하면, 아무리 늦더라도, 한 달을 끄는 법은 없단 얘기였다. 혼합기야 그리 자주 쓰는 기구가 아니어 서 크게 성가신 문제는 아니었지만,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마음이 좀 쓰 였다. 장영실 기지에 들르게 되면,필요한 부품을 얻을 수 있나 알아보겠다던 김의 얘기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제 15장 2편> 나는 즙을 유리병에 따랐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문, 되갔디?' "...삼조. 통합 월면 기지는 스스로를 조선련방공화국 정부의 관 할 아래에 두고 련방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다. 제사조. 통합 월면 기지는..." 사령관님께선 이제 앞에 놓인 서류를 읽고 계셨다. 우 리 기지와 장영실 기지 사이의 합의서 같았다. `이젠 최 소좌가...' 나는 화면에서 최옥순 소좌를 찾았다. 강 당에 차를 내갈 때가 되면, 그녀가 스스로 부엌으로 왔다. 그러나 화면 속의 그녀는 일어나려는 기색이 없었다. 사령관님의 얘기에 빠져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통합이 되문, 모두 도캉다고 하디만... 그러나 과연 그것이 그 리 도흘까?' 남은 토마토들을 거의 기계적으로 혼합기에 넣으면서, 나는 마음 한구석에 밀어넣었던 생각을 다시 꺼냈다. 남반부 기지와의 통합엔 분명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그 러나 나는 지금 자리에 맞지 않는 그 생각들을 혼합기의 소리로 밀 어냈다. 즙을 병에다 따르고서, 다시 화면을 살폈다. 맨 앞 줄에 앉은 량정애 박사가 자리에 일어섰다. 그녀의 자세가 어쩐지 내 눈길을 끌었다. 꿀병 마개를 손에 쥔 채, 나는 그녀의 낯빛을 자세히 보려고 수상 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박봉근 동무께선 무슨 권한으로 장영실 기지와의 통합을 추진하 셨습네까?" 비록 높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어쩐지 위협적인 울림이 있었다. 문득 걱정이 가슴에 무거운 그늘을 드리웠다. 이어 그런 걱정은 량 박사가 사령관님을 <박봉근 동무>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는 생각 이 뒤늦게 들었다. 지금까지 우리 기지의 누구도, 량 박사까지도, 사령관님 앞에서 사령관님을 그렇게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 아주 딱딱한 자리 에선 <존경하는 사령관 동무>하고 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사령관 님>이었다. 량 박사가 사령관님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그녀가 사령관님에 그저 맞선 것이 아니라 사령관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 였다. 한순간 사령관님컸 진지하고 차분한 낯빛이 흔들렸다. 량 박사의 물음은 사령관님께도 좀 뜻밖이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김일성 혁 명기지 사령관의 자격으로 일을 추진한 겁네다." "박봉근 동무께서 기지 사령관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속에 우 리 김일성 혁명 기지를 남반부의 자본주의 정권에 팔아넘길 수 있는 권한도 들어있습네까" 여전히 낮았지만, 량 박사의 목소리엔 미움 과 경멸이 짙게 배어있었다. 사령관님께선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한바퀴 둘러다보셨다. "나는 우리 기지를 남반부에 팔아넘기는 것이 아닙네다. 량 중좌 동무는 지금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네다." 사령관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만일 박봉근 동무께서 우리 기지를 남반부 사람들에게 팔아넘기 디않았다문, 남반부 사람들과 협상한다는 사실을 어째서 그렇게 비 밀로 했습네까? 떳떳한 일이라문, 먼저 폐양의 당국자들과 상의하 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권한을 위임받았어야 하는 것 아닙네까?" "그건 내레 아까 니야기했다시피..." "어쨌든," 그녀가 높은 목소리로 사령관님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슨 생각으로 데러나?' 나는 거의 소리내어 말했다. 도무지 량 박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제 15장 3편> "폐양의 당국자들은 박봉근 동무레 남반부의 고용분자로서 자신 에게 맡겨딘 신성한 임무를 배반하고 우리 김일성 혁명 기지를 남반 부에 팔아넘기려 했다고 판단했습네다." 량 박사가 선언했다. 내 가슴이 얼어붙었다. 한 손을 허리에 얹고서 사령관님께 맞선 량 박사에게서 나는 먹이를 찾고 덮칠 기회를 노리는 뱀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홍 슬립 아래 드러난 그녀의 흰 살결은 무슨 동물적 기운으로 팽팽해진 듯했다. 나는 처음엔 량 박사가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것보다도 사령관님께 맞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더 놀랐었다. 이제 그녀는 사령관님의 말까지 끊고 있었다. 문득 머리 속으로 <사수대>란 말이 스쳤다. "지금 이 기지를 대표하는 사람은 량정애 중좌 동무가 아니오. 바로 나요." 사령관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나는 두 기지의 통합에 관해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했고 그런 의 견을 충분히 고려하여 일을 추진할 생각입네다. 그러나 량정애 중 좌가 지금 보인 것과 같은 행동은 용납될 수 없읍네다." "그 점에 대해선, 안됐디만, 박봉근 동무께서 아주 잘못 알고 계 십네다." 차가운 비웃음이 량 박사의 얼굴을 얼어붙은 달빛처럼 비 췄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동화 속의 마귀할멈의 얼굴처럼 보였다. 할말을 잊으신 듯, 사령관님께선 그저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녀의 최면술에 정신을 앗긴 듯 한 얼굴로 그녀를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손가방에서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어 사 령관님을 향하는 대신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여러분, 이 서류는 우리 북반부 인민들의 위대하신 지도자 김시형 주석 동지께서 손수 수표하신 명령서입네다." 앞쪽에 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빼어 그녀가 쳐든 종이를 살폈다. "이 명령서의 내용은 이렇습네다: <김일성 혁명 월면 기지의 사령관인 륙군 중장 박봉근은 사회주의 정신이 투철하디 못하여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디 못 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남반부 자본들의 고용분자 노릇까지 하면서, 김일 성 혁명 월면 기지를 자본걀 계급에게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계급을 박탈하고 사령관의 직책에서 해임한다. 동시에 현 기지 부사령관 륙군 대좌 최철웅을 금일자로 소장으로 승진시켜 서 월면 기지 사령관 직무 대리로 임명한다. 신임 사령관은 박봉근을 즉시 체포하고 보고하라. 이천삼십구년 칠 월 일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시형.>"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공기까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무거운 그늘이 내려 그들을 덮었다. `칠월 일일? 그러문 어젠데...' 얼어붙은 마음 한구석으로 그 명령서의 날자가 어제라는 사실에 무슨 뜻이 담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박봉근 동무," 량 박사가 비웃음과 경멸이 담긴 눈길을 사령관 님께 던졌다. "당신은 이제 이 김일성 혁명 기지의 사령관이 아닙 네다. 장령도 아닙네다. 죄인일 뿐입네다. 사회주의 혁명은 배반 자를 용납할 수 없습네다." 이어 그녀는 강단 앞에 혼자 앉은 최철웅 대좌에게로 몸을 돌렸 다. "최철웅 사령관 동무." "네." 최 대좌가 좀 어색하게 대꾸했다. "이제부터 사령관의 직무를 수행하시기 바랍네다." 최 대좌가 묘한 낯빛을 하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갑자기 장령으 로 진급하고 기지 사령관이 된 것은 물론 반가울 터였지만, 지금 그 런 감정을 드러내기도 뭣할 수밖에 없었다. <제 15장 4편> "량 박사, 그 종이 쪽지는 무엇입네까?" 차분함을 되찾으신 듯, 사령관님께서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띠고 물으셨다. "아까 말했잖습네까? 주석께서 손수 내리신 명령입네다." 량 박 사가 거센 목소리로 대꾸했다. "량 박사, 지금 량 박산 내가 그런 종이 찮지 하나 때문에 당신 얘기대로 하리라고 믿습네까?" "박봉근 동무께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네다. 나는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의 요원입네다." 더 짙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절망감이 한결 더 짙어지는 것을 느끼 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 역시... 내 예감이 맞았구나. 명 규 니야기레 맞았구나.'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나는 눈을 떴다. 거품이 삭기 시작한 즙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난감했다. 즙이 삭기 전에 내가야 하는데, 내갈 상황이 아니었다. `미친 척하고 내가?' 나는 수상기 화면에 나온 사람들의 낯빛을 살폈다. 차가운 침묵 속에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 분의 사람들 얼굴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닫. `흠. 저 사람들도 사수대 니야긴 첨 들은 모양이구나.'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단 멍해진 마음을 일깨우려고 나는 농담 비슷한 얘욋를 스스로에게 던졌다. 량 박사도 그런 사정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러분,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는 사회주의 리념과 체제를 자본가들과 그들의 고용분자들로부터 지키라는 임무 를 우리 북반부 인민들의 위대하신 지도자 주석 동지로부터 직접 부 여받은 사람들을 말합네다. 바로 이번과 같은 경우에, 자신의 지위를 리용하여 자본가들의 고용 분자가 되어서 우리 사회주의 리념을 더럽히고 사회주의 체제를 허 무는 분자들이 나온 경우에, 우리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가 필요한 것입네다. 임무가 중차대하고 우리 북반부 인민들의 위대하신 지도자 주석 동 지께서 손수 권한을 부여하셨으므로,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의$ 권한 은 어떤 조직의 권한보다 우선합네다. 사회주의 혁명 수비대의 권한엔 사회주의 리념과 체제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모든 권한들이 포함됩네다. 자본가들의 고용분자들을 처 단하는 권한도 물론 포함됩네다." 그녀의 연설엔 막힘도 머뭇거림 도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어렸던 당혹감이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사령관님의 목숨이 위태로운 판이었다. 량 박사가 저리 자신있게 사령관님께 대든다는 것은 강당에 모인 사람 들 가운데 사수대 요원들이 또 있다는 얘기였다. `무슨 수를 내야하는데... 량 박산 내가 지금 밖에 있는 줄을 모 르는 모양인데... 아, 그렇디. 남반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구 련 락하는 수도 있다. 김용휴 사령관이 여기 사정을 알기만 하문, 당 장에...'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리 좋은 수는 아니었다. 장영실 기 지는 여기서 너무 멀었다. 남반부 사람들이 이곳에 닿았을 땐, 이 미 일이 모두 끝났을 터였다. 게다가 그들이 사령관님을 도우러 오 리라고 믿을 근거도 없었다. 그들이 보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김일성 혁명 기지 안의 일이었다. 나는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남반부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 청할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만 입안에 떫게 남았다. <제 15장 5편> "한호 동무." 량 박사가 불렀다. "네." 맨 뒷줄에 앉았던 한이 일어섰다. "자본가들에게 매수되어 고용분자가 된 박봉근 동무를 우리의 조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의 이름으로 체포하시오." 량 박사 의 목소리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대항하는 것은 부질없 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단단한 무엇이 들어있었다. `한호?' 가벼운 충격에 한순간 정신이 흔들렸다. `한호가 사수 대의 프락찌야라구?' "량 박사." 사령관님이 차분하게 불렀다. 그녀가 몸을 홱 돌려 사령관님을 쏘아보았다. 사령관님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없었다. 그저 좀 서글픈 듯한 낯빛이었다. 사령관님께서 고개를 저었다. "량 박사, 겨우 이것이오? 량 박사레 지금꺼지 나한테 해온 니야기들이 모두 거짓 말이란 니야기요?" 량 박사는 대꾸하지 않고 한에게 재촉하는 고갯짓을 해보였다. 한이 권총을 꺼내들고 땟단 쪽으로 걸어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딴 사람두 아니구...' 내 마음 속에선가 몸 속에선가 무엇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절망감이 잿빛 안개로 내 눈앞을 가렸다. 한은 공식적으론 김상윤 소좌의 보안대에 속했다. 실제론 사령관 님의 운전병이자 당번병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진 사령관님께 충성 스러운 것처럼 보였었다. 그가 사수대의 프락치야라는 것까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님께 권총을 들이대다니. `한이 앞 줄로 나오자, 김상윤 소좌가 권총을 뽑았다. "한호. 멈춰라. 어디서 감히..." 그러나 한이 멈추기도 전에, 어느 새 뽑았는지 량 박사가 김 소좌 에게 조그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을 버리시오, 김 소좌." 김이 놀라서 량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권총을 버리진 않았다. "총을 버리시오. 빈말이 아니오." 이번엔 량 박사의 어조에 음- 산한 협박의 울림이 있었다. 김 소좌가 소심스럽게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이 그리로 가더니 그것을 주어서 주머니에 넣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소름이 쪽 끼쳤다. 미친 사람의 웃음이었다. 한이 강단 가까이 가자, 리명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이래선 안 됩네다." }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리에게로 솔렸다. "량 박사 동무, 통일을 위해 몸을 바티기로 약소해놓고서, 이게 무슨 일인네까? 이건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리려는 짓입네다. 지 금 여기 달 나라에서 조선 사람들이 처음으로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다니..." 속에서 무엇이 치민 듯, 그는 말 을 잊지 못하고 잠시고개만 흔들었다. "리명규 동무," 한순간 당황스러운 낯빛을 지었던 량 박사가 대 꾸했다. "당신도 남반부 자본가들에게 몸과 마음을 판 고용분자요. 자리에 앉으시오." 눈을 가늘게 뜨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는 또아 리를 틈 뱀처럼 보였다. "여러분," 그러나 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호소하는 눈길 로 훑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습네다. 조 선 민족이 진정한 통일의 첫걸음을 내딛는 지금, 어리석은 반동 세 력이 일을 그르치도록 할 순 없잖습네까?" "맞습네다." 김안옥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일은 우리 모두레 함께 결정할 사항입네다." 서너 사람이 따라서 일어섰다. 한순간 량 박사의 얼굴이 흔들렸 다. <제 15장 6편>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뒤쪽에서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누가 말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한정필이 뒤쪽 출입묻 가까이에 서 있었 다. 한손에 기관단총을 가볍게 들고. `서이나? 스물 셋밖에 되지 않는 기지에서 사수대가 서이나 된단 니야긴가?' 나는 절망하는 마음으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사령관님의 얼굴에 처음으로 걱정하는 낯빛이 어렸다. 한정필이 든 기관단총은 민장석 상사 것이 분명했다. 우리 기지에서 무기를 지닌 사람들은 민 상사를 빼놓고는 모두 권총을 지녔다. 그제서야 나는 사령관님께서 사수대의 저항에 대한 방책을 마련했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독사 대가리>가 안 보였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애숭이한테 습격을 당해서 총을 뺐기구...' 나는 민 상사에게 속으로 냅다 욕을 해댔다. 이젠 희망이 없었다. 한정필의 말에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러나 리명규는 강단으로 나가려는 한호를 가로막고서 한에게 호소하고 있 었다. "리명규 동무, 어서 자리로 들어가시오. 그렇게 우리 사수대의 일을 방해하문, 처형하갔소." 량 박사가 차분함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도 역사의 전진을 막을 순 없습네다." 리가 손을 들어 량 박사를 가리켰다. "량 박사 동무, 새롭게 태어나려는 역사를 가로 막는 어리석은 짓은 하디 마시오." 난처하다는 낯빛을 지으면서, 한호가 량 박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 겠느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리명규 동무, 이것이 마지막 경고입네다." 량 박사가 힘을 주 어 또박또박 말했다. "당장 물러나시오. 내 말을 따르디 아니 하 문..." 그녀가 한참 뜸을 들였다. "혁명 사업을 방해한 죄를 들어 인민의 이름으로 처형하갔소." "인민을 팔디 마시오. 내가 바로 그 인민이오. 여기 모인 사람 들이 바로 그 인민들이오. 그 인민들이 통일을, 진정한 통일을 바 라는 겁네다. 당신들과 같은 반동 세력은 인민들의 그런 념원을 막 을 수 없습네다. 자격도 업고 힘도 없습네다." "한호 동무." "네." "고용분자 리명규를 인민의 이름으로 처형하시오." "네." 한이 슬쩍 권총을 들어 리의 가슴에 겨누더니 두어 걸음 물 러섰다. 좁은 방안이었는데도. 총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리가 천천 히 몸을 꺾고 바닥에 드러눌웠다. 나는 내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격 연습을 하듯 가볍게 사람에게 총을 쏘다니. 내가 꾼 꿈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가슴에서 무엇이 뜯겨나가는 듯한 아픔이 리가 총에 맞았다는 것 을 확인해주었다. 강당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면 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쁘게 생각했다. `침착해야 한다. 이럴 땔수록...' 내 마음을 덮었던 구름이 문득 갈라지면서, 생각 하나가 뽀얀 모 습으로 떠올랐다. 나는 망서리지 않고 마음을 정했다. `그래. 그 렇게 한번...' <제 15장 7편> 화면엔 한호가 권총을 겨눈 채 사령관님께 다가서고 있었다. 사 령관님께선 두 손으로 강탁을 잡으신 채,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가 만히 계셨다. 사령관님의 얼굴은 나무로 만든 가면 같았다. `데 놈의 미츤 즘성...' 이를 갈면서, 나는 혼합기의 스위치를 껐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토마토 즙을 한모금 마셨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즙은 달고도 시원했다. `아깝다. 이걸 버려야 한 다니...' 내 우주복은 부엌 한쪽에 놓인 캐비넷 속에 들어있었다. 우주복 을 입고 우주복의 작동 상태를 점검하면서, 나는 부엌 안을 둘러다 보았다.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지. 볶음판이 그래도 낫 갔다. 남비하구...' 볶음판하고 남비하고 식칼을 접어들고서, 나는 복도로 나갔다. 부엌 문을 닫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수상기를 살폈다. 사령관님께서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한호에게 밀려 강단에서 내려 서고 계셨다. 바닥에 누운 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죽은 듯했다. `절망이 가득한 가슴은 텅 빈 듯도 하고 말할 수 없이 무거운 듯 도 했다. 그 사이에도 내 걸음은 저절로 부엌에서 가까운 기지의 후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과연 그게 성공 할 수 있을까? 경보에 놀라 사람들이 흩어질까?' 월면 기지에선, 무엇이 잘못되면, 맨 먼저 할 일은 우주복을 입는 것이었다. 훈련소에서 교관은 거듭 강조했었다: <우선 우주복을 입 으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다하문, 우주복 먼저 입고 보시오.> 하 도 많이 훈련해서, 우주복을 입는 것은 우리 요원들에겐 거의 본능 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파분은 월면 기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앙들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파분>이나 <블로우아웃>이란 말을 좀 처럼 쓰지 않았지만, 기지의 벽이 뚫려서 공기가 한순간에 진공 속 으로 빨려나갈 위험은 늘 우리 마음 속에 검은 구름장으로 걸려 있 었다. 그래서 파분을 알리는 경적이 울리면, 아마도 모두가, 음모를 꾸 민 세 사람까지도, 본능적으로 자기 우주복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서두를 터였다. 그렇게 나온 혼란 속에선 수가 많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주복을 입고선 총을 다루기가 어 려웠다. 저만큼 후문이 나타났다. 걸음을 빨리 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성공하든 못하든, 지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이것밖 엔 없디.' 공기폐쇄구의 안쪽 문에 달린 파일럿 램프가 짙은 초록빛으로 빛 나고 있었다. 공기가 새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나는 문을 여는 단추을 눌렀다. 파일럿 램프 아래에 있는 화면에 글자들이 나타났다: <밖으로 나 가고 싶습니까?> 조급한 마음을 누르면서, 나는 <네/YES>라고 쓰인 단추를 눌렀다. 가벼운 종소리가 나면서, 문이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비켜나기 시작 했다. 나는 공기폐쇄구 안으로 들어섰다. 남비를 문설주에 기대세우고 문을 닫는 단추를 눌렀다. 문이 다시 닫혔다. 그러나 남비가 끼어서 제대로 닫힐 수 없게 되자, 낮은 울음 소리를 내면서 불평하기 시작했다. `좀 참아라.' 나는 돌아서서 바깥쪽 문을 향했다. 벌써 문의 가운데에 있는 화면엔 경고문이 나와 있었다: <공기폐 쇄구의 안쪽 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시끄럽다.' 속으로 핀잔을 주고서, 나는 칼로 손잡이 옆에 있는 투명한 유리를 깨트렸다. 그 안에 든 조작간을 <자동> 위치에서 <수동> 위치로 옮겨놓았다. 가슴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문을 당겼다. 문은 조금 열렸지만, 공기는 거세게 빨려나갔다. 두꺼운 우주복 을 통해서도 진공으로 빨려나가는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멈췄던 숨을 내쉬면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벌써 날카로운 경적이 기 지에 파분이 일어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제 16장 1편> 속에서 올라오는 조급함의 더운 기운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나는 사령관님 방 앞의 섬돌로 올라섰다. 숨을 가다듬으면서, 눈앞에 어 른거리는 리명규의 모습을 밀어냈다. 나는 그를 강당에 그냥 두고 온 참이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 사령관님께 빨리 내가 한 일을 말씀드려서 사령관님께서 사태를 정확히 아시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 다도 급했다. 문의 표지반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슴에서 두려움이 다시 솟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손잡이가 가볍게 돌면서, 문이 열렸다. 나 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우주복 옷장이 사령관님께서 우주 복을 입고 나가셨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럼 어드케 하디? 아마 브리지로 가셨갔디.' 나는 서둘러 방 에서 나왔다. <브리지>는 <중앙통제실>을 뜻했다. 그곳은 우리 기지의 모든 기 능들을 통제하는 곳으로 사령관님의 사무실인 셈이었다. 우리 요원 들은 그곳을 늘 브리지라고 불렀다. 최옥순 소좌의 얘기로는 중앙통제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해군의 전통이었다. 지구의 배에서 선장은 갑판 위에 다리처럼 솟은 선교 에서, 즉 브리지에서, 지휘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우주선에서 도 선장이 근무하는 곳이 브리지라고 불렀을 터이고 월면 기지에까 지 그런 관습이 들어오게 되었을 터였다. 사령관님 방에서 브리지는 가까웠다. 나는 브리지의 섬돌 앞에 올라섰다. `이번에도 헛탕은 아니갔디...' 표지반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통제반 앞에 앉으신 사령관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해치를 열었다. "어서 와요, 효영이 오마니." 사령관님께선 녀느 때와 꼭 같으셨 다. 사령관님의 낯빛이나 목소리에선 사수대가 반란을 일으켜서 아 주 위급한 상황이란 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방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김 상윤 소좌는 손에 권총을 들고 문간에 서 있었고 평상시에 사령관님 을 대신해서 브리지를 맡아보는 김안옥 박사와 송삼춘 중좌는 기지 의 상황을 나타내주는 큰 화면 앞에 서서 계속 바뀌는 숫자들을 살 피고 있었다. "사령관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네다." "아, 그래요? 말해봐요." "강당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걸 전 부엌에서 봤습니다. 수상이루 요. 한호가 리명규에게 총을 쏘는 걸 보구, 전 후문으로 가서 공기 폐쇄구를 열어놓았습네다. 파분 경보가 나문, 모두 우주복을 입을 테구, 우주복을 입게 되문, 사수대 사람들에게 아무래두 불리하리 라구 생각해서..." "아, 그랬었나? 파분 경보가..." 천천히 고개를 젖는 사령관님 의 얼굴에 웃음이 배어나왔다. "그게 효영이 오나니레 한 일이라. 문은 얼마나 열어놓았나?" "요만큼 열어놓았습네다. 문하구 문설주 사이에, 그러니끼니 안 쪽 문 말입네다, 남비를 끼워놓았구, 바깥 쪽엔 볶음판을 끼워놓았 습네다." "하아." 사령관님께서 밝은 웃음을 지으셨다. "자, 그럼 모두 이리 오시오." <제 16장 2편> "방금 리명순 동무레 한 니야기 다 들으셨디요?"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자, 사령관님께서 말을 이으셨다. "그렇다문, 본격적 블로우 아웃의 걱정은 없어졌습네다. 이젠 반란을 일으킨 세 사람을 잡을 궁리를 합세다. 김 소좌." "네, 사령관님." "민장석 상사의 방에 가서 그 친구 우주복을 가져오시오." "네, 알갔습네다." "그러문 반도 세 사람이 어디 있는디 알아봅세다." 김 소좌가 방 에서 나가자, 사령관님은 느리게 퍼지는 웃음을 지으시면서 전산기 자판을 두드리셨다. 잠시 뒤에 전산기 화면에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나왔다. `흠. 량 박사 방에선 전화를 받디 않구...' 사령관님께선 다시 자판을 두드리셨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는 글이 화면에 나왔다. "흠. 명사수 한호 동무 방에서도 전화를 받디 않고..." 사령관 님께선 고개를 끄덕이시고 말씀하셨다. <명사수 한호>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퍼뜩 깨달았다. 사령관님 께서 얼마나 아프게 스스로를 꾸짖는가. 자신의 당번병이자 운전병 이 자신을 체포하러 달려들었고 말리던 사람까지 죽었다는 사실은 사령관님의 가슴에 단근질을 했을 터였다. 그 아픔을 감춘 <명사 수>란 말이 내 가슴에 아프게 닿았다. "그러문 통신실을 불러봅세다. 논리적으로 통신실은 그 세 사람 들이 모일 곳이니끼니..." 김 박사와 송 중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령관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통신실은 사수 대 요원으로 판명된 한정필이 근무하는 곳이긴 했다. 그러나 사수 대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야 할 까닭은 생각나지 않았다. "꾸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방송국을 먼저 점령하는 것과 같군 요." 김 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령관님께서 따라서 웃으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소. 바 로 그거요. 봅시다, 어떤가." 사령관님께서 다시 자판을 두드리셨 다. "네?" 전산기 화면엔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짧게 묻는 소리만 났다. "나 사령관이오. 전화받는 사람은 누군가?" 사령관님의 목소리 는 언제나 나지막했지만 무슨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언제가 량 박 사가 말했었다, 그런 무게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사 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당연히 따르리라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만 실리는 것 같다고. "네. 한정필입네다." 황급한 대꾸가 나왔다. "량정애 박사 점 바꾸게." "네, 알갔습네다." 문득 화면에 량 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봉근 동무, 무슨 일이 십네까?" 사령관님께선 잠시 량 박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량 박사, 파분 이 일어난 곳은 후문의 공기폐쇄구입네다. 내레 지금 알고 싶은 것 은 민장석 상사가 우주복을 입었는가 하는 점이오. 민 상사레 우주 복을 입었소, 안 입었소?" 량 박사의 낯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아직 입지 않았습네다." <제 16장 3편> 김 소좌가 우주복을 한 벌 안고 들어왔다. "내 그러리라고 생각했소. 량 박사, 내레 지금 김종윤 소좌를 통 해 민 상사의 우주복을 보내갔소. 입혀주시오." 량 박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알갔습네다. 그리 하디요." "김 소좌를 그리 보내고서 내 다시 전화하리다." "네." 전화를 끊고서, 사령관님께선 김종윤 소좌를 올려다보았다. "김 소좌." "네" "지금 들은 대로요. 통신실로 가시오. 이걸 갖구." 사령관님께 서 우주복 앞자락의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수 류탄처럼 생긴 것이었다. "기절 수류탄입네까?" 김 소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봤소. 이 기절 수류탄은 정상적 조건에서 사람을 삼십 초 내지 일 분 동안 기절시킵네다. 우주복을 입으문, 그 효과가 많이 줄어 들 겁네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그 사람들이 모두 해치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터지도록 하시오." "잘 알갔습네다." "눈치가 적어도 두 사람은 해치를 열어놓은 모양인데... 김 소좌 가 여기서 나간 지 일 분이 되문, 내레 다시 전화를 걸갔소. 그리 하문, 적어도 한 사람은 해치를 열 것이고.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 시킬 수도 있고. 김 소좌도 통신실에 들어가문, 계속 말을 걸어서 그 사람들이 해치를 열도록 하시오." "네, 잘 알갔습네다." "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꾸미는가 의심할 테니, 당신의 몸을 수색할지도 모르겠소. 그러니끼니 이건 민 상사 우주복 앞주머니에 다 넣어두시오." 사령관님께서 수류탄을 김 소좌에게 건넸다. "네." 김 소좌가 수류탄을 받아 민 상사의 우주복 앞주머니에 넣 고서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벗어서 사령관님께 바쳤다. "그러문 가보시오." "네." "한 가지만..." 사령관님께서 김 소좌를 지그시 응시하셨다. "그 수류탄이 터지문, 김 소좌도 같이 기절할 수밖에 없소." "네. 이미 저도 그 점에 대해선...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꼭 성사시키갔습네다." "알고서 터뜨리는 건 쉽지 않지만, 고약한 일이기도하고. 어쩔 수 없디, 그 길밖엔 없는 것 같으니. 그러문, 자." 사령관님께서 손을 내미셨다. "네." 김 소좌가 황급히 두 손으로 사령관님의 손을 잡았다. "긋 럭." 잠시 머뭇거린 김 소좌의 입에서 뜻밖에도 멋진 영어 대답이 나왔 다, "생큐, 써." 김 소좌가 한 걸음 물러나 경례했다. "약진." "약진." 사령관님께서 정색하고 답례하셨다. <제 16장 4편> 김 소좌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무거운 침묵이 방안에 내렸다. 아주 작게 줄여져서 들리지 않던 파분 경보가 또렷이 들려왔다. "김 박사." 사령관님께서 김 소좌를 배웅하고 문간에 기대선 김 박사를 불렀다. "네." "김 박사는 여기를 지키시오. 수류탄이 터지문, 통신실엔 내레 송 중좌하고 가갔소." "네, 알갔습네다." "그리고 효영이 오마니," "네." "효영이 오마닌 후문 공기페쇄구로 가서 문을 닫으시오." "네, 알갔습네다." "오늘 효영이 오마니가 그렇게 기지를 멋지게 발휘하디 않았으문, 일이 어렵게 꼬일 뻔했구먼." 사령관님께서 싱긋 웃으셨다.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께서 다시 통신실로 전화를 하셨다. "네?" 이번에도 화면은 나오지 않고 목소리만 나왔다. 녀자 목소 리니, 량 박사일 터였다. "량 박사, 나 사령관이오. 김종윤 소좌 거기 닿았소?" "네." 화면에 량 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쩐지 불안해 하는 기 색이 어린 듯도 했다. "그러문 민 상사 일은 해결이 됐구. 이제 량 박사와 나 사이의 일을 풀 차례구먼. 량 박사, 이제 무기를 버리고 나오시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네까?" 량 박사의 목소리가 거셌다. 내 귀 엔 꼭 화가 난 독사가 머리를 쳐들고 내는 소리로 들렸다. "박봉근 동무는 이미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습네다. 실은 곧 체포될 사람입네다. 우리 북반부 인민들의 위대하신 지도자 주석 동지의 명령에 따라." "정짜로 답답하오. 량 박사, 혹시 이걸 생각해본 적 있소? <사 회주의 혁명 수비대>란 비밀 단체가 있다는 것이야 비밀도 아니오. 북반부에서 어지간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문, 그 단체의 성격과 대 략적 규모꺼지도 알고 있소. 그리고 장영실 기지 김용휴 사령관이 내게 미리 귀뜸을 해줬소, 사수대가 월면 기지 통합 작업을 방해하려고 공작하고 있다는 것이 남반부 정보 기구에 포착되었다고. 그 얘기가 여기서도 발쎄부터 소문으로 떠돌아다녔다니끼니, 량 박사 귀에도 틀림없이 들어갔을 것이오. 그런데도 난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디 않았소. 내레 왜 그 리 했는가 궁금하디도 않소?"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였지만,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 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께선 량 박사가 딴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잠시 량 박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문... 박봉근 동무, 이 건 어드케 설명하실랍네까? 민장석 상사레 사수대의 활동을 막는 일을 받았던 것 말입네다. 그리하고도 실패한 것 말입네다." "하아, 그것. 량 박사, 내가 민 상사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 기고서 태평했다고 생각하는 겁네까? 량 박사가 지금꺼지 나를 그 렇게 본 줄은 몰랐소." 사령관님의 얼굴에 정말로 쓸쓸한 낯빛이 떠올랐다. 그 낯빛을 보는 순간 나는 느꼈다, 사령관님과 량 박사 사이가 보 기보단 훨씬 가까웠다는 것을. "그 점에 대해선..." 그 순간 무엇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귀가 아프도록 날카로운 소 리가 들려왔다. "됐다. 갑세다." 사령관님이 두 손으로 통제반을 짚고서 힘차게 일어스셨다. <제 17장 1편> 이웅기 조감독이 흰 종이를 둘둘 말아쥔 손을 힘차게 내렸다. 마른 침을 삼키고서, 나는 걸음을 떼어놓았다. 앞쪽에서 나를 촬 영하는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강당을 향하여 달리 기 시작했다. 우주복을 입은 터라, 몸놀림이 굼떴다. 나는 문이 열린 강당 입구에서 멈춰 숨을 가다듬었다. 강단과 좌석들 사이 바닥에 류세형이 엎어져 있었다. 강당 안은 혼란스러웠다, 파분 경보에 놀란 사람들이 자기 우주복을 찾아서 급 히 빠져나갔을 때처럼. 종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고 류의 발치엔 넘어진 의자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꼼짝하지 않는 류 앞에 멈춰 서서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 위에 한호의 총에 맞아 쓰러진 리명규의 모습이 겹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급히 마음을 타잡고,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디?' 굼뜨게 움직이는 몸을 먼 눈 길로 바라보면서, 내 머리 한쪽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다. 나는 물론 연기를 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영화에서 녀주인공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열흘 전 그 비극적인 날에 우리 지기에서 일어난 일들은 - 량정애 박사가 이끄는 <사수대>가 장영실 기지와의 통합을 추진한 사령관님 의 뜻에 불복하고 기지를 장악하려고 한 것, 그들을 말리다가 리명 규가 죽은 것, 토마토 즙을 만들려고 부엌에 남았던 내가 파분 경보 가 울리도록 만든 것, 파분 경보로 혼란스러워진 상태 속에서 사수 대 세 사람이 붙잡힌 것 따위는 - 두 기지의 통합 소식과 함께 김수 형이 취재해서 방송했다. 그것들은 무척 중요하고 흥미로운 소식들이어서, <반도 방송>은 소식 거리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월면 기지에 그동안 끈기있게 투자 한 것을 단숨에 뽑았다. 달 나라에 상주 특파원을 두지 않았던 남반부의 다른 방송사들은 물론 서둘러서 사람들을 이리로 올려보냈지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뒤듸게 올라온 기자들은 보도할 만한 것들을 찾아 눈을 부릅뜨다시피 했고 생각해낼 수 있는 질문들은 다 했다. 촬영 기사들은 우리 기지의 후미진 구석들까지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내가 거짓 파분 경보를 낸 것이 사태의 진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리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도 한몫 단단히 했 다. 어떤 기자들은 있지도 않은 얘기까지 집어넣어서 우리들의 사랑을 아주 그럴 듯하게 꾸몄다. <달 나라에서의 사랑과 죽음>이란 표현 까지 쓴 사람도 있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 었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 었다. 그럭저럭 취재가 끝나갈 무렵, <태평양 방송>의 기자가 나를 한쪽 으로 부르더니 넌지시 물었다, 혹시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느냐 고. 자기 방송사에서 이번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서 방송할 계획을 세웠는데, 되도록이면 우리 요원들을 쓸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너 무 뜻밖의 제안이라서, 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제 17장 2편> 내가 그 날 실제로 한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강당 안을 한바퀴 둘러다보았다. 카메라를 바로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촬영기 가까이 선 김중훈 감독이 촬영을 멈추라고 손짓하고서 내 게로 다가왔다. `뭐이 잘못된 모양이구나... 그러문 그렇디, 이런 일이 단번에 잘 될 리야 있갔나.' 나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일어나서 우주복의 해치를 열었다. "리 여사,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왜 연기는 하지 않고 뚤레뚤레 살핍니까?" 충혈된 눈으로 그가 나를 살폈다.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아직 중력의 변화로 고생하고 있었다. 속 이 울렁거려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아무래도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 울컥 솟았다. "감독님께서 아까... 그때 했던 대로 하라고 하디 않았습네까?" "그때 그렇게 했단... 에취. 으흐흐, 에취..." 그가 요한스럽 게 재채기를 했다. "아, 이 놈의 재채기. 그때 그렇게 했단 얘깁 니까?" "네." 나는 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운 얘기였지만, 나는 그때 리명규의 시체를 앞에 두고 그렇 게 강당 안을 둘러다보았었다.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물론 내가 먼저 했어야 할 일은 리가 그때까 지 살았는가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호가 그를 쏘았을 때, 그가 이내 죽었으리라고 생 각했었다. 그가 총에 맞고도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못 했었다. 다행히, 아니 불행히, 그는 총에 맞자 이내 죽었다고 김인 구 박사가 말했다. 총탄이 심장을 뚫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때 내 마음은 내가 부린 꾀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에 쏠려 있었고, 일이 잘 풀리면, 빨리 공기폐쇄구를 닫아야 한다는 생 각으로 가득했었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을 빨리 사령관님께 보고해 서 사령관님께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내 사령관님 방으로 달려갔다. 후줄근해진 손수건으로 코를 훔치면서, 김 감독은 나를 잠시 가늠 하는 눈길로 살폈다. "리 여사." "네." "이리 하세요. 저 문으로 들어서시면, 이내 여기 쓰러져있는 류 세형이에게로 달려오세요. 그리곤 무릎을 꿇고서 아직 숨이 붙어있 는가 살피세요.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이내 그의 몸을 끌 어안고 울부짖으세요. <안 돼요>하고." 아직 바닥에 엎드린 류를 먼 눈길로 내려다보면서, 나는 머뭇거렸 다. 그렇게 바꾸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영화는 실제 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시청자들에게 소개될 것이라고 김 감독 자신이 얘기한 터였다. 게다가 김 감독이 방금 지시한 대로 하자면, 해치를 열어야만 될 터였다. 공기폐쇄구의 열린 문으로 공기가 거세게 빠져나가는 판에 해치를 열 사람은 월면 기지 요원들 가운데는 없었다. "리 여사, 혹시 <댈러스의 비극>을 보셨습니까?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보디 못했습네다." <제 17장 3편> 맥이 빠진 듯, 김 감독이 어깨를 슬쩍 추스렸다. 이어 정색하고 달래는 말투로 참을성있게 말했다, "그 영화에서 대통령 부인은, 남 편이 총에 맞자, <오, 노우>하고 부르짖으면서 피투성이가 된 남편 을 끌어안습니다. 리 여사도 그리 해주세요. 류세형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자, <안 돼요>하고 외치고서 몸을 끌어안으세요. 그리 고 얼굴에 키스하고 다시 <안 돼요>하고 외치세요." 내 생각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아무래도 그 날 내가 한 일들을 그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낯빛을 보곤 열 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내가 잘 아는 낯빛이었다. 효영이 아버지, 사령관님, 리 명규, 량정애 박사 같은 사람들에게서 본, 한번 마음을 정하면, 무 슨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는 옹고집의 낯빛이었다. 그런 사람 하고는 맞부딪치는 것보다 타협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더구나 나 는 엉겁결에 배우 노릇을 하게된 시골 녀자였고 그는 한다하는 영화 감독이었다. "알갔습네다." 나는 신선히 대꾸했다. 김 감독이 싱긋 웃었다. "그럼 새로 시작해봅시다." "그런데, 감독님, 제가..." 나는 이젠 일어나 앉은 류를 가리켰 다. "데기 데 분한테 키스해야 합네까?"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붉 어졌다. 김 감독의 얼굴에 한순간 묘한 낯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왜 요? 키스하는 것이 싫습니까?" "아뇨. 다만 전..."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싱긋 웃었다. "난 류세형의 인기가 아주 높은 줄로 알았는 데, 이제 보니까... 류세형과 키스하는 것이 싫다고 한 사람은 내 가 알기론 리 여사가 처음인 것 같은데..." 둘러선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류가 흘긋 나를 올려다 보더니 뒷머리를 긁었다. 영화의 주연 배우로 나온 사람인 만큼, 류는 잘 생긴 배우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끌리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냄새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그의 매끄럽게 다듬어진 머리가 늘 거푸수수하던 리명 규의 머리와 대조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 여사," 내가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가 정색을 하고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 우린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리 여사는 그 예술 작품의 중심적 존잽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낯 선 남자와 키스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실은 키스도 아니죠. 그 냥 얼굴에다 입을 맞추는 거죠. 그렇잖습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정말로 훌륭한 여배우들은 별짓들을 다 합니다. 지금 세상에... 에취." 그가 급히 손수건을 코에 댔 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사실 지금 세상에서 낯선 남자와 키 스하는 것이 대단한 일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영화를 찍으면서 하 는 키스야. "잘 알갔습네다." "리 여사, 어저께 얘기했듯이, 이 씬이 비교적 수월할 것 같아서, 먼저 찍는 겁니다. 앞으로 러브 씬이 나오면, 이것보단 훨씬 진한 연기를 해야 합니다. 이제 리 여산 정식으로 배우가 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그럼 새로 시작합시다." <제 17장 4편> `이만 터몬을 버는 일이 쉽갔나.' 해지를 닫으면서, 나는 스스로 에게 일렀다. 방송국 측에선 처음에 출연료로 일만 터몬을 주겠다고 했다. 그 때 나는 물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출연료의 많고적음에 대한 판 단은 그만두고, 영화에 출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조차 마 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었다. 게다가 내 둘레엔 그런 일을 놓고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김수형을 빼놓곤. 그래서 나는 김수형과 상의한 뒤에 결정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러자 그 사람들은 그 말을 출연료가 적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경 쟁사의 요원과 상의하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말 한마디를 잘 한 덕분에 출연료를 갑절 받게 되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마음을 쓴 것이 돈은 아니었다. 그렇 긴 해도, 좀 이상한 얘기지만, 남반부 은행의 평양 지점에 내 이름 으로 된 구좌가 생기고 거기에 이만 터몬이란 큰 돈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뜻모르게 든든하게 했다. 나는 그런 자신이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실은 좀 걱정스럽기도 했다. 나는 해장국 료리법을 알려주고 드래코 태번에서 받은 돈조차 아 직 한 푼도 쓰지 못한 처지였다. 리명규에게 손목 전산기를 사준다 는 꿈이 꿈으로 끝났으니, 얼마 되지 않는 내 월급도 제대로 쓰기 어려운 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 사이엔가 돈을 귀하게 여기 고 있었다. 마치 돈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나는 적잖이 무거운 가슴으로 복도로 나갔다. 김 감독이 한 말들 은 다 옳았지만, 나로선 낯선 남자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이 마음 에 걸렸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리명규가 죽 은 바로 그곳에서. `러브 씬이 나오문, 훨씬 진한 연기를 해야 한다구? 신방을 차렸 을 때를 찍을 땐, 나보구 옷을 다 벗으라구 할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구. 우선...' 출발 지점인 복도의 끝에서 돌아서면서, 나는 사령관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이내 기분이 나아졌다. 내가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노라고 말씀드리자, 사령관님께선 아주 반가워하셨다. 아울러 그 런 영화는 남반부 주민들이 우리 기지에 대해 호감을 갖도록 할 것 이므로, 어려운 고비를 맞은 우리 기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두 기지의 통합에 관해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텔레비전들은 이미 두 분 사령관님들께서 련방 정부와 접촉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련방 정부의 결정은 여론에 크게 영향을 받을 터였다. 여론 이 불리해지면, 련방 정부는 두 기지의 통합을 반대할 북반부 정부 와 남반부 정부의 압력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었다. 만일 사태가 그 렇게 되면, 두 월면 기지들은 이 불모의 세계에 좌초하는 것이었다. 조감독이 팔을 내렸다. 나는 턱에 힘을 주고서 뛰기 시작했다. 열린 문을 통해 강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내가 얘기한 대로, 이만 터몬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죽은 척하는 류세형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네 번이나 해 야했다. 그러고도 김 감독은 흡족한 낯빛을 짓지 않았다. 다음엔 내가 공기폐쇄구를 열어놓는 장면을 찍었다. 이번엔 나는 단번에 합격했다. 내 연기가 나아졌던 얘기인지, 아니면, 김 감독 도 공기를 많이 잃는 것이 겁이났단 얘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 17장 5편> 우주복을 부엌에다 두고서, 나는 온실로 향했다. 이제 나는 부엌 일에다 온실 관리까지 맡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 기지에선 요원이 한꺼번에 다섯이나 줄어들었다 - 리명규는 죽었고, 사수대 요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죽었고 둘은 민장석 상사와 함께 갈리레 오 공항의 감옥에 들어갔다. 사수대 요원들이 붙잡히자, 민 상사는 한정필을 공기폐쇄구로 데 리고가서 우주복을 입히지 않고 밖으로 밀어버렸다. 뒤에 한의 시 체를 본 사람들은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민 상사는 한이 통신 실로 자신을 유인하여 감금하고 총을 훔쳐간 일에 대해 보복한 것이 었다. 어쨌든,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온실 일을 맡겠다고 나섰 다. 리명규의 손길이 닿은 풀들이 있는 곳을 되도록이면 그대로 지 키고 싶은 생각이었다. 온실엔 그의 유품들도 많이 남아있었고, 무 엇보다도, 호박 넌출로 포근히 쌓인 우리의 <신방>이 있었다. 일은 많았지만, 나는 그것도 환영했다. 지금 처지에선 몸이 바쁜 것이 마음 속의 슬픔과 아픔을 눌러서 오히려 나았다. 온실로 가는 복도는 조용했다. 대부분의 요원들은 이번 통합을 자축하러 드래코 태번으로 몰려간 것이었다. 물론 장영실 기지 사 람들도 그리로 올 터였다. 온실로 들어서자, 나는 문을 감갔다. 그리고는 문에 기대서서 한 숨을 쉬었다. `휴우, 이제 좀 낫다. 어찌 됐든, 첫날은 넘겼디. 이제부턴 좀 수월하갔디...' 영화 배우 노릇이 나와 같은 사람에게 쉬울 리 없을 것은 당연했 지만, 막상 해보니, 아주 쉬운 연기까지도 보기보단 어려웠다. 그 래도 그럭저럭 하루치 연기를 해냈다는 생각은 마음 밑바닥에 뿌듯 하게 깔려 있었다. `우선 좀 눕자. 누워서 기운을 차리문, 저녁 준빌 하디.' 나는 나른해진 몸을 억지로 다그쳐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명규하구 여기 처음 누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발쎄... 명규 는 데 세상 사람이 돼서 냉동고 속에 있구, 난...' 나는 <신방>으 로 들어가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혔다. 주먹만한 호박이 바로 내 눈 위에 달려있었다. 어쩐지 그것이 마 음에 아프게 닿아서, 나는 담요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담요에 밴 그의 체취가 내 마음을 감쌌다. 그 냄새를 깊이 들이키면서, 나 는 단단히 눌러두었던 마음 한자락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잠이 손 이 닿는 곳 바로 너머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피곤함은 차츰 살에 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왜?' 다시 성가신 물음이 떠올랐다. "왜 그랬디?" 나는 리에 게 소리내어 물었다. 나는 아직도 그 날 그가 한 행동을 리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 은 물론 용감했지만, 어떻게 보면,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어리석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가 그 전날 밤에 만든 유언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자 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감했었던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통일 촉성동맹>에 관한 토론회에서 그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 17장 6편> 살에 밴 피곤이 점차 빠져나가자, 살의 한구석에 갇힌 둔중한 아 픔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충 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서 마음을 가득 채운 아픔과 슬픔을 깊은 것으로 밀어넣었다. 덕분에 거듭 어려운 고비를 맞고 서도,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속으로 밀어넣은 감정들을 아직 그대로 가두어두고 있었다. 한번 그것들을 풀어놓으 면, 그것들에 휩쓸려갈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아픔 한 줄기가 가슴을 후비고 지나갔다. 살 속으로 전 해오는 그 아픔의 파편이 마비된 살의 건너편에서 슬픔과 아픔의 물 살이 일렁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아직은 아니디.' 턱에 힘을 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일었다. "언젠간 이 아픔과 슬픔을 털어놓을 날이 오갔디. 맘 놓구 통곡할 날이 오갔디. 그러나 지금은...' 빈말은 아니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 금 맛보는 슬픔과 아픔은 두 해 전 남편과 아들을 잃었을 때 맛본 아픔과 절망보단 훨씬 작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맛보는 슬픔과 아픔을 견뎌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나는 그의 유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좀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의 유언 은 별난 유언이었다. 그가 지녔던 것들은 모두 내게 남긴다고 했다. 그것은 리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별난 것은 그의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기지의 재 처리 시설에 넣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엔 끔찍하게 들렸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버릴물 처리를 맡았던 사람에게서 나옴직 한, 합리적 생각이었다. 사람의 몸은 달과 같은 불모의 세계에선 그냥 버리기 아까운 귀중 한 자원이었다. 이젠 그가 그 유언을 남길 때 어떤 마음이었나 짐 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의 유언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마음을 정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의 뜻을 따르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부탁을 저버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어쨌든, 더 미룰 순 없디. 내일이라도 웃분들에게, 사령관님께 서 바쁘시문, 행정부장에게라도, 보골 해야디...' 나는 돌아누웠다. 그의 체취가 다시 내 얼굴을 감쌌다. `한번만 다시 그를 안을 수 있다문... 그를 안고서 그의 거푸수수한 머릴를 내 손으로 쓰다듬어줄 수만 있다문...' 문득 눈앞에 지금은 냉동고에 들어있는 그의 몸이 재처리 시설로 처리되는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그의 몸이 분쇄기에 의해 잘게 썰어지고 세균들에 의해 분해되고 그의 살에서 나온 물과 자양분이 기지의 땅에 스며들어 풀들의 세포들로 바뀌고. 그래서 그의 몸은 언제나 기지 안의 풀과 남새들이 있는 곳에서 내 눈길을 맞을 것이었다. 끝내는 그렇게 바뀐 그의 살이 남새의 모습을 하고 내 몸 속으로 들어와서 내 몸의 한부분이 될 것이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내 얼굴에 조용한 웃음이 매어나온 것을 느꼈 다. 문득 가슴 속에서 무엇이 무너져 내리면서, 슬픔도 아픔도 아 닌 무엇이, 풋내나는 무엇이, 내 넋을 덮었다. 느닷없는 흐느낌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제 18장 1편> 젊은 련인들을 태운 늘씬한 비행차가 물품들이 우거진 늪 위를 매끄럽게 지나갔다. 지면효과 차량이 내뿜는 세찬 공기에 잔 물결 이 일고 물풀들이 허리를 꺾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버드나무 숲 뒤 로 비행차가 사라지더니, 그 젊은 련인들만 다시 나타났다. "정말로 멋진 찬데요. 한번 시험해보세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녀자가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서양 사람처럼 생긴 얼굴에 티 없이 맑은 살결이 꼭 인형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습니다. 비행차는 뭐니뭐니해도 센추리 비행찹니다. 센추 리 비행차." 역시 서양 사람을 본딴 마네킹처럼 생긴 젊은 사내가 말을 받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좋긴 좋다. 데런 비행찬 얼마나 갈까?'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나는 한가롭게 생각했다. 나는 물건 값을 어림하는 데는 영 솜씨가 없었다. 특히 남반부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은 값을 어림하기가 어려 웠다. 자본주의 사회라 그런지, 쓸모가 적어보일수록 값이 비싼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찌된 셈인지, 텔레비전의 광고들은 값을 밝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긴 뭐, 일백만 터몬이문, 데런 비행차 정돈 어렵디 않게 몰수 있갔디.' 은빛 우주선이 우주 공항을 박차고 하늘로 솟는 모습을 담은 새 광고를 무심히 바라보면서, 나는 적잖이 뿌듯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남반부의 출판사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출연한 텔레비전 영화 <달 나라에서의 사랑과 죽음>이 시청자들에게 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덕분에 나는 남반부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이름이 나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출판사 사람들은 나보고 영화의 내용을 다룬 수기를 써서 출판하자고 했다. 내가 글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자, 그 사람들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글을 대신 써줄 사람을 당장 올 려보내겠다고 나왔다. 내게 그런 제의를 낸 출판사들은 무려 여섯인가 일곱 군데나 되었 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광고를 많이 내서 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겠다고 했다. 광고만 제대로 하면, 어렵지 않게 일백만 부를 팔수 있으니, 내 수입이 일백만 터몬은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영 화에 대한 반응을 생각하면,.아주 허황된 얘기는 아닐 듯했다. `일백만 터몬이라... 그런 돈으론 도대체 무슨 물건들을 살 수 있디?'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갖가지 물건들이 눈앞을 스쳤다. 나로선 일백만 터몬이란 돈의 크기를 그려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큰 돈을 오히려 돈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밑바닥엔 그런 큰 돈도 보람있게 쓸 수 있다는 자 신감이 어렸다. 나는 이미 영화 출연료 이만 터몬을 다 쓴 터였다. 일만 터몬은 리명구의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그의 물건들 가운데 유물이 될 만한 것들과 함께. 일만 터몬은 한정필의 아내에게 보냈 다. 알고보니, 한에겐 어린 아들까지 있었다. 내가 그렇게 돈을 썼다는 것이 알려지자, 방송들과 신문들에서 그 일을 크게 다루었다. 덕분에 나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고 이곳 사람 들로부터 존경 비슷한 감정이 담긴 눈길까지 받게 되었다. 최옥순 소좌까지 전처럼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았던 녀인으로선 그렇게 바뀐 처지가 당 연히 반가웠지만, 실은 좋은 일에 쓰는 것은 아주 뿌듯한 기쁨을 준 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일이었다. 나는 그 이만 터몬을 썼을 때 처럼 내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이 드물었다. <제 18장 2편> 텔레비전의 광고는 달의 원면에 있는 천문대에서 방원경으로 천체 들을 살피는 중년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감탄하는 얼굴로 망원경에서 물러서자, 그의 아내가 망원경 앞으로 다가섰다. 그제서야 나는 그 광고가 달 나라 관광 여행에 관한 것임을 깨달 았다. `마침내 조선에서도 달 나라 관광 시대가 시작되었구나.' 얼마 전부터 장영실 기지가 곧 관광객들에게 공개된다는 얘기가 나돌았었다. 드래코 태번에서 묵고 장영실 기지와 원면의 천문대를 방문하고 정적의 바다 아폴로 11호 착륙 지점을 둘러다보는 코스가 계획되었다고 했다. 그런 조치는 장영실 기지에 금전적 도움이 되진 않을 터였지만, 남반부 주민들에게 월면 기지의 모습을 소개하여, 월면 기지 사업에 대한 지지를 높일 터였다. 월면 기지마다 예산 부족으로 애를 먹는 처지였다. 고다드 기지와 베른 기지에선 이미 재작년 부터 관광객 을 받고 있었다. `가만있자. 데런 광고가 계속 나오는 걸 보문, 남반부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그리 심각하지 않게 여기는 것 같기두 한데...' 만일 남반부 정부와 장영실 기지 사이의 관계가 나빠져서 달 나라 관광 여행이 어렵게 될 것 같다면, 비싼 텔레비전 광고가 나올 리 없었 다.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문득 광고가 사라지고 사내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타났다. "시청 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예고해드린 대로, 김일성 혁명 월 면 기지의 사령관인 박봉근 중장의 특별 성명과 기자 회견이 시작되 겠습니다..." 나는 등을 기댔던 소파에서 웃몸을 일으켰다. `사령관님의 특별 성명이 중계되긴 되는구나. 일단...' 다른 사람들도 자세를 바로했다. 풀어졌던 휴게실 분위기가 문득 팽팽해졌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우리 남한의 장영실 월면 기 지와 북한의 김일성 혁명 월면 기지는 지난 칠월 오일자로 합쳐져서 하나의 월면 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혁명 월면 기지의 사령관인 박봉근 중장, 우리 식으로 따지면, 소장이 됩니다만, 박 중장이 통합 기지의 사령관에 취임했습니다..." 화면엔 두 기지의 통합을 발표하는 우리 사령관님과 김용휴 사령 관님의 모습이 나왔다. "...그렇게 두 기지가 합친 목적은, 월면 기지 당국자의 표현을 빌리면, 두 월면 기지의 통합을 진정한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삼 으려는 것입니다. 이어 칠월 육일엔 박 사령관이 연방 정부가 통합 기지를 직접 통치 하도록 해달라고 연방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 정부는 그런 통합이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반대에 부딪쳐 입장이 난처해진 연방 정부는 결정을 미루다가 마침내 칠월 십오 일 에 통합 기지의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남반부와 북반부의 관리들이 월면 기지들의 통합을 인정할 수 없 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이어 련방 정부의 결 정을 밝히는 련방 정부 관리의 모습이 나왔다. 어쩐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몸이 굳어지고 낯빛이 어둑해지 는 듯도했다. 이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 련방 정부가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이리라고 여겼고 련방 정부의 거절은 두 월면 기지 요원들에 겐 작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제 18장 3편> "그래서 월면 기지의 통합은 갑작스럽게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의 계속적 지원이 없이는 월면 기지들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칠월 십육일에 남북한 정부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 표된 성명을 통해 월면 기지들이 그들이 일방적으로 취한 통합 조치 를 철회하지 않으면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월 면 기지들은 지금 아주 난처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그런 사정을 고려해볼 때, 오늘 있을 박봉근 사령관의 성명은 통 합 월면 기지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밝힐 것으로 예상되고 있 습니다. 그러면 현지의 모습은 어떤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월 면 기지 김수형 리포터." 화면의 오른쪽에 마이크를 든 김수형의 모습이 나왔다. "네, 월 면 기지 김수형입니다." "김 리포터, 그쪽 사정을 알려주시죠." "네." 그녀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오늘은 마침 우주선 아폴 로 십일호가 달에 착륙한 지 꼭 칠십 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달 나라에 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서, 각 월면 기지들에선 기념식이 엄숙히 거행됐습니다. 그러나 오늘 달 나라 사람들의 눈길은 역시 이곳 <조선 통합 월면 기지>에 쏠리고 있습니 다." 장영실 기지의 강당이 화면에 나타났다. 넓다란 방에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 화면에 나온 곳은 장영실 기지의 강당입니다. 오늘 있을 박봉근 사령관의 특별 성명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돌 고 있는 가운데, 그것이 통합 기지의 장래에 관해 극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선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나는 찬성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김은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사령관님께서 <조선 공화국 월면 임시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리라는 것은 이곳에선 이미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텔레비전도 그런 소문이 있다고 보도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아나운서가 그런 얘기를 미리 하는 것도 우스울 터 였다. "...연방 정부가 그런 제안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곳 월면 기지 사람들에겐 작지 않은 실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실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통일을 향한 정열이 뜨겁고 새 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굳은 월면 기지 요원들은 그런 좌절 을 오히려 기회로 바꾸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진지하면 서도 냉정한 그녀의 목소리 밑엔 열정의 울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 다. 실제로 그랬다. 충격과 실망은 곧 련방 정부에 대한 환멸고 바뀌 었고, 두 기지 요원들의 합동 회의에서 아예 독립 정부를 세우자는 얘기가 나오자, 두 기지의 분위기는 단숨에 밝아졌다. 내 곁에 앉은 권신호가 손목 전산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리명 규의 일을 맡기 위해 장영실 기지에서 파견된 젊은이였다. 우리 기 지엔 통신 전문가도 없었으므로, 장영실 기지에선 한정필의 후임자 도 보냈다. "권 동무, 지금 몇 십네까?" "음, 삼십 초 전입니다." 내게 보인 그의 웃음이 맑았다. 어쩐지 리명규를 생각나게 하는 젊은이였다. 서울이 고향이라고 했는데, 말씨가 남반부 아나운서들의 그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온실에서 함께 일하게 된 까닭에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제 18장 4편> "아, 여기 통합 월면 기지의 박봉근 사령관과 김용휴 부사령관이 회견장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김의 목소리와 함께 강당으로 들 어서신 사령관님과 부사령관님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두 분께 선 무슨 얘기를 하시면서 웃으셨다. 이어 손을 들어 강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하셨다. 사령관님의 태도와 낯빛에서 차분한 자신감을 읽고서, 나는 가벼 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며칠 동안 나는 사령관님 에 대해 적잖이 걱정했었다. 사령관님께서 무척 낙심한 듯하셨기 때문이었다. 잘못한 사람들을 공항의 감옥으로 보내신 뒤엔, 식사 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사령관님께서 정짜로 량 박사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셨나?' 나는 불쑥 튀어나온, 반갑지 않은 생각을 급히 마음 밖으로 밀어냈다. 그 사건이 수습된 뒤, 사람들은 사령관님과 량정애 박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들을 했다. 나로선 모두 처음 듣는 얘 기들이었다. 가만히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사건이 일어난 데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자인 리한숙 박사는 사령관님께서 이 번 일을 아주 서투르게 처리하셨다고 비난에 가까운 얘기를 했다. 나는 사령관님의 인격과 능력을 믿었고 그런 얘기들이 듣기 싫었 지만, 이번 일로 내가 사령관님께 지닌 믿음이 좀 흔들린 것도 사실 이었다. 솔직히 얘기하면, <사령관님께서 좀 더 프락찌야의 방해 공작에 신경을 쓰셨으면, 리명규가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하는 생 각까지 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휴게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다보았다. 모두 낯이 익었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이리로 올라올 때의 모습은 아니었다. 내가 지난 반년 동안에 많이 바뀐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많이 바뀌 었다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 그 사실을 곰곰 씹으면서, 나는 반 가움, 자랑스러움, 그리고 걱정을 함께 느꼈다. 사령관님께서 강단으로 나가셔서 강탁 위에 서류를 하나 꺼내놓으 셨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선 통합 월면 기지의 사령 관 박봉근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하려는 얘기는 우리 기지의 현 재와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사령관님께선 앞에 놓인 종이를 들여다보시면서 말씀을 이으셨다. "월면 기지는 그것을 세운 민족국가만의 것은 아닙니다. 온 인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지에 관한 일들은 이곳 달 나라와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조선 사람 들에게 크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나는 주로 조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호소하고자 합니다..." 나는 사령관님께서 서울 말씨를 쓰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 쓰시는 평안도 말씨와 달라서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도 언젠간 서울 말씨를 쓰게 될까?' 요즈음 우리 요원들은 모두 서울 말씨를 쓰려고 애썼다. 나로선 마음에 좀 걸리는 일이었지만, 서울 말씨가 듣는 이에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들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월면 기지는 적어도 삼백 명의 요원이 있어야 효율적으로 움 직일 수 있고 월면 공동체는 적어도 일천 명의 구성원을 가져야 자 생력이 있다는 것이 이곳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각기 백 팔십 명과 이십명 남짓한 요원들을 가진 장영실 기 지와 김일성 혁명 기지가 긴밀한 협력 체제를 갖추는 것은 기지의 일상적 운영이란 차원에서도 필연적이었습니다. 그런 협력에서 두 기지의 동시 건설은 비합리적이요 민족 력량의 낭비라는 결론이 나 왔습니다. 합리적 대안은 장영실 기지를 월면 기지로 계속 발전시키고 김일성 혁명 기지는 달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조선 사람들의 월 면 공동체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누가 저 발표문을 썼나?' 한가로운 물음이 내 머리를 스쳤다. `장영실 사람이 쓴 건 분명한데...' <제 18장 5편> "사령관님께선 계속 읽으셨다,"...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련 방 정부 아래에 두기로 결정했고 련방 정부에 그렇게 해주기를 요청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련방 정부는 우리의 요청을 거절했습니 다. 물론 우리 월면 기지 요원들은 모두 련방 정부의 그런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기지의 통합이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지향한 것이므로, 그것은 리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고개를 들어 회견장을 한바퀴 둘러다보셨다. "그러 나 그런 충격이 가시자,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정신은 새로 운 몸 속에 깃들어야 한다는 것을, 새로운 꿈은 새로운 흙에서야 꽃 을 피운다는 것을." `누가 썼는지 ,쓰긴 잘 썼다. <새로운 꿈은 새로운 흙에서야 꽃 을 피운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우리 민족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그냥 바 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인류의 마지막 프론티어이 자 진정한 프론티어라고 일컬어지는 외계로 향하는 관문인 달 나라 입니다. 이곳은 인류의 생장점입니다. 인류의 운명은 이곳에서 짜 여지고 있습니다..." 문득 반가움과 슬픔이 내 가슴을 채웠다. `저그나, 지금 니야기 들었디? 저그나가 늘 하던 니야길 사령관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것 들었디?' "이곳에선 지구의 국경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실제 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파란 달로 걸린 지구엔 국경이 보이지 않습 니다. 보이는 것은 생명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낸 바다들과 대륙들입 니다. 그래서 이곳 달 나라에선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하 나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광활한 외계를 향해 뻗어나갈 때, 우리는 모두 인류의 대표일 것입니다. 민족국가들의 대표들이 아닐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 기지들의 통합과 우리 민족의 통일은 인류가 그렇 게 하나의 문명, 하나의 종족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실현 되어야 할 것입니다..." 힘찬 박수 소리가 났다. 회견장에서 사령관님의 발표를 듣던 사 람들이 손뼉을 치고 있었다. 사령관님이 서류에서 고개를 들고 수줍은 웃음을 지으셨다. "그 리하여 우리는 선포합니다, 지금 여기에 조선 공화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우리는 모든 정당한 법과 관행들을 준수하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조선 사람 들의 지지와 다른 월면 기지들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다시 손뼉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멎기를 기다려, 사령관님께선 말을 이으셨다, "꼭 칠십 년 전에 인류는 이곳에 닿았습니다. 그 날 처음으로 달의 흙을 밟 은 사람의 유명한 말을 빌어서,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월면 기지 사람들에겐 작은 걸음이지만, 조선 민족 전체에겐 거대한 걸음이라고. 감사합니다." 휴게실 안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문득 권신호가 자리에 서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일어서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가슴 을 가득 채웠던 무엇이 시원한 비로 뿌리면서, 눈시울이 아려왔다. 그러고보니, 어느 사이엔가 모두 일어서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누가 외쳤다, "조선 공화국 만세." <제 19장 1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정필 동지가 자신의 조국을 위 해 일했고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충성을 바칠 정부에 대해 서 그가 우리와 생각이 달랐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지러운 때에 자신의 충성심이 어디로 향해야 하 는지 올바로 판단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분 명한 것은 한정필 동지가 자신의 마음에 따라 용감하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사령관님께서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서 무덤 둘레에 모 여선 우리를 한바퀴 둘러다보셨다. 우리는 한정필과 리명규의 장례를 치르는 참이었다. 묘지는 우리 기지에서 동북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그만 크 레이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한정필 동지를 책망이 아니라 존경으로, 부 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으로 작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는 그의 모습을 그리움으로 떠올릴 것입니다." 좀 잠긴 듯한 목소 리가 지금 사령관님의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슬쩍 드 러내주었다. 사령관님께서 다시 말씀을 멈추시고서 연설문이 씌어 진 종이로 부터 무덤 속 관에 눈길을 주셨다. "그러나 지금 조선 반도를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두 정부들이 과 거의 유물들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사령관님의 목소리에 문득 힘이 실렸다. 우주복의 무선통신망을 통해 들리는 터라, 그래도 어 쩐지 속이 좀 빈 듯한 울림이 있었다. "실은 련방 정부조차도 과거의 유물입니다. 이번에 조선공화국 월면 림시 정부의 수립을 필연적으로 만든 사건들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새로운 사 회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요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 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가 우리 손으로 여기에 세운 조선 공화국에 있다는 것을..."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새 북반부 정부와 남반부 정부가, 련방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쩐지 환상적인 것들로 느껴 지고 실체가 있는 것은 월면 임시 정부라는 느낌이 갑자기 짙어졌 다. 월면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사령관님께서 선포하신 지 겨우 닷새 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 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림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방송이 나간 뒤 사람들이 보인 반응들을 생각하면. 처음엔 북반부 정부나 림시 정부에 대해 아주 적대적인 반응을 보 였다. 남반부 정부 관리들은 임시 정부의 수립을 <소영웅주의에 물 든 과대망상증 화자들의 위험한 장난>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주동 자에 대해선 반역죄로 사법적 처리를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북반부는 남반부보다도 훨씬 격렬한 어조로 림시 정부를 비난했 다. 남반부 정부가 이미 한 비난들과 위협들에다가 두 월면 기지의 통합과 림시 정부의 수립이 모두 남반부 정부의 음모에서 나왔다고 남반부 정부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여론은 처음부터 림시 정부에 유리하게 흘렀다. 많은 조 선 사람들이, 조선 반도에 사는 조선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들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까지, 조선공화국의 수립을 반겼고 적잖은 사람들이 충성을 서약했다. 남반부 정부 관리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사이에도, 서울의 거리에선 림시 정부를 지지하는 시위가 자발적으 로 일어났고 그런 시위는 이내 남반부 곳곳으로 퍼졌다. 처음엔 중 립적이었던 대중매체들도 점차 림시 정부에 호의적이 되었다. <제 19장 2편> 여론에 밀린 남반부 정부는 마침내 어제 선언했다, 림시 정부와 통일 방안에 관해 협상을 벌리고 협상 기간 동안엔 장영실 기지에 대한 물자의 공급을 계속하겠노라고.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은 듯, 북반부 정부도, 비록 우리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비 난만은 멈췄다. 난처하게 된 것은 련방 정부였다. 그러나 아무도, 련방 정부의 관리들까지도, 이제 련방 정부의 역할은 끝났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뜻밖으로 큰 힘이 된 것은 다른 월면 기지들이 이내 우 리를 지지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지지는 최악의 경우 우리의 두 기지들이 지구로부터의 지원이 끊기더라도 당분간 생존해나갈 수 있 다는 것을 뜻했으므로, 우리는 사기가 크게 올랐다. 특히 <셀레나이트 무브먼트>는 처음부터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 했다. <셀레나잇 타이드>는 사설을 통해 조선공화국 월면 림시 정 부의 수립이 지닌 뜻을 소개했고 조선 민족의 통일이 하나의 인류 문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림시 정 부의 입장을 소개하고 환영했다. 그래서, 비록 어처구니없이 죽은 동료들의 장례를 치르는 날이었 지만, 오늘 우리는 모두 마음이 가벼웠다. 처음으로 우리 기지들과 림시 정부의 장래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내놓을 수 있었다. 최옥순 소좌 얘기로는 어젯밤에 김용휴 사령관이 <사태는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남지만,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들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고인과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합니다. 고인이시여, 편히 쉬소서. 그리고 우리의 앞날을 보살펴주소서. 이천삼십구년 칠월 이십오일 조선공화국 월면 림시 정부 주석 박봉근." 사령관님께서 연설을 끝내셨다. 이어 무덤 앞으로 한 걸은 다가서시더니, 무릎을 꿇으시고서 북반부 국기로 덮인 관 위에 연설문이 적힌 종이를 내려 놓으셨다. 관을 덮은 깃발을 보자, 아픔에 가까운 그리움이 내 가슴을 움켜 쥐었다. `아, 이젠 데 깃발도... 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 발도 다신...' 나는 흘긋 크레이터의 바깥 벽 기슭에 선 깃대를 돌아다보았다. 긴 합성수지 깃대 위에 분홍 진달래 한 송이가 곱게 그려진 알루미 늄 깃발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걸려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지도 비에 젖지도 않을 깃발이. 조선공화국의 깃발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깃발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은 아직도 새 깃발보다는 이제 땅에 묻힐 낡은 깃발로 쏠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우리가 그 깃발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의 조국은 묻히고 있었다, 이 낯 선 세상에서 태어난 새로운 조국에게 자리를 내주고서. 그러나 아 무도 우리의 조국이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렇게 묻힌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 사실이 뜻밖에도 내 가슴을 짙은 슬픔으로 채웠다. <제 19장 3편> 무릎에 흙을 묻히신 사령관님께서 옆에 선 류상현 중좌를 돌아다 보셨다. "다 됐나? 이제 흙을 뿌리는 건가?" "네, 주석님." 행정부장이 냉큼 대꾸했다. <주석님>이란 호칭이 어쩐지 귀에 설었다. `그래도 이제부턴 주 석님이라고 해야 되갔디. 이건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구...' 나 는 그 점을 마음에 새겼다. "그러문 내레 먼저..." 사령관님께선 다시 몸을 굽히시고서 두손 으로 흙을 쥐어서 관 위에 뿌리셨다. 사령관님 곁에 섰던 사람들이 따라서 흙을 뿌리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 고인 슬픔의 물살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흙 에 덮이는 깃발에게 작별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그 슬픔의 물살 아래엔 안도감의 단단한 바닥이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상징하는 것들을 지키려다가 죽은 젊은이의 관을 덮고 묻 히는 것은 그 깃발에게 걸맞는, 위엄있는 끝이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사령관님 방의 벽에 걸렸던 그 깃발은 훨씬 초라한 대접 을 받았을 터였다. "그러문 고 한정필 동무의 장례식을 마치갔습네다. 모두 한 삽씩 흙을 퍼서 고인의 잠자리에 뿌리주시기 바랍네다." 류 중좌가 말했 다. 우리는 차례로 흙을 관 위에 뿌렸다. 이어 오른쪽에 있는 리명규 의 무덤으로 옮겨갔다. 남반부 방송국들의 요원들이 촬영 기재들을 분주히 옮겨 설치했다. "그러문 고 리명규 동무의 장례식을 거행하갔습네다. 운반조는 관을 내리시기 바랍네다." 하관이 되기를 기다려, 류 중좌는 말을 이었다. "이제 부주석의 영결사가 있갔습네다." 김 부사령관이 무덤의 발치로 나섰다.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한 뒤, 그는 앞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지금 우리는 한 젊은이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입니다. 그것이 젊은 사람의 죽음일 때는 더욱 슬픈 일입니다. .." 둘러선 사람들의 눈길과 텔레비전 카메라들의 초점이 내 면판에 쏠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평정한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 다. 실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온 덕 분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었다. 그가 죽 은 지 스무 사흘 - 더도 아니고 삼 주면, 되었다. 련인의 죽음으로 받은 아픔과 슬픔이 견딜 만한 것으로 되는 데는. 나는 안심도 되 고 부끄럽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저는 리 동지를 생전에 만나 사귀는 행운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손실이었나 하는 것은 그를 생전에 알았던 분들의 얘기들에서 이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엔 그의 여러 가지 좋은 점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정신이 이 시대의 정신과 하나를 이루었다는 점인 것 같 습니다. 그가 이곳 달 나라에 올라와서 한 언행들이 모두 그 사실 을 가리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땅에 묻지 말고 폐기물 재처리 시설에 넣 어달라고 한 그의 유언에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자신 이 태어난 시대의 뻗어가는 프런터어에서 살면서 자신의 삶과 일의 참된 성격을 통찰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유언입니 다..." <제 19장 4편> `연설문은 뉘레 썼나? 한 사람이 둘 다 쓴 것 같은데...' 아까 사령관님께서 하신 연설이나 지금 부사령관이 하는 연설이나 녀느 연설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그 장 뭐라는 시인? 명규를 <셀레 나이츠>에 소개한 사람? 그리구 이번에 비명을 지었다는?' "...우리가 지금 그의 유언을 따르는 대신 이렇게 그의 몸을 땅에 묻는 것은 그의 유언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이 제는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그의 삶을 기려야할 중요한 인물이 되었 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음이 바쁘고 어지러운 속에서도, 나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띠 었다. 부사령관이 한 얘기는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리의 시체를 재처리하지 않고 땅에 묻는 것은 그가 갑자기 큰 인물 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점도 있긴 했지만. 여러 날 고심한 끝에 나는 리의 유언을 따라 그의 몸을 재처리하 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자신의 판단으로 그의 뜻을 무시한다면, 나는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와 다신 떳떳하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없이 좀 슬픈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그의 모습을 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장을 읽고나시더니, 사령관님께선 고개를 저으셨 다. 그의 뜻은 훌륭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뜻을 따를 수는 없다 고 하셨다. 달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뜻을 이해하고 대부 분은 그의 뜻을 따르는 데 찬성할 터였지만,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 은 그의 뜻을 이해하기는 커녕 우리까지도 이상한 사람들로 여기리 라는 말씀이셨다. 그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로선 물론 그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어선 안되었다. "...이제 우리는 고 리명규 동지가 그의 삶으로써 가리킨 방향으 로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 약속과 함께 우리는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합니다. 고인이시여, 편히 쉬소서. 그리고 우리의 앞 날을 보살펴주소서. 이천삼십구년..." 연설을 마치자, 부사령관은 사령관님께서 하신 것처럼 연설문이 씌어진 종이를 관 위에 놓았다. 무덤 바로 옆에 섰던 나도 때를 놓치지 않고 앞주머니에서 훈장 두개를 꺼내들었다. 하나는 리의 것이었고 하나는 내 것이었다. 그저께 월면 림시 정부 수립에 공이 큰 사람들에 대한 표창식이 있었는데, 리는 홍조 국민훈장을 받았고 나는 황조 국민훈장을 받았 다. 홍조 훈장은 국민훈장들 가운데선 가장 높은 것이었고 다음이 황조 훈장이었다. 격식대로 하자면, 관 안에 넣어야 했지만, 내가 경황이 없어서 관 안에 미리 훈장을 넣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이었다. `저그나, 이건 저그나 꺼고 이건 내 껀데...' 새로운 깃발로 덮 인 관 위에 나는 훈장들을 올려놓았다. 내가 고개를 들자, 부사령관이 고갯짓으로 물었다. 다 끝났느냐 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사령관이 두 손으로 흙을 모아서 관 위에 뿌렸다. 나도 흙을 모아서 훈장들 위에 뿌렸다. `저그나, 잘 자라요. 이 제 편히...' 문득 눈시울이 따가와져서, 나는 턱에 힘을 주고서 고 개를 흔들었다. 무덤을 흙으로 덮는 일이 끝나서, 조그만 봉분이 둘 생겼다. 풍 경은 황랑했고 둘러선 사람들은 우주복을 입어서 외계인들 같았지 만,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들과 어울려 조그맣고 잔디로 덮이지 않 은 봉분들이 제법 무덤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제 19장 5편> 무덤터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장례식에 모인 오륙십 명은 될 사람들은 대부분이 장영실 기지 사람들이었다. 우리 기지 요원들이 원래 스물 셋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다섯이 죽거나 감옥에 갔으므로, 여기까지 온 요원들은 열 남짓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이 와주어서, 장례가 덜 쓸쓸했디...' 장영실 기의 큰 뜨락또르들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고마운 마음이 들 었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끼니...' <한 식구>라는 말에 느닷없이 속에서 분노의 시뻘건 물살이 솟구 쳤다. `한 식구... 이번에도 우리가, 우리 북반부 사람들이, 큰 대가를 치뤘다. 젊은 목숨이 둘이 죽었구 셋은 감옥으로 갔구... 데 사람들은 사람이 죽기는 커녕 얼굴을 붉히구서 논쟁한 일두 없다 는데, 왜 우리만...' 분노의 물살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무슨 외마디 소리라도 크게 질러야만 될 것 같았다. 슬그머니 겁이나서, 나는 무선통신망 스위치를 내렸다. 다행히 햇빛이 환한 대낮이라, 면판이 불투명해 서, 틀림없이 험악했을 내 낯빛을 본 사람은 없었다. "저건 뭐지?" 누가 물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따라 돌아다보니, 동쪽에서 뜨락또르 한 데가 나타 났다. "누가 장례식에 시간 한번 잘 맞춰서 나타나는군." 누군가의 우 스갯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내가 가까스로 분을 삭이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 뜨락 또르가 닿았다. 드래코 태번의 문장을 한 차였다. 문이 열리고 우 주복을 입은 사람이 내렸다. `박진동 선생인 모양이구나.' 내 마음 속 좀 찜찜했던 구석이 밝 게 트였다. 박 선생이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자 꾸 그 까닭을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어 박진동 씨의 부축을 받으면서 레이디 오렉스가 내렸다. "아, 멋지다." 누가 소리내어 감탄했다. "정말 그런데. 레이디 오렉스 아냐." 누가 이내 동의했다. 그녀는 정말로 눈에 산뜻하게 들어왔다. 분홍빛 드레스에 자주빛 리본을 단 노랑 모자를 쓴 그녀는 서양의 귀부인 같았다. 볼품없는 우주복에 싸여서 먼 땅에서 찾아온 이방인들 같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만이 사람다웠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왼팔로 레이디 오렉스와 팔짱을 끼고 그녀 를 인도하면서, 박 선생이큰 소리로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사과했다. "차에 올라타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그걸 처 리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이거..." 박 선생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레이디 오렉스는 무덤 들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가져온 꽃다발 하나를 리명규의 비석 앞에 놓았다. 헝겊으로 만든 붉은 장미 다발이 내가 만든 흰 국화 다발과잘 어울렸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나서, 한정필의 무덤에 놓을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리의 무덤 앞에 놓인 꽃다발을 살폈다. 고 개를 갸웃하더니, 그녀가 다시 앞으로 나가서 꽃다발을 고쳐 놓았 다. 내 몸 속으로 문득 저릿한 기운이 흘렀다. 그녀의 몸짓이 그리도 사람의 몸짓다왔다. 아니, 황랑하고 우중충한 달 나라 풍경 속에서 그녀는 낯선 세상에서 온 이방인들처럼 보이고 몸짓이 굼뜬 우리들 보다 훨씬 사람다웠다. <제 20장 1편> "이렇게 해서 조선 사람을 최초로 달 나라에 묻는 장례식은 마침 내 끝났습니다." 어느세 카메라를 멘 서홍의 손짓에 맞춰, 김수형 이 보도를 시작했다. "새로운 정부가 태어나는 진통 속에서 희생된 두 젊은이들은 이제 그들의 새로운 유택에서 쉬고 있습니다..." 김의 얘기처럼 장례는 끝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묘지에서 떠났 다. 묘지 둘레엔 사람들의 발자국들과 뜨락또르의 바퀴 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았고 동쪽 지평엔 장영실 기지의 마지막 뜨락또르가 조 그만 크레이터를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떠난 묘지의 모 습을 담을 마지막 장면에 나와달라는 김의 요청에 따라 남은 것이었 다. "사람들의 모습은 무덤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비석들이 남아 서 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얘기해줍니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한정필의 무덤 앞에 서서 비석을 살피는 박순 조의 모습을 찍었다. "<나그네여, 평양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시오: 이곳에 누운 나는 그들이 하라는 일을 했노라.> 한정필 씨의 비석에 새겨진 이 비명은 귀에 설지 않습니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 아의 대군과 싸우다가 죽은 스파르타의 용사들을 기린 비명을 본땄 기 때문입니다. 비록 때와 장소가 다르지만,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 는 것들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뜻은 같습니다..." 한을 위한 비명은 장영실 기지 요원으로 시인인 장 뭐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좀 수다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유명한 옛날 비문에서 따온 것이 그럴 듯하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 김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란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죽은 사람이야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을 대변 할 비명이 있다는 것을 그가 다행스럽게 여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낯선 세상에 외롭게 묻힌 젊은이에겐 수다스러움도 그리 싫 지 않을 터였다. `그러문 내레 잘못했나?' 문득 가슴에 그늘이 졌다. 이번에 비석들은 장영실 기지에서 만들었다. 그쪽에 비석을 만드 는 데 쓰이는 기구들도 많았고 만들 사람도 많았다. 김수형이 비석 에 새길 비명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리명규의 비석엔 비명을 넣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리명규는 수다스럽지도 수다스러운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석에 비명을 새기는 것이 원래 조선 사람들에겐 없는 것 같았고 굳이 비명을 새기지 않아도 당사자는 떳 떳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나서디 말고 그냥 남들이 하자는 대로...' 아까 리명규의 비석 엔 왜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을 때 도, 나는 내가 옳았다고 스스로에게 일렀었다. 지금은 갑자기 자신 이 없어졌다. "...남북한 정부들만이 아니라 연방 정부까지도 과거曠 유물들로 여기는 이곳 사람들이 그런 낡은 체제를 지키려다 죽은 젊은이에 대 해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씨를 보이는 것이 저로선 무척 반갑습니다. 평양에 있는 사람들이 이 비명을 보기를,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다 먼 세상에서 죽은 젊은이를 오래오래 기리기를..." <제 20장 2편>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서홍이 나보고 준비하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나는 비석 앞으로 다가서서 거기 놓인 꽃들을 고쳐놓는 시늉을 했 다. "한정필 씨 옆에 나란히 누운 리명규 씨의 무덤 앞에 서면, <침묵 은 금이다>란 얘기가 떠오릅니다. 그의 생애는 비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잘 말해주는 김에게 고마워하면서, 나는 허리를 펴고서 카메라가 비석을 제대로 찍도록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검은 비석 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먼 눈길로 바라보았다. 리명규 2017. 1. 4. 조선공화국 황해북도 곡산군 I 2039. 7. 2. 풍요의 바다 김일성혁명월면기지 "...그의 기억은 그를 알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길 이 남을 것입니다." 카메라가 돌아서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미리 약속한 대로, 나는 지구가 걸린 서쪽 하늘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돌아서는 것을 보자, 뜨락또르 곁에 권신호와 함께 선 조해명 이 한 손을 들어 손짓했다. 나는 때꾸하려고 들던 손을 급히 내렸다. 카메라는 내가 지구를 바 라보는 모습을 뒤에서 찍고 있을 터였다. "...우리 모두가 리명규 씨가 생전에 이루기 위해 그리도 애썼던 사업, 즉 조국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서 바라보면, 지구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비록 여기서 살지만, 조선 통합 월면 기지의 요원들의 가슴과 눈길 은 언제나 한반도로 향합니다." 나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지구를 보는 것이 아니 었다. 나는 그 파란 달 너머 컴컴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내 가슴 과 눈길은 이제 외계를 향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의 목숨이란 고귀한 희생 위에서야 가능했던 조선공화 국 월면 임시 정부의 수립이 조국 통일의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 음 간절합니다. 풍요의 바다에서 김수형이 전해드렸습니다." <풍요의 바다>란 말이 내 가슴에 깊이 있는 울림을 남겼다. 갯내 를 풍기는 바닷 바람에 실려, 언젠가 리가 틉틉한 목소리로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언젠가는 우 주선을 타고 먼 행성으로 탐험을 떠날 겁네다.> 문득 눈앞이 흐려지면서, 목이 잠겨왔다. `저그나, 벌써 두 달째 없어. 저그나 아일 가딘 게 분명해. 내레 혼자서라두 그 아일 잘 낳아서 키울께...' 그에게 약속하는 사이, 배를 쓰다듬어보려고 저절로 움직인 손이 우주복에 닿았다. "이 망할 놈의 우주복." 무심코 중얼거리고서, 나는 아차 싶었다. "리 녀사,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홍의 큰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덮었다. < 연재를 마칩니다 > 작가로부터의 편지 - 연재를 끝내며 - 연재의 마지막 부분이 될 제20장을 써놓은 지금, 저는 피로의 물 살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느낍니다. <내레 추석날꺼지 자판을 두드렸으니끼니, 이젠 점 쉬어도 되갔디>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러나 그런 피로의 물살 위로 뚜렷이 솟은 것들이 있습니다. 별다른 허물없이 연재를 마치게 되었다는 푸근한 안도감과 그 동안 도와주 시고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과 <한국PC통신>의 관계자들께 향한 커다란 고마움입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새로운 매체에 소설을 연재하 는 것은 작지 않은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안도감과 고마움 은 충분히 정당화될 것입니다. 특히 고마움은, 독자 여러분들의 성 원에 힘입어, 저는 처음에 긴 중편을 뽑아낼 만하다고 여긴 소재에 서 어엿한 장편 하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함께 전산통신망이란 새로운 매체가 소설의 시장으로서 지닌 가능성에 대해 탐험했습니다. 아직 그것의 특성과 가능성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일단 긍정적 보고 서를 바깥 사람들에게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독자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격려와 비평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록 때론 짐이 되었다고 고백해야 하지만, 이제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여러분들의 마지막 비평들을. 1992. 9. 11 복거일